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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이 아무리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말을 가끔 듣지만, 이건 좀 정도가 지나쳤다.
고개를 돌리자 다른 직원들의 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눈빛도 곽수정 대리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다미가 도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삼쫀.”
“왜 그래 다미야? 혹시 졸려?”
“그게 아니라, 저는 남자 친구 필요 없써요.”
“왜 필요가 없어?”
“저는 커서 삼쫀이랑 결혼할 거라서요, 헤헤.”
해맑게 웃는 다미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일주일 후.
유레카에서 한 블록 떨어진 커피숍.
이곳은 도훈이 김민석 부사장과 독대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다만 그전과 다른 것은 앞에 앉은 사람이었다.
도훈의 옆에는 케이넷에 합류한 한지혜 피디가 있었고 그들의 앞에는 진시현 작가와 정찬성 피디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치 소개팅을 하는 듯한 분위기.
그만큼 이 자리에는 웃음이 넘쳤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미리 서로의 이견을 조율한 상태였다.
도훈은 진시현과 정찬성이라는 필요했고 그들은 자신의 프로젝트를 밀어줄 회사가 필요했다.
커피가 나오자, 도훈이 물었다.
“정 피디님은 괜찮으세요?”
“저요? 저 멀쩡한데요.”
“아니, 날씨도 추운데 그렇게 차가운 거 드시면…….”
“저는 얼죽아입니다.”
정찬성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활짝 웃었다.
그 모습에 도훈이 말했다.
“앞으로 큰일 하실 분이신데, 감기라도 걸리시면 어떻게 하려고요?”
“저는 태어나서 감기 한 번…….”
정찬성이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막는다.
“에취!”
소리가 제법 컸는지 주변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정찬성이 멋쩍게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 정 피디. 몸 관리를 하라니까. 진짜 창피해서 같이 못 다니겠어. 그리고 이 실장님 말이 맞아. 작품 들어가기 전에 입원하겠어. 참, 왜 거짓말을 해? 지난번에도 감기몸살 때문에 촬영 일정이 늦어졌잖아. 말하는 김에 이것도 얘기해야겠네…….”
진시현 작가가 정찬성 피디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도훈은 둘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둘은 벌써 네 번째 호흡을 맞추는 콤비였다.
둘이 사귄다는 말까지 떠돌 정도다.
전생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둘을 직접 본다면 사귄다는 말을 절대 할 수 없을 것이다.
커플보다는 항상 투덕거리는 흔한 남매에 가까웠다.
진시현의 잔소리가 끝나자 정찬성의 입술이 달싹였다.
반격하려고 하는 표정이었지만, 도저히 엄두가 안 나는 모습이었다.
어찌 보면 드라마판의 생태계를 정확히 반영한 모습이기로 했다.
야구는 투수 놀음,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만큼 스타 작가의 입지는 탄탄했다.
피디는 바꿀 수 있어도 작가는 바꾸지 못하는 게 이 판의 규칙이니까.
하지만 잔소리를 듣는 정찬성은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아 보였다.
덕분에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졌다.
진시현 작가의 앞에는 마카롱과 캐러멜 마키아토 두 잔이 놓여 있었다.
한 잔을 다 먹고 시킨 것이 아니라 미리 두 잔을 시킨 것.
그만큼 그녀는 단 음료를 좋아했다.
도훈이 그녀의 음료를 바라보자, 진시현이 웃었다.
“제가 달콤한 걸 좋아해서요. 이게 작품 구상에만 들어가면 당이 당기더라고요.”
“입맛에 맞으시면 언제라도 와서 드세요.”
“에이, 농담도 잘하신다. 여기 주인도 아니시잖아요.”
“여기 제가 운영하는 곳이에요, 취미로 이런 것도 하거든요.”
“네?”
“요즘 먹고살기가 얼마나 힘든데요, 매니저만 해서는 턱도 없어요.”
도훈이 씩 웃자 진시현이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에 도훈이 말을 이었다.
