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도훈의 스텝이 멈췄다.
탁.
전주와 첫 소절의 사이가 분명했다.
도훈이 천천히 가사를 읊조렸다.
―내 눈을 어지럽히는 한낮의 햇살을 뒤로하고…….
―회색빛 방안에 나타난 이상한 문은…….
―꿈이었나?
마치 음유시인과 같은 분위기로 가사를 뱉어 낸 도훈이 다시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탁. 탁.
무대 위를 누비는 도훈이 관객이 된 마리나와 일행을 바라봤다.
쉬지 않고 스텝을 밟던 도훈이 다시 입을 열었다.
―흐릿한 시계를 찬 귀여운 토끼가 열린 문을 나선 채 뛰어나가…….
―꿈과 현실이 뒤섞인 나의 이야기.
순간 장혁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머릿속에 그렸던 무대가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던 것이다.
처음 앨리스의 멜로디를 들었을 때는 느꼈던 충격과는 비교도 안 됐다.
마치 감전된 듯 장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도훈의 무대는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윤장미가 말했다.
“앗, 매니저 오빠가 더 가필드스럽네요.”
“나도 그런 느낌이…….”
장소담도 고개를 끄덕였다.
장혁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주억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장혁의 말에 윤장미가 깜짝 놀랐다.
가필드의 리더 장혁이 자신의 말을 인정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 장혁의 눈을 보면 진심이 담겨 있는 것은 맞았다.
이상한 것은 힘없이 숙인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서도 눈은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윤장미는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자신의 지식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웃프다는 느낌?
아니 절망과 희망을 같이 담고 있는 듯했다.
그때 도훈이 다시 가사를 이었다.
―이상한 나라로 떠나는 내 모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아.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아…….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가사와 귀에 익은 리듬.
거기에 화려한 댄스까지.
모든 이들이 도훈의 무대에 집중했다.
도훈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공연을 펼쳤다.
이제는 랩 파트!
―하얀 토끼 따라간 곳은.
―꿈같은 땅을 망치는 여왕!
―초콜릿 병사와 재미난 사건들.
―내 모험이 계속돼. 네 모험도 함께니!
순간 블랙홀에서 랩을 담당하는 장선우가 눈을 크게 떴다.
처음에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던 장선우였다.
하지만 장선우는 계속 무대를 즐길 수 없었다.
자신의 레벨과 도훈의 레벨은 너무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장선우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실력 차이를 인정한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할 것도 없었다.
20호실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며 랩 파트의 가사를 썼던 리더가 바로 도훈이었다.
도훈은 블랙홀 멤버 모두에게 매니저 이전에 리더로 머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마리나도 눈을 빛냈다.
뭔가 보통 매니저와는 첫인상부터 달랐다.
마리나는 도훈이 싱어일 줄을 상상도 못 했었다.
마리나는 도훈과 비슷한 유형의 가수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도훈과 비슷한 유형의 아티스트가 떠오르지 않았다.
재미있는 것은 한국어를 잘 모르는데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도훈의 가사가 영상처럼 펼쳐진다는 점이었다.
토끼를 찾아서 이상한 나라로 들어간 앨리스.
그곳에서 겪는 수많은 사건.
앨리스의 표정과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행동까지…….
모든 것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이런 것이 음악의 힘일까?
마리나는 자신이 한국어를 몰라도 이렇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도훈의 전달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도훈의 안무와 가사 그리고 랩이 전하는 리듬.
모든 것이 완벽했다.
사실 앨리스라는 단어는 마리나도 알아들었다.
마리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에 라셀이 물었다.
“마리나 왜 그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도훈은 이번 투어에 데려가야 할 것 같아.”
“앗, 그게 또 무슨 말이에요?”
“나는 저 사람에게 안무를 배우고 싶어. 이렇게 완벽한 퍼포먼스는 본 적이 없어. 카이클도 이런 식으로 공연한 적은 없어. 그리고 저 사람은 노력파야. 라셀.”
“노력파요?”
“저 사람은 저 동작을……. 수만, 아니 수천 번 반복했을 거야. 그러지 않고서는 저런 퍼포먼스가 나올 수 없어.”
“노력이라고요?”
“저 사람은 나에게 이런 무대를 보여 주기 위해 미리 준비한 게 분명해.”
“마리나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라니요?”
“팝의 여제라 불리는 나와 공연하기 위해서…….”
“착각 같은데요!”
“까를로스가 내게 왔던 것도 그렇고 모든 것이 도훈의 계획이 분명해.”
마리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마리나가 이처럼 경악하고 있는 것은 바로 창조적인 도훈의 안무였다.
안무만 봐도 가사의 내용이 저절로 떠오르다니!
도훈이 무대에 선지 벌써 3분 정도가 지났다.
그런데 숨 한번 몰아쉬지 않고 처음 스피드 그대로 안무를 펼치고 있었다.
빠르면서도 경박스럽지 않게 완급 조절을 하며 공연을 이어 나가는 도훈.
그때였다.
마지막 파트가 다가왔는지 스텝이 조금 더 빨라졌다.
마치 동영상을 빠르게 돌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것도 잠시 도훈이 멈췄다.
마치 마네킹처럼 어딘가를 바라본다.
모두는 도훈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도훈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마지막 가사를 읊었다.
―이상한 나라로 떠나는 내 모험…….
이건 영화 속 주인공의 독백과도 같았다.
