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그들의 목소리는 스피커에서 계속 흘러나왔다.
―이상한 나라로 떠나는 내 모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고음이 시작되자 장혁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도훈은 그 모습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이 정도에서 음정을 놓칠 장혁이 아니었다.
지금의 상황은 강시혁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살짝 음정을 떨기는 했지만, 기교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수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바이브레이션에 가까웠다.
도훈은 잠시 그가 전생에 불렀던 ‘앨리스’를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이쯤에서 저런 음색이 나왔던 것도 같다.
어찌 보면 쿠세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신인의 경우는 쿠세를 지우기 위해 트레이닝한다.
하지만 가필드라면?
거기에 장혁이라면?
그 쿠세는 테크니컬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맞았다.
모두가 따라 하는 버릇이라면, 스킬로 봐야 한다는 어떤 평론가의 말도 있지 않은가?
스피커에서 다시 리드미컬한 멜로디가 이어졌다.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아련히 울려 퍼지는 장혁의 보컬.
강시혁을은 그들을 보며 입맛을 다신다.
마치 먹잇감을 바라보는 야수의 눈빛이었다.
거기에 일 할 정도는 감탄이 섞여 있었다.
도훈은 강시혁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블랙홀을 정상 궤도에 올려놓고 나면 강시혁은 다른 그룹에 눈을 돌릴 것이 뻔했다.
블랙홀에 만족 못 해서가 아니라 뮤지션으로서의 욕심 때문일 것이다.
이제는 랩 파트로 들어갔다.
―하얀 토끼 따라간 곳은…….
―꿈같은 땅을 망치는 여왕!
―초콜릿 병사와 재미난 사건들
―내 모험이 계속돼. 네 모험도 함께니!
랩 파트는 장혁을 제외한 네 명이 나누어 소화했다.
마치 기름칠한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들어맞는 호흡.
도훈은 그들의 호흡에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블랙홀이 저 정도로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도훈은 그들의 모습을 관찰했다.
멤버들 간의 호흡을 넘어선 뭔가가 있다.
고민도 잠시 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이 발견한 것은 또 하나의 호흡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리듬에 맞춰 살짝 변화를 주고 있었다.
사실 호흡이라는 단어보다는 녹아든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몰랐다.
따. 따. 단.
기타 리프를 중심으로 경쾌한 멜로디에 그들만의 목소리를 실었다.
관객이라고는 강시혁과 도훈밖에 없지만, 그들은 일정한 텐션을 유지했다.
그들은 녹음 중에도 높은 텐션과 녹음 부스를 꽉 채운 에너지를 보여 줬다.
클라이맥스가 끝나고 멜로디가 멈췄다.
강시혁이 헤드셋을 벗더니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도훈도 기분 좋게 손뼉을 쳤다.
짝. 짝.
하지만 장혁은 녹음 부스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다른 멤버들을 쳐다봤다.
뭐라고 딱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다른 멤버들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에 도훈이 부스로 연결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다들 거기서 뭐 해?”
“한 번만 더 가 보죠.”
“흠, 일단 다들 나와 봐.”
“한 번만 더 가고 나갈게요.”
장혁이 고개를 흔들자, 도훈이 강시혁을 바라봤다.
강시혁에게 의견을 구한 것이다.
강시혁은 나름 이쪽 바닥에서는 잔뼈가 굵은 프로듀서였다.
전생에서 도훈이 몇 번 음반 작업을 해 봤다고 하지만, 강시혁의 조언은 필수적이었다.
시선을 받은 강시혁이 마이크를 향해 고개 숙였다.
“대화가 먼저일 것 같은데?”
강시혁의 말에 장혁과 가필드 멤버가 밖으로 나왔다.
도훈은 그들과 타원형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강시혁이 팔짱을 끼고 장혁을 바라봤다.
그는 지금 대화가 필요할 시기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지금 상황으로는 몇 번을 반복해서 녹음해 봤자 가필드 멤버 전체가 만족할 만한 수준의 녹음은 나올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강시혁이 보기에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신인이라면 강시혁의 생각대로 밀어붙이면 되었다.
하지만 가필드는 그들 구성원 하나하나가 뮤지션으로 인정받는 그룹이었다.
대화를 통해 서로의 접점을 찾는 것이 맞았다.
“지금부터는 터놓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 나나 여기 있는 이도훈 실장이나 똑같은 생각이거든.”
강시혁이 도훈을 가리키자 장혁이 조심스럽게 답했다.
“일단 말씀해 주시죠.”
“나나 이도훈 실장이 보기에는 방금 녹음도 만족스러웠거든. 그런데 얼굴에는 불만이 한가득하잖아. 대체 원하는 방향이 뭐야?”
“음.”
장혁이 심각한 얼굴로 턱을 어루만졌다.
조각 같은 그의 얼굴에서 처음 보는 어두운 그림자였다.
도훈이 슬쩍 끼어들었다.
“처음에 나한테 프로듀싱까지 부탁할 때는 생각이 있었을 거 아니야. 내가 보기에는 지금이 가장 완벽하거든…… 가필드답기도 하고 말이야.”
“가필드다운 게 완벽한 걸까요?”
“그게 무슨 말이지?”
“최선을 다했는데도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데 그 허전함이 뭔지를 모르겠어요.”
“흠, 허전함이라…….”
“혹시 여자 친구?”
“앗, 형님! 농담하지 마시고요.”
“그래, 지금 그 표정 잊지 말라고. 너무 심각한 표정은 가필드의 리더 장혁에게는 안 어울리잖아.”
도훈이 씩 웃었다. 지금은 한 말은 진심이었다.
가필드의 리더 장혁은 아이돌 판에서 먼치킨과도 같은 존재였다.