“그건 그렇고 대본 준비되는 대로 시작하시죠. 저는 케이넷으로 오셔도 되고 외주를 통해서 작업하셔도 됩니다.”
“저희 마음대로 하라고요?”
“저희한테 필요한 건 시청률이지, 방법이 아니니까요.”
“생각보다 호쾌하시네요. 혹시 캐스팅에도 관여 안 하실 건가요? 이건 케이넷 대표님께 물어봐야 하나?”
“그냥 저에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러고 보니 케이넷 대표님과는 어떤 사이에요?”
“뭐,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고 할까요?”
“아, 친척이시구나, 어떤지 이름이 같더라…….”
의미심장하게 웃는 진시현.
도훈은 슬쩍 한지혜 피디를 바라봤다.
한지혜는 도훈의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인원 중 하나였다.
한지혜와 진시현은 꽤 가까운 사이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도훈의 정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
도훈의 시선에 한지혜가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입이 무겁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듯 보였다.
진시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작 방식은 실장님한테 맡길게요. 저희도 갑자기 떨어져 나온 거라, 상황이 조금 애매하거든요. 그리고 캐스팅에만 관여하지 않으시면 저희는 오케이예요.”
“물론입니다. 관여하지는 않겠지만, 도와 달라고 하시면 힘닿는 데까지…….”
“참, 섭외의 신이 유레카에 있다면서요.”
“아.”
“섭외는 제가 유레카 쪽에 부탁드릴게요. 제가 생각한 배우가 딱 두 명 있는데 그건 유레카 쪽에 부탁해야 할 것 같아서요.”
“배우요?”
도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소환하라 1987의 경우는 신인의 등용문이라 불리던 드라마였다.
은행원인 가장의 경우는 유명 배우인 장동일이 맡았지만, 나머지 배역의 경우는 배우로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사람들은 소화하라 1987을 가성비 드라마라 부르기도 한다.
유명 배우 장동일이 출연료가 가장 높았지만, 맡은 역할이 주연이기 때문이었다.
장동일의 경우는 약방의 감초 같은 배역.
주연 배우들은 신인으로 도배했었다.
진시현이 힐끔 정찬성을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정찬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진 작가님이 오케이했으면 저는 그냥 따라가는 거죠. 전 그냥 깍두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이, 정 피디 왜 그래? 정 피디도 한 고집하면서…….”
“진 작가님 고집만 하겠습니까?”
“호호, 이렇게 하면 꼭 내가 정 피디 기를 꺾는 것 같잖아. 그냥 져 주는 거로 하면 안 될까?”
“그것도 진 작가님 마음이죠.”
정찬성이 씩 웃었다.
이럴 때면 커플 같은 느낌도 들었다.
정찬성의 동의를 확인한 진시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우리 마음이 얼마나 맞는지 확인해 볼까요?”
“확인이요?”
“제가 작품 파트너와 항상 하는 놀이인데…….”
진시현이 제안한 것은 간단한 게임이었다.
대본에 나와 있는 배역에 누가 어울릴지 제작사 측과 작가가 동시에 냅킨에 배우를 적는 것이다.
다 적고 나면 동시에 냅킨을 펼치는 것으로 배우 이름을 확인하는 게임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지만, 서로의 마음이 얼마나 맞는지 확인하는 텔레파시 게임이라고 한다.
진시현이 이런 게임을 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바로 미신 때문이었다.
언젠가 TV 프로그램에서 이와 비슷한 게임이 할리우드에서 유행했다고 전한 적이 있었다.
그 게임에서 하나라도 마음이 통하면 그 작품은 대박이 났었다고 한다.
그 TV 프로그램을 본 후 진시현도 다음 작품에서는 이 게임을 해 봤다고 한다.
그 작품이 바로 ‘그 겨울의 햇살’이었다.
지금의 진시현을 있게 만든 작품이자 정찬성과 첫 번째 호흡을 맞춘 작품이었다.
사실 이 게임에서 서로 생각하는 배역이 일치한다는 것은 로또와도 같았다.
뭐, 서로 취향이 비슷할 수도 있겠지만, 대한민국에는 배우가 생각보다 많았다.
