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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도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무리라니요?”
“내 엄 비서한테 다 들었다.”
“엄 비서 누나가 뭐라고 했는데요?”
“마리나를 데려오는 데 거금을 썼다고 들었다. 네가 내게 효도하려는 건 알지만, 무리는 하지 말라는 말이다. 돈이라는 게 쌓이기 시작하면 히말라야산맥의 봉우리처럼 그 끝이 안 보이기도 하지만, 쓰다 보면 봄날 눈 녹듯 녹기도 하는 법이지.”
“아, 맞는 말씀이에요. 그런데 이번에 마리나 초청 건은 그다지 돈이 들지 않았어요.”
“돈이 들지 않았다고?”
“돈보다 더 비싼 대가를 지불했어요.”
“자세히 듣고 싶구나.”
“그건 집에 가서 말씀드릴게요.”
도훈은 씩 웃으며 전방을 주시했다.
가로등의 불빛이 별똥별처럼 휙휙 지나간다.
마치 세월이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과거로 돌아오고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많은 사건과 인연이 있었다.
도훈은 속으로 조용히 자신의 바람을 떠올렸다.
‘지금처럼…….’
* * *
장경자의 집에 도착한 도훈은 지금의 사정을 털어놨다.
도훈이 사정을 털어놓자, 장경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고얀 놈.”
“제가 왜 고얀 놈인가요?”
“거저먹으려고 하니, 그게 도둑놈 심보가 아니고 뭐겠나?”
“도둑놈 심보요?”
“상대의 마음을 훔치는 데 별 노력도 하지 않은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나름대로 노력 많이 했습니다.”
도훈이 씩 웃었다.
장경자가 말한 사람의 마음은 마리나와 가필드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장경자는 사람의 마음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만약 상대가 배신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것은 돈을 충분히 쓰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고 장경자는 생각했다.
그런데 도훈은 상대를 사로잡는 데 추억과 음악이라는 무기를 썼다고 했다.
그러니 장경자의 입장에서는 도둑으로 보인 것이다.
물론 장경자의 진심은 아니었다.
그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엄지연은 눈을 크게 떴다.
도둑이라는 단어는 장경자의 입에서 나온 최고의 칭찬이었다.
그때 장경자가 입을 열었다.
“잘했다.”
“아, 도둑놈이라고 하시더니, 또 잘했다고요?”
되묻는 도훈의 입가에는 미소가 고여 있었다.
그 모습에 장경자가 말했다.
“고얀 놈, 다 알면서 할미를 떠보는구나. 세상에는 공평한 거래란 존재하지 않는 법이지.”
“공평한 거래라고요? 할머니가 거래는 항상 공평해야 하는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건 남들에게 하는 말이지.”
“저도 남이었나요?”
“얼마 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아니, 어느 곳에 가도 공평을 측정하는 저울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그래도 법은 공평하잖아요.”
“우리나라 대법원 앞에 보면 정의의 여신상이 있지.”
“네, 그렇죠.”
“대부분 나라의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지만…….”
장경자가 퀴즈를 내듯 살짝 말을 끊었다.
도훈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의의 여신은 그리스 신화의 니케를 말한다.
니케의 조각상은 나라마다 현지화되어서 법의 공평함을 나타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전통 의상을 입고 있으며 눈가리개를 안 하고 있다.
거기에 검 대신 법전을 들고 있다.
도훈이 말했다.
“뭐, 신이기에 눈을 가리든 안 가리든 똑같지 않을까요?”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럼 중요한 건 뭔가요, 할머니?”
“혹시 여신이 들고 있는 법전을 자세히 살펴본 적 있느냐?”
“법전이요?”
도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법전을 자세히 살펴보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사람들이 법전이라고 하나 그런 줄 알고 있을 뿐이었다.
장경자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법전이 아니다.”
“법전이 아니라니요?”
“그건 장부다. 다른 손에 들고 있는 저울에는 황금이 들어 있고…….”
“황금에 장부라니요?”
“그 안에 있는 내용은 네 상상에 맡기마.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세상에 공평한 거래는 없는 법이다. 100원을 빌려주고 100원을 받았다면 내가 그만한 부를 쌓을 수는 없었겠지…….”
“…….”
도훈도 침묵으로 답했다.
이건 장경자만의 자의적 해석이었다.
그런 해석이 있었기에 많은 부를 쌓았을 수도 있었다.
사법연수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은 법전 대신 검을 들고 있으니까.
사법연수원 때는 정의감에 넘치던 사람들이 현직으로 오면 안대를 풀고 검 대신 장부를 든다고?
사람이 그렇게 바뀔 수는 없는 법.
도훈은 이 점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다만, 도둑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세상에는 공평한 거래가 없다는 것도 맞았다.
변화무쌍한 도훈의 표정에 장경자가 다시 웃었다.
“그놈…… 그런 심각한 표정 짓지 말아라. 내가 재미있는 걸 하나 보여 주마.”
“재미있는 거라고요?”
도훈은 눈을 크게 떴다.
장경자는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있었다.
별로 놀랄 일이 없던 자신을 이리 쥐락펴락하니 말이다.
말을 마친 장경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훈도 따라서 일어났다.
장경자가 멈춘 곳은 집의 한구석에 있는 골방이었다.
사실 도훈은 이 방의 용도가 궁금했다.
장경자가 이 방을 보여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도훈이 알기로는 다른 가족에게도 이 방을 보여 준 적은 없었다.
딸깍.
드디어 방이 열렸다.
방은 냉기만이 감돌았다.
모르는 사람이 온다면 귀신이 나온다고 도망갈지도 모르는 분위기였다.
