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다음 날 아침.
유레카의 7팀 사무실.
도훈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태블릿 화면에 뜬 기사를 보고 있었다.
마리나의 공연은 생각보다 파급력이 컸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나의 첫 내한 공연이었다.
어떤 경로로도 그녀의 내한 공연을 성사시킬 수 없었던 업계는 이번 사건으로 발칵 뒤집혔다.
재미있는 것은 기사가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났다는 점이었다.
―잠실 주 경기장에서 열렸던 마리나의 내한 공연은 일부 팬들에게만 공개.
기사를 읽던 도훈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건 누구에게나 공개된 오픈 콘서트였다.
그래서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잠실 주 경기장을 택한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관중은 대략 2천 명이 모였다.
그 2천 명조차 블랙홀과 가필드의 팬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이유로 비밀리에 소수만 초대한 VIP 콘서트로 오해받은 것이다.
덕분에 지금 유레카는 몰려드는 문의 전화로 업무가 마비된 상태였다.
그때 누군가 도훈의 문을 노크했다.
문이 덜컹 열리고 4팀장 조마준이 들어왔다.
조마준은 유레카의 고인물이라 불리는 인물이었다.
영화제 때문에 2팀장 한유라가 자리를 비운 유레카에서는 가장 경력이 많은 팀장이었다.
조마준이 몇 가락 남지 않은 머리를 쓸어내리며 외쳤다.
“이 실장!”
“왜 그래요, 팀장님?”
“어떻게 좀 해 봐, 지금 난리가 났어.”
“제가 할 일이 뭐가 있나요? 일단 홍보팀 전화는 빼놓으라고 하세요.”
도훈이 미안한 표정으로 묻자, 조마준의 뒤쪽으로 곽수정이 고개를 내밀었다.
“실장님, 이건 우리 홍보팀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흠, 그럼 다 빼놓으세요, 대리님.”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곽수정 대리가 울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난데없는 그녀의 행동에 도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요, 대리님?”
“회사 전화는 벌써 셔터 내렸어요. 그런데 개인 핸드폰으로 연락이 와요.”
“어떻게 개인 핸드폰으로 연락이…….”
“저희가 지난 행사 때 명함을 너무 남발했나 봐요. 사람들이 저희 연락처를 다 알아요, 그죠?”
곽수정 대리가 뒤쪽을 바라봤다.
뒤쪽에서는 최대한 과장이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긍정도 부정도 못 하는 최대한을 본 도훈은 피식 웃었다.
도훈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최대한은 이도준의 스파이에 가까웠다.
그런데 일전에 약점이 잡힌 후로는 도훈을 위해 일하는 스파이가 되었다.
사실 장 비서와 연결해 준 것도 최대한 과장이었다.
즉, 상대를 침몰시키는 데 그의 공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때 최대한의 핸드폰이 울렸다.
띠리링.
핸드폰을 받은 최대한 짧게 외쳤다.
“저희는 모른다니까요.”
탁.
통화를 종료한 최대한이 난감한 표정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도훈이 말했다.
“일단 부사장님하고 상의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도훈의 말에 조마준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아니, 이번 콘서트 책임자가 이 실장이라면서! 그리니까 이 실장이 책임져야지.”
“조 팀장님, 지금 즐기시는 것 같은데요?”
“내가 왜 이런 걸 즐겨!”
“표정에 즐겁다고 쓰여 있는데요.”
“하아, 이걸 즐긴다고 해야 할지…….”
조마준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도훈의 말대로 그녀는 이 상황이 즐거웠다.
이곳에 와서 한 일이라고는 신인 배우들을 케어하고 독립 영화판을 전전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 일은 마치 공무원과 비슷했다.
어쩌다 나가는 차량 지원에 가끔 있는 오디션은 어찌 보면 따분하다는 표현이 맞았다.
그런데 도훈이 들어오고, 유레카는 완벽하게 바뀌었다.
새로 온 실장 하나가 일을 펑펑 터트리는 것이다.
조마준은 도훈을 질투하기도 했다.
이 바닥 경험도 없는 신입이 와서 물을 흩트려 놓는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혼자만 돋보이려는 도훈의 모습은 묘하게 거슬렸다.
물론 도훈이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마준과 다른 팀장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사실 2팀장 한유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모든 일에 다 관여하는 도훈이 눈꼴 사나웠던 것.
그런데 요즘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업무가 7팀에서 다른 팀으로 옮겨 온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외적인 이미지였다.
이전에는 JK엔터테인먼트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이 많았다.
물론 이 바닥에서 이야기는 아니었다.
동창회에서 명함을 건넬 때의 이야기였다.
동창들은 미라클의 계열사라고 해야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유레카로 바뀌고 나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유레카라고 하면 대부분 ‘아, 거기!’ 하며 단번에 알아듣는다.
거기에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여기저기서 연락이 올 때는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조마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피디님.”
이전 전화와는 다르게 활짝 웃는 조마준.
그는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3분도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은근한 눈빛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이 실장.”
“네, 팀장님.”
“혹시 전화기 꺼뒀어?”
“저야 진작에 꺼뒀죠.”
도훈이 씩 웃었다.
도훈의 사정도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전화 대부분은 마리나와 뉴 키즈에 대한 섭외였다.
거기에 더해 ‘추억을 소환하라!’ VIP 티켓을 어떻게 구할 수 있냐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기사 하나 때문이었다.
그 잘못된 기사 하나는 벌써 정정한 상태.
하지만 나머지 기자들이 문제였다.
아무 생각 없이 베껴서 툭툭 던진 잘못된 내용은 사실처럼 인터넷에 퍼져 나갔다.
이것으로 덕을 본 것도 없잖아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블랙홀의 팬카페였다.