총알도 튕겨 낼 듯한 단단한 가슴과 무슨 일에도 당황하지 않을 것 같은 사자의 심장을 지닌 아이돌.
그게 장혁이었으니까.
그때 장혁이 말했다.
“저는 지금 심각해요.”
“또 순정 만화에 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짓네.”
“또 놀리시네요, 진짜 심각하단 말이에요.”
“원하는 게 뭔지 솔직히 말해 봐.”
“흠, 그러니까…….”
장혁이 다시 말끝을 흐렸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막내 강찬이 슬슬 눈치를 봤다.
그 모습에 도훈이 물었다.
“막내가 말해 봐.”
“앗, 제가요?”
“딱 봐도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이게 다 실장님 때문이에요.”
“나 때문이라고?”
도훈이 눈을 크게 뜨자 장혁이 강찬의 입을 막았다.
숨도 못 쉴 정도로 입을 틀어막자, 막내 강찬이 발버둥을 쳤다.
그 상태에서 장혁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다 사람 잡겠다, 막내부터 풀어 주고 말하지.”
“앗, 죄송합니다.”
장혁이 강찬의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놨다.
순간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서로의 눈치만 보는 상황이 계속되자, 누군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의 주인공은 강시혁이었다.
강시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와, 솔직히 장혁의 이런 모습 진짜 처음 본다. 왜 속 시원하게 말을 못 해? 솔직히 말해 봐. 너희들 기죽은 거지?”
“네?”
장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강시혁이 말을 이었다.
“내가 호텔에서 있었던 일 들었거든. 시원이가 그러는데, 가필드 형들이 완전히 얼이 빠졌다고 하더라, 맞지?”
“하하, 네 맞아요.”
“눈이 높아진 게 원인 아니야?”
“솔직하게 말하면 그게 맞아요.”
장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잠시 도훈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앨리스’의 작곡가이기도 한 도훈.
도훈에게 ‘앨리스’의 프로듀싱을 부탁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도훈의 감각을 믿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도훈에게 실력으로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도훈이 ‘앨리스’를 부르는 것을 보고 완전히 상황이 바뀌었다.
원하는 곡을 받았지만, 급속도로 자신감이 떨어진 것이다.
도훈이 미라클 호텔의 연회장에서 보여 줬던 무대는 그야말로 경이로웠다.
한 번의 호흡도 흐트러지지 않고 변화무쌍한 템포의 ‘앨리스’를 소화한다고?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 놀라운 일은 ‘앨리스’가 가필드 다섯이 나눠 불러도 벅찬 곳이라는 점이다.
다섯 명이 나눠 불러도 힘든 곡을 혼자서 소화하다니.
그것뿐이 아니었다.
도훈은 당시 안무까지 가볍게 소화했다.
그 안무의 수준은 그야말로 퍼펙트!
더욱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잠실 주 경기장에서 펼쳤던 공연만큼은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장혁은 아직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누가 본다면 실성한 사람으로 착각할 정도.
그때 장혁의 입이 열렸다.
“형도 같이할래요?”
“지금 나보고 한 말이야?”
“네.”
“가필드의 앨범에 내가?”
도훈이 눈을 크게 뜨자 장혁이 말했다.
“실장 형의 도움이 없으면 이번 앨범을 완성하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아서요. 다른 앨범도 보면 피처링에 지인들이 많이 참여하잖아요.”
“내가 가수도 아닌데?”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참가했잖아요. 그럼 데뷔까지 한 건데 뭐가 문제에요? 아니, 가수가 아니면 또 어때요? 영화배우들도 앨범에 참여하는 게 대세잖아요.”
장혁의 말은 일정 부분 맞았다.
유명인의 목소리가 들어갔다고 하면 그 앨범에는 참여자의 팬들까지 관심을 끌게 된다.
어찌 보면 마케팅의 한 수단이었다.
문제는 도훈이 그런 팬덤을 가지고 있냐였다.
매니저인 도훈이 그런 효과를 줄 수 있을까?
도훈은 자신 있게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강시혁도 눈을 가늘게 떴다.
과연 장혁이 내민 손길이 이번 앨범에 도움이 될까?
강시혁은 도훈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의 경영 능력이나 매니저가 지녀야 할 자질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탑 아이돌의 앨범에 참여하는 것은 말리고 싶었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가필드의 팬덤 때문이었다.
그들의 판단에 따라 도훈이 한 번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앨범 판매가 저조하다면?
모든 화살이 도훈에게 날아올 수도 있었다.
만약 이번 앨범이 뜬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문제가 된다.
아마도 그 앨범 사이에 들어 있는 도훈의 목소리에 거부감을 느끼는 팬들도 존재할 테니까.
이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었다.
여자 아이돌 하나가 가필드의 곡에 참여했다고 그들에게 단단히 찍힌 적이 있었다.
결국은 오해로 마무리되었지만, 그 오해를 마무리하기까지 소비된 에너지가 문제였다.
지금은 도훈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괜히 앨범에 참여했다가 자칫해서 불똥이 도훈에게 튄다면?
강시혁이 고민하고 있을 때 도훈이 고개를 저었다.
“난 영화배우도 아니잖아.”
“저도 소식 들었어요. 토론토 영화제에서…….”
장혁은 쉬지 않고 도훈을 설득했다.
도훈은 신기하다는 듯 장혁을 바라봤다.
도훈의 수상 소식은 그야말로 센세이션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도훈의 수상 소식은 완벽하게 묻혔다.
이유는 간단했다.
도훈이 누군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스타플레이어에 출연한 매니저가 토론토 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은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덕분에 유레카로 섭외 문의는 가끔 들어오긴 해도 도훈에게 직접 전화해 오는 사람은 없었다.
어찌 보면 잘된 일이었다.
장혁과의 대화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대화를 나누며 도훈은 그들이 그렇게 바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