드디어 도훈의 무대가 끝난 것이다.
무대가 끝났지만, 누구도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브라보!”
짝. 짝.
박수 소리의 주인공은 윤장미였다.
냉철한 분석가답게 공연의 여운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온 것이다.
윤장미의 박수를 시작으로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도훈은 어깨를 으쓱한 후 자리로 돌아왔다.
모두의 시선은 도훈을 향해 있었다.
공연 도중에 그들이 보였던 감정이 경외감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호기심으로 바뀌어 있을 뿐이었다.
도훈이 자리에 오자 장혁이 감격한 듯 물었다.
“선생님, 아니 형. 안무는 어떻게 된 거예요?”
“이런 스타일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짠 거야.”
“그럼, 저를 위해서 안무까지…….”
“뭐, 겸사겸사.”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거짓은 아니었다.
지금의 안무는 가필드에게 돌려주려 생각하고 있었다.
도훈이 짠 것도 아니고 가필드 본인들이 미래에 만들 안무니 말이다.
이왕 도와주기로 한 김에 도훈은 시간을 절약하기로 했다.
그때 마리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그 곡 말이에요…….
“네?
“저 주시면 안 돼요?”
순간 주변이 얼어붙었다. 마치 이글루에 들어온 것처럼 공기가 냉랭했다.
“마리나,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장혁의 목소리가 살짝 커졌다.
순간 장혁을 아는 이들은 멀찌감치 몸을 피했다.
연예계의 불도그라 불리는 장혁을 경계해서였다.
오죽하면 가필드의 멤버들조차 장혁을 말릴 생각도 안 하고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때 도훈이 마리나를 바라봤다.
“이 곡은 여기 있는 미스터 장의 곡입니다.”
“저는 곡을 말한 게 아니에요. 곡에 쓰인 안무를 말한 거예요.”
“안무라니요?”
“지금 그 안무가 제 다음 앨범에 들어갈 곡하고 딱 맞아서요. 그리고 그 안무요…….”
“네?”
“저를 위해서 연습하신 거 아닌가요? 제가 보에는 몇천 번을 반복하신 것 같은데, 맞죠?”
“몇천 번요?”
“저와 작업하시려고…….”
마리나는 슬쩍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도훈의 표정이 떨떠름했기 때문이다.
마리나를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건 사실 음악성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이 있었다.
그 감각이 지금 헛다리를 짚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마리나는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했단 말인가?
마리나의 시선을 받은 도훈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였다.
수천 번을 반복했다고?
지금 처음 부른 노래이자 처음 춘 안무였다.
도훈은 조용히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조금 전까지 반짝이던 황금빛 물결이 사라졌다.
도훈은 그제야 마리나의 말을 이해했다.
스킬 덕분에 지금의 공연을 그렇게 착각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훈은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흠, 어떤 곡을 말하는 거죠?”
“제가 보여 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순간 분위기가 다시 바뀌었다.
마리나가 자진해서 무대에 서겠다고 하자 모두는 서로를 바라봤다.
그때부터였다.
커다란 연회장은 갑자기 노래방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재미있는 것은 노래가 끝나면 또 깊이 있는 대화가 이어진다는 점이었다.
묘한 분위기에 한지혜와 임제호는 서로를 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임제호였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 아니지?”
“꿈은 아닌 것 같은데 분위기가 묘하네요.”
“그래, 조금 낯설긴 하네. 술판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이건 마치 예능 프로그램과 시사교양 프로그램이 비빔밥처럼 섞인 것 같아요.”
“표현 좋네.”
“헤헤, 칭찬 감사해요.”
“그런데 저거 뭐지?”
“뭐가요?”
“이 실장이랑 마리나가 뭔가 주고받는데?”
“연락처 주고받는 거 아니에요?”
“아니, 계약서 같은데…….”
* * *
2시간 후.
마리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대단해요, 어떻게 다들 지치지 않죠?”
“그건 마리나가 할 말이 아닌데요. 마리나는 그 무대를 소화하고도 힘이 남습니까?”
“물론이죠.”
마리나가 씩 웃었다.
그 모습에 도훈이 기가 찬 듯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마친 블랙홀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블랙홀의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연 때문에 지칠 법도 한데,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도훈은 조용히 시계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마리나가 물었다.
“급한 일이라도 있나요?”
“제가 약속한 음식이 나올 시간을 체크하고 있어요.”
“아, 그러고 보니…….”
마리나가 배를 어루만지자 도훈이 피식 웃었다.
“괜찮으세요?”
“생각보다 배가 고프네요. 그러고 보니…….”
마리나가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도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나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고급술과 비교하면 안주가 부실했다.
안주라고 해 봤자 마른안주.
팝의 여제가 참석한 뒤풀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사실 이 부분은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었다.
도훈이 자꾸 시간만 확인하자 마리나가 물었다.
“약속한 메뉴는 언제 나오는 거예요?”
“30분 남았습니다.”
“30분이요?”
마리나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에 도훈이 웃었다.
“기다림의 미학이라는 말이 있죠.”
“아, 기다림이라…….”
마리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이제는 말할 기운도 없는 듯 보였다.
이제 뒤풀이는 파장 분위기였다.
도훈이 말한 30분 때문에 모두가 기다리고 있다.
제작진 중 일부는 벌써 자리를 떠났다.
블랙홀과 가필드의 멤버만이 도훈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