얼굴 천재라 불리는 미남 배우를 한 명 떠올리라고 하면 과연 누굴 떠올릴까?
각자 머릿속에 떠올린 배우가 다를 것이다.
어쨌든 진시현의 제안에 도훈은 재미있겠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은 첫 번째 배역을 냅킨에 적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다음 배역에 맞는 배역을 적어 가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한지혜는 그 모습에 눈을 크게 떴다.
대본을 읽어 봤다고는 하지만, 아무 고민도 없이 이렇게 적을 수는 없었다.
도훈은 눈 깜짝할 사이에 대본에 나와 있는 배역에 대한 예상 캐스팅을 냅킨에 휘갈겼다.
사삭.
그 모습에 한지혜는 슬쩍 진시현의 눈치를 봤다.
진시현이 친한 작가이긴 해도 괴팍하기로는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성의 없이 적는다면?
방송국이라는 갑의 관계이긴 해도 조금은 위험했다.
기존에 탄탄하게 자리 잡은 지상파와 거대 케이블 방송사도 박차고 나온 그들이 아니던가?
한지혜는 도훈을 바라보며 슬쩍 눈치를 줬다.
하지만 도훈은 벌써 펜을 놓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순간 한지혜가 입을 벌렸다.
진시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시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실장님은 재미없나 봐요.”
“아닙니다. 저도 재미있게 적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고민도 안 하고 이렇게 적어요.”
“대본을 보고 바로 떠오른 배우들이 있었거든요.”
“대본을 보고 바로 떠올랐다고요?”
“네.”
“캐스팅에 관여 안 하신다고 했잖아요.”
“캐스팅에 관여 안 할 겁니다. 제 의견은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작가님께서도 이건 그냥 게임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냅킨에 적은 배우들도 제 생각일 뿐이니까요.”
“오호, 그래도 조금 신경 써 주시지…….”
진시현이 입맛을 다셨다.
그때 한지혜가 다급히 나섰다.
“일단 배우 이름부터 확인하죠, 작가님.”
“흠, 그래요. 그럼 같이 배역 순서대로 확인해 볼까요? 하나, 둘, 셋 하면 펼치는 거예요. 하나, 둘, 셋!”
그녀의 말에 따라 도훈은 냅킨을 펼쳤다.
순간 진시현의 눈이 보름달만큼 커졌다.
대본에 나와 있는 배역의 첫 번째는 은행원인 가장역이었다.
그런데 둘이 똑같은 이름을 적은 것이다.
장동일.
잠시 당황하던 진시현이 손뼉을 쳤다.
“와, 어떻게 저랑 생각이 똑같을 수가 있어요?”
“얼마 전 대본을 받고 처음 떠올린 게 장동일 선생님이거든요.”
“선생님은 무슨 선생님이요, 배우님이라고 불러요. 선생님이란 호칭을 동일이 오빠가 들으면 서운해하겠다.”
“아, 죄송합니다. 어쨌든 집안을 위해서 개미처럼 일하면서도 특유의 유머러스함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를 생각하니 딱 장동일 배우님이 떠올랐습니다.”
“오호, 이 작품 대박 나려나 봐요. 그럼 다음. 하나, 둘, 셋!”
진시현이 다시 구령을 외쳤다.
동시에 둘은 냅킨을 펼쳤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유영채.
이번에는 옆에서 지켜보던 정찬성 피디까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산층 가정의 가장의 배우자 역할이다.
중견 배우 둘에 대한 캐스팅이 일치할 확률은?
그 정답을 정찬성이 외쳤다.
“와, 이건 로또 당첨될 확률인데요. 잠시만 기다려요. 나 로또 좀 사 올게요.”
“정 피디, 호들갑 떨지 말자고. 로또는 얘기 다 끝나고 나서 사. 나도 몇 장 사야 할 것 같으니까.”
“하하, 진짜 이건 대박입니다.”
정찬성이 침까지 튀기자, 진시현이 그의 입을 남은 냅킨으로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