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204화 (204/250)
  • (204)

    20분 후. 잠실 주 경기장에 설치된 무대.

    가필드의 장혁이 가발을 쓴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때 울리는 청량한 목소리.

    “스탑.”

    그 목소리에 음악이 멈추고 무대를 어지럽게 돌던 모두가 멈췄다.

    장혁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앨리스란 곡을 얻기 위해 이렇게 뛰고 있지만, 자신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대체 마리나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거기에 자신이 마리나와 같은 무대에 서다니!

    장혁이 마리나와 같은 무대에 선 것은 그가 세미 오페라 무대에 선 경력이 주효했다.

    사실 팝의 여제 마리나와 한 무대에 선다는 것은 장혁에게도 영광이었다.

    그런데 오늘만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무대에서 열창하는 가수들을 보는 관중은 그것이 타고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장혁의 생각은 달랐다.

    대부분의 가수들은 물 위에 떠 있는 백조와 같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여유 있는 척하지만, 수면 아래로는 끊임없이 발을 젓고 있는 것.

    콘서트도 똑같다.

    매번 하는 노래이지만, 무대와 음향 시설에 따라 다르다.

    최선의 공연을 위해서는 준비하고 또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같이 무대에 서는 가수가 팝의 여제 마리나라면 전장에 선 장수처럼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이것은 장혁이 아티스트로 가지는 신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신념과는 달리 급조된 무대에 서고 말았다.

    아티스트의 신념대로라면 이 무대는 거절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거절하기에는…….

    장혁은 조용히 마리나를 바라봤다.

    무대 위에서 크루들을 진두지휘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전장에선 잔 다르크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마리나는 음향 엔지니어와 소통하며 무대를 세팅하고 있었다.

    그때 마리나가 고개를 돌렸다.

    마리나는 정확하게 장혁을 봤다.

    한참을 바라보던 마리나는 뭔가 생각난 듯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가 앞에서자 장혁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대한민국 탑돌의 고귀함은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장혁이 초등학교 때 마리나는 이미 팝의 여제로 군림한 가수였다.

    무대 경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같은 눈높이에서 서 볼 수 없는 가수였다.

    장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혹시 고쳐야 할 점이라도…….”

    “아니에요, 진짜 만족스러워요. 단시간 내에 이렇게 맞출 수 있을지는 몰랐어요.”

    “휴, 다행입니다.”

    장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옆을 힐끔 보니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마치 아빠 미소를 지으며 흐뭇한 표정을 짓는 도훈.

    장혁은 이 부분에서 살짝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는 거의 차이 나지 않는 도훈이었다.

    그런데 행동이나 눈빛을 보면 마치 아버지 또래의 연륜이 느껴진다.

    물론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마리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 진작 들어왔을 겁니다. 한국은 정말 놀라운 나라네요.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은 들어 봤어도 이런 아티스트를 단시간에 배출할 줄을 몰랐어요.”

    “아, 그건 조금…….”

    장혁이 손을 흔들었다.

    한강의 기적과 가필드를 비교하다니!

    해외 진출을 위해 미리 영어 회화 수업을 들었던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때 마리나가 장혁에게 물었다.

    “혹시 장이 생각하기에 미흡한 부분은 없나요?”

    “없습니다.”

    장혁은 고개를 저었다.

    단시간에 맞춘 호흡치고는 완벽했다.

    뭐,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고칠 부분은 조금 있었다.

    그런 부분은 시간이 남았을 때 체크해야 될 부분이었다.

    이번 공연은 지금 상태가 베스트였다.

    그때였다.

    마리나의 시선이 도훈 쪽을 향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도훈 쪽을 바라보는 마리나의 모습에 장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순간 장혁의 눈이 커졌다.

    마리나가 바라보는 것이 도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리나는 도훈의 옆에 있는 일일 매니저인 윤장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한 마리나가 천천히 걸어갔다.

    윤장미의 앞에서 마리나가 잠시 멈칫하다가 말을 이었다.

    “왓? 혹시 문제라도 있나요?”

    “아까 장혁 오빠한테 물어보셨잖아요, 미흡한 게 있냐고요.”

    윤장미는 아무렇지 않게 유창한 억양으로 말을 꺼냈다.

    마리나가 더욱 눈매를 좁혔다.

    “네, 말했었죠.”

    “제가 의견이 있어서요.”

    윤장미를 당당하게 무대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장혁의 눈이 커졌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학생이 팝의 여제에게 충고한다?

    이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대학생이 윤장미라는 점이었다.

    본 지 몇 시간 안 됐지만, 윤장미라면 마리나에게 혹평을 퍼부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장혁에게도 똑같이 쓴소리했으니 말이다.

    장혁이 팬에게 쓴소리를 들어 본 적이 과연 있을까?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일단 대화가 시작되면 팬들은 대부분 떨리는 목소리로 웃기만 할 뿐이다.

    아니, 팬이 아니어도 똑같다.

    TV만 틀면 나오는 얼굴.

    뉴스에도 콘서트 소식이 전해지는 아이돌.

    라디오를 켜면 어느 채널에선가는 그 목소리가 나오는 아티스트.

    그것이 가필드의 장혁이었다.

    팬이 아니어도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윤장미만은 달랐다.

    맞는 말이긴 해도 그 정도면 독설이었다.

    장혁이 마리나와 윤장미 사이에 손을 내밀었다.

    “잠시만요. 이 친구는 일일 매니저라서 아무것도…….”

    “제가 듣고 싶어서 그래요.”

    마리나가 환하게 웃었다.

    물론 그 웃음 뒤에는 묘한 감정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같은 무대에 선 사람도 아니었다.

    자신의 매니저도 아니고 한국 현지의 매니저.