지금 팬카페의 운영자인 윤장미와 장소담은 가입을 막아 놓은 상태였다.
팬들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눈 깜짝할 사이에 만 명을 돌파했다.
그게 오늘 아침의 상황이었다.
문제는 그들 중 블랙홀이 누군지도 모르고 가입한 사람도 꽤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블랙홀이란 이름도 모른 채 오로지 ‘추억을 소환하라!’ 다음 회차를 관람하기 위해 가입한 사람이었다.
일단 윤장미와 장소담은 그들이 진짜 팬인지를 구분하기 위해 테스트를 시행할 것이라고 했다.
뭐, 이 정도의 폭풍은 지난 생에도 가끔은 겪었다.
도훈이 아무렇지 않게 답하자, 조마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실장, 지금 SBC에서 섭외 전화 왔거든. 이건 이 실장이 결정해 줘야 할 것 같아.”
“그건 저도 결정 못 합니다. 마리나가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고요. 참, 뉴 키즈는 언제 다시 한국에 올지 몰라요.”
도훈은 손을 휘휘 저었다.
조마준이 말한 섭외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안 봐도 훤했기 때문이다.
마리나와 뉴 키즈는 국내 기획사와는 접점이 전혀 없었다.
덕분에 유레카와 황수영 쪽으로 문의가 빗발치고 있는 상황.
조마준이 손을 휘휘 저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말한 섭외는 마리나나 뉴 키즈가 아니야.”
“그럼 누구요? 혹시 정여진 선생님이요?”
도훈이 눈을 가늘게 뜨자, 조마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정여진 선생님도 포함한 섭외 전화지.”
“흠, 그러고 보니…….”
도훈이 눈을 크게 떴다.
정여진과 이지유 그리고 한유라는 토론토 영화제 때문에 현지에 가 있었다.
그 시상식이 바로 몇 시간 전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마리나가 출연한 ‘추억을 소환하라!’ 프로그램 때문에 정신을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끝을 흐리던 도훈이 눈을 반짝였다.
“그럼 여우주연상 타신 겁니까?”
“아쉽게 됐어, 이번 출품작이 너무 쟁쟁해서…….”
살짝 말끝을 흐리는 조마준.
도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물었다.
“혹시 작품상에?”
“그것도 아니야.”
“그럼 이지유 배우가 수상한 거예요?”
“이지유 배우는 아쉽게도 탈락했다고 하네.”
“팀장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도훈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조마준을 바라봤다.
조마준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은 다른 이들의 시선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모두가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조마준이 표정을 수습하고 입을 열었다.
“이 실장이 수상했다고 하네.”
“네?”
“이 실장도 수상 후보에 올랐었잖아.”
“그거 농담으로 알고 있었는데…….”
“농담이 아니었나 봐.”
순간 도훈은 멍한 표정으로 재빨리 태블릿을 터치했다.
관련 기사를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초원의 집’은 전생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영화 마켓에서 시선을 끌었다.
사실 전생의 기억으로는 영화제에서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그 후 해외시장에서부터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영화였다.
그런데 그 역사가 살짝 바뀌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 * *
한바탕 폭풍이 지나고 도훈은 다시 자기 일에 매진했다.
정확히는 이걸 자기 일이라고 해야 할지 조금 모호하기는 했다.
“휴.”
도훈의 한숨에 강시혁이 다가왔다.
“왜 그래, 친구.”
“아,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
“그래도 저 친구들이 이 실장만 믿고 있잖아.”
“그러니까…….”
도훈은 녹음 부스 안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장혁과 가필드를 바라봤다.
도훈이 이곳에 온 것은 바로 가필드의 녹음 때문이었다.
유레카의 녹음실도 아닌 가필드의 스튜디오에 방문한 도훈은 살짝 마음이 무거웠다.
‘앨리스’란 곡은 어차피 가필드의 곡이었다.
그리고 최대한 장혁의 감성이 묻어나야 했다.
그런 전제하에 성과를 거둔 곡이 바로 ‘앨리스’였다.
그런데 장혁은 계속 도훈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때 장혁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서 들려왔다.
―저는 형님만 믿겠습니다.
그 목소리에 도훈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럼 한번 가 보자고.”
도훈이 할 수 없다는 듯 손가락으로 박자를 맞췄다.
손가락이 세 개가 펴지자, 녹음 부스에서는 반주가 흘러나왔다.
미리 녹음한 ‘앨리스’의 인트로가 흥겹게 진행된다.
장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자를 맞췄다.
정확한 시점에서 장혁의 입술이 열렸다.
―내 눈을 어지럽히는 한낮의 햇살을 뒤로하고…….
―회색빛 방안에 나타난 이상한 문은…….
―꿈이었나?
살짝 마이크에서 입을 떼자, 다른 멤버의 입술이 열렸다.
―흐릿한 시계를 찬 귀여운 토끼가 열린 문을 나선 채 뛰어나가…….
―꿈과 현실이 뒤섞인 나의 이야기
…….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강시혁이 감탄했다.
“와 역시, 가필드네. 이게 첫 번째 녹음이라고?”
“타고난 건 사실이지만…….”
도훈은 말끝을 흐렸다.
도훈이 알기로는 가필드는 어제 목이 쉬어라, 연습을 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목이 쉬었다.
도훈은 어제 장혁과 통화를 하면서 깜짝 놀랐었다.
장혁에게 듣기로는 자면서 이미지 트레이닝까지 했다고 한다.
그 이미지 트레이닝에 대해서는 정확히 말해 주지 않았다.
도훈이 지금 놀라고 있는 것은 그들의 재능이 아니라 회복력이었다.
어제만 해도 목소리가 살짝 쉬어서 걱정했었다.
그런데 오늘 막상 녹음이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목소리가 통통 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