다만 눈에 띄는 조그마한 금고가 하나 있었다.
장경자는 조용히 다가가 금고를 열었다.
장경자가 그곳에서 꺼낸 것은 볼품없는 장부였다.
장경자는 그 장부를 도훈에게 건넸다.
장부를 받은 도훈은 왜 정의의 여신을 언급했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법원 앞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법전이 장부라면.
그리고 그 장부를 구체화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일 것 같았다.
장부를 펼치려던 도훈은 다시 탁 소리가 나도록 다시 닫았다.
그러고는 장경자를 바라봤다.
“저는 됐습니다. 저는 법전도 필요 없고 장부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한 말은 진심이었다.
이건 도훈에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장부의 첫 장에 있는 인물과 액수만으로도 대한민국은 완전히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
도훈이 원하는 건 대한민국의 최고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연예인을 최고로 만들면 그걸로 족했다.
이지유와 정여진 그리고 블랙홀 등의 친구들을 정상으로 올려놓으면 최고의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기쁠 것 같았다.
다만, 자금이 필요하기에 그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녔을 뿐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솔직히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시간만 지나가도 최고의 부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사실은 철저히 숨겨야 했다.
힘을 지니지 않은 채 얻은 금화는 빼앗긴다는 서양 속담이 있지 않은가.
속담의 뒤에 생략된 것은 금화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같이 빼앗긴다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고 저 장부를 받을 필요는 없었다.
저 장부를 받는 순간 권력을 탐하게 될지도 모른다.
도훈의 표정을 본 장경자가 웃었다.
“고얀 놈.”
“또 왜 그러세요, 할머니.”
도훈은 응석 부리는 말투로 답했다.
장경자의 입가에서 미소를 봤기 때문이다.
장경자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총도 없이 전쟁터로 나가려 하니 하는 말이다.”
“총이 왜 필요한가요?”
“아마도 필요할 게다. 내 뒤를 이으려면 말이다.”
“아.”
도훈이 입을 벌렸다.
이곳에 자신을 데려온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잠시 탄성을 지르던 도훈이 말을 이었다.
“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라클 전체를 이끌 만한 재목도 아닙니다. 그저 유레카 하나 정도면 족합니다.”
“그런 놈이 여기저기 찌르고 다녀?”
“그건 자금이 필요해서…….”
도훈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도훈의 행적을 장경자가 모두 꿰뚫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 표정에 장경자가 피식 웃었다.
“이거 내가 다시 맡아 두마.”
“네, 감사합니다.”
“대신 비밀번호는 기억하고 있거라.”
“네, 벌써 기억했습니다.”
도훈이 씩 웃었다.
금고의 다이얼을 돌리는 것을 도훈은 자세히 보고 있었다.
덕분에 금고의 비밀번호도 기억하고 있었다.
장부를 다시 금고에 넣어 둔 장경자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이제 밥 먹자.”
“앗, 아까 호텔에서…….”
“늦었는데 참이라도 먹고 가야지.”
“…….”
도훈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장경자에게 이끌려 주방으로 향했다.
장경자가 차린 야참은 생각보다 많았다.
아무래도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장경자가 막 국을 한술 떴을 때였다.
엄지연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회장님.”
장경자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에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만의 대화가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그 모습에 장경자가 손짓했다.
“괜찮으니 앉아라.”
“네, 할머니.”
도훈이 답하자 장경자가 엄지연에게 눈짓했다.
상관없으니 보고하라는 신호였다.
엄지연은 그제야 말을 이었다.
“첫째 대표님이 출국하셨답니다.”
“출국? 누가 풀었어?”
“그건 저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놈도 숨겨 둔 장부가 있는 모양이야, 역시 피는 못 속이네.”
장경자는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등에 칼을 꽂으려던 아들을 칭찬하다니!
이럴 때면 도훈도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때 엄지연이 다시 말을 이었다.
“거기에…….”
“또 무슨 일이지?”
“회장님의 스위스 계좌를…….”
“흠.”
장경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적잖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당황한 모습은 도훈도 본 적이 없었다.
스위스의 계좌라…….
도훈도 대충 알고는 있는 계좌였다.
다만, 정확한 액수는 모르는 유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도훈은 이제야 할머니가 쓰러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앞서 일어났던 금고 강탈이나 화재에 이어서 지금의 일이 마지막 타격을 준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도훈이 재빨리 나섰다.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무슨 뜻이냐?”
“제가 찾아 드릴게요.”
“찾아 준다고?”
“못 찾으면 제가 벌어 드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쿨하게 미소 짓는 도훈의 모습에 장경자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게 얼마인지 알고?”
“얼마가 됐든 벌면 되는 거죠, 할머니는 걱정하지 마세요.”
“됐다.”
“네?”
“됐다고 했다, 이제는 됐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아마 전 같았으면 충격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드러난 미라클의 재산은 빙산의 일각이고 그 돈이 진짜니 말이다.”
“…….”
“그런데 요즘 보니 돈이 전부는 아니더구나. 돈보다도 더 소중한 게 있다는 걸 알았다. 모두 네 덕분이다. 하지만!”
“말씀하세요.”
“너는 당분간 돈이 최고가 되어야 한다, 도훈아.”
장경자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도훈은 재빨리 식사를 마치고 장경자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시동을 걸던 도훈은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오늘따라 맑은 하늘에 잠시 모든 생각을 접었다.
그때 별똥별 하나가 떨어졌다.
이전에 봤던 가로등 불빛이 아닌 진짜 별똥별.
도훈은 조용히 소원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