    그것도 일일 매니저라 소개한 사람이 부족한 점에 대해서 말하겠다고 하니 마리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그 호기심의 반대쪽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자신의 시간을 빼앗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콘서트 시작 전 한 시간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 시간만큼은 무대에 집중해야 했다.

    여러 감정이 맞물린 마리나의 시선에 윤장미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음색 부분이 조금 모자란 것 같아요. 아까 중창 부분에서 성별이 조금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아마 95년 바바로티와 친구들의 연출을 염두에 두고 무대를 꾸미신 게 분명…….”

    윤장미는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순간 장혁은 조용히 하늘을 바라봤다.

    드디어 확실한 해설충 캐릭터의 입이 터진 것이다.

    잘못하면 무대가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

    눈을 질끈 감고 있는 상황에서 마리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 리얼리?”

    “네, 제 생각은 그래요.”

    “그건 나도 느낀 거예요. 여자 파트가 두세 명 정도 필요하다는 건데, 여기서 그 파트를 소화할 사람은 없어요. 지금의 무대에서는 이게 최선이에요.”

    “제 생각은 달라요. 주변 사람 아무한테나 시켜도 그 정도는 소화할 수 있을 거예요.”

    “아무나요?”

    “저기 저분 같은…….”

    윤장미가 마리나의 매니저 라셀을 가리켰다.

    순간 마리나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풉.”

    “왜 웃으세요?”

    “음악적 지식에 대해서 깊이가 있는 것은 알겠어요. 하지만 그건 이론적으로만 가능한 일이에요.”

    “그렇게 어렵지 않은데…….”

    윤장미는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바라봤다.

    그들의 대화에 장혁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넘어가나 싶었는데, 윤장미가 마치 불도그처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장혁이 몸을 날려 말리려는 순간 마리나가 말했다.

    “그럼 직접 해 봐요.”

    “네. 그럴게요.”

    그때 장혁이 손을 흔들었다.

    “자, 잠시만요. 지금은 그럴 시간이…….”

    “왜요? 그 정도 시간은 있잖아요.”

    마리나가 고개를 갸웃하자 장혁이 손을 내저었다.

    “저분은 그냥 매니저예요. 일단 무대서 서 본 경험이…….”

    장혁의 말이 끝나기 전에 도훈이 끼어들었다.

    “내 생각에는 해 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형까지 왜 그래요?”

    “목소리만 들어서는 마리나와 어울리는 것도 같고. 장미 학생이 자신 있게 대답한 것으로 보면 가사도 다 외우고 있는 것 같은데?”

    “가사요?”

    장혁은 그제야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윤장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악보가 아니라 짤막한 가사도 없었다.

    순간 장혁은 등에 소름이 돋았다.

    음악을 좋아해서 이론적으로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건 이미 아는 사실.

    그런데 오페라의 가사까지 외우고 있다고?

    머릿속에 컴퓨터라도 들어 있지 않다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도훈이 윤장미에게 물었다.

    “장미 학생, 악보 없어도 괜찮겠지.”

    “네, 괜찮아요.”

    윤장미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훈이 기분 좋게 웃었다.

    마치 외국 프렌차이즈 음식점 앞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는 노인처럼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장혁은 지금 상황 황당할 뿐이었다.

    그 황당함에 도훈이 기름을 부었다.

    도훈의 생각은 간단했다.

    전생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에서 자신의 능력을 각성했다.

    지금 상황은 그 상황이 조금 앞당겨질 뿐이었다.

    그때 마리나가 그 그림에 불을 붙이듯 손뼉을 쳤다.

    짝!

    “여기 음악 줘 봐요.”

    그 소리에 음향 감독이 손가락을 말아 쥔다.

    그러고는 헤드셋으로 숫자를 외친다.

    아마도 마리나의 인이어로만 들리는 것 같았다.

    마리나는 음악 감독이 부르는 숫자를 전했다.

    “쓰리, 투. 원!”

    순간 스피커에서 전주가 흘러나왔다.

    따다다. 딴. 따.

    오케스트라의 연주.

    정제된 선율이 무대 위를 어지럽힌다.

    살짝 한 소절이 지나고 마리나가 윤장미에게 신호를 준다.

    이제 들어갈 파트라는 것이다.

    윤장미가 마이크도 없는 상태에서 노래를 부른다.

    ―그 목소리는 이 회색…….

    순간 마리나의 눈이 커졌다.

    완벽한 화음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기본 베이스로 깔고 들어간 정확한 화음.

    마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 화음에 답했다.

    ―감히 꿈꾸지 못했던 하늘 위로…….

    마리나와 윤장미의 음색이 어우러졌다.

    그때였다.

    윤장미가 누군가에게 턱짓했다.

    그 모습에 마리나가 손을 들었다.

    마리나의 신호에 음악이 끊겼다.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무대를 눌렀다.

    마리나가 황당하다는 듯 윤장미를 바라봤다.

    “혹시 음악 했어요?”

    조금은 광범위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윤장미는 당황하지 않았다.

    “공부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 왜 시선을 돌린 거죠?”

    “제 친구의 도움이 필요해서요.”

    “도움이요?”

    “제 친구가 저보다 더 노래를 잘하거든요.”

    “대체 어떤 친구가요?”

    “저 친구요.”

    윤장미가 힘차게 검지로 자신의 친구를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장소담이 황당하다는 듯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이 상황은 도훈도 예상하지 못했다.

    전생의 기억에 장소담은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과연 어떻게 된 것일까?

    로즈, 즉 윤장미보다 더 뛰어났다면 장소담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할 리 없었다.

    낭중지추라는 말이 있었다.

    뾰족한 송곳은 언젠가는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전생의 기억으로는 그 송곳은 윤장미 하나였다.

    그런데 친구 장소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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