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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그 제작진 중 명함을 받은 사람이 없었다면, 이곳도 못 찾아냈을 것이다.
장혁은 방문 앞에서 눈을 빛냈다.
완벽한 앨범을 위해서는 이 정도의 수고는 감수할 수 있는 장혁이였다.
유비가 제갈공명을 얻기 위한 삼고초려 정도는 장혁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완벽한 앨범을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 한 일도 할 수 있었다.
장혁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순간 가장 앞에 있던 도훈과 눈이 마주쳤다.
음식이 들어오는 줄 알고 고개를 돌렸던 사람들은 장혁을 보고 입을 벌렸다.
순간 어색한 정적이 방 안에 맴돌았다.
저 멀리 있던 한지혜 피디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재빨리 뛰어가 장혁을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여기에 왜 왔어요?”
“누나가 선생님 계신 곳 말해 줬잖아요.”
“내가 언제 말해 줬어요?”
“어차피 이 선생님이랑 같이 있을 거잖아요. 그럼 이 선생님 계신 곳 말해 주는 거랑 똑같죠.”
“그렇다고 여기에 오면 어떻게 해요?”
“급한데 어떻게 해요?”
“와, 그렇다고 갑자기 오면…….”
한지혜가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녀는 스타플레이어 팬 사인회에서 장혁에게 명함을 건넸다.
물론 섭외를 위한 포섭이었다.
그런데 장소를 떠나자마자 전화가 온 것이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곳에서 밥을 먹을 거라 하면서 끊었다.
그런데 여기로 찾아올 줄을 몰랐었다.
한지혜는 힐끔 도훈을 바라봤다.
의외로 도훈은 웃고 있었다.
한지혜가 난감해하고 있을 때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찾아왔네요, 장혁 군.”
“아, 이 선생님.”
“그냥, 이 실장이라고 불러요.”
“네, 이 실장님.”
“여기 앉아요.”
“참, 이 방 계산은 제가 했습니다. S코스를 주문하셨더라고요.”
알파벳에 유난히 악센트를 주는 장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정상에 올라 있는 장혁이라도 육백만 원은 부담스러웠다.
도훈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하하. 가필드의 장혁 군이 쏘신다니 감사히 먹겠습니다.”
“당연하죠. 선, 아니 실장님.”
“혹시 곡 때문에 오신 거라면 그냥 쓰십시오.”
“아니 어떻게 남의 곡을 제 것처럼 쓸 수 있습니까?”
“그냥, 쓰셔도 됩니다. 장혁 군은 그만큼의 자격이 되니까요.”
“그건 제 영혼이 허락 못 합니다.”
“흠, 그때 머리에서 맴돌던 멜로디라고 그랬잖아요.”
“그건 그렇죠.”
“그런데 장혁 군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면 그냥 쓰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건 제 아티스트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영혼에다가 자존심이라…….”
“네, 맞습니다.”
장혁은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 모습에 모두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대화를 따라잡기에는 사전 지식이 너무 불충분했다.
방 안의 모두가 도훈과 장혁의 입술만 바라보고 있었다.
도훈은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앞쪽에 있는 장혁과는 전생에도 접점이 없었다.
은혜도 원한도 없는 사이였다.
그런데 현생에서 예상치도 못한 접점이 생긴 것이다.
그것은 우연이었다.
도훈은 전생의 기억을 무기로 휘두르기로 했다.
전생의 기억에는 앞으로 히트할 곡이나 영화와 드라마도 포함된다.
도훈은 머릿속에 들어있는 미래의 먹거리들을 꺼내서 정리했다.
영화나 드라마의 시놉은 김다솜에게 맡기고 음악 관련 멜로디는 고양미에게 주어 정리하는 방향을 택했다.
그리고 만약 상대가 도훈의 뒤통수를 치려고 한다면 그것을 칼처럼 휘두를 작정이었다.
상대가 기획하고 있는 영화를 이쪽에서 먼저 발표하고 상대의 곡이 발표되기도 전에 미리 저작권 등록을 해 놓고.
물론 상대가 도훈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을 때에 한해서였다.
거기에 지금은 일단 첫 번째 복수는 끝난 상태였다.
누군가 도훈을 건들지 않는다면 흘러가는 강물의 방향을 바꿀 필요는 없었다.
모든 히트곡과 히트작을 도훈이 독식한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뒤틀릴지도 몰랐다.
도훈은 그런 상황을 원치는 않았다.
장혁이 우연히 들었던 곡.
장혁과 도훈을 만나게 했던 곡.
장혁이 지금도 탐내고 있던 ‘앨리스’란 곡의 진짜 원작자는 누구일까?
그것은 전생의 장혁이었다.
앨리스가 담긴 앨범은 명곡이라 추앙받으며 스테디셀러로 이름을 떨친다.
그 곡이 더욱 유명해지는 것은 장혁의 죽음 이후였다.
앞으로 삼 년밖에 안 남은 장혁에게 그의 곡을 뺏는다?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닌가?
호랑이가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 그는 남은 기간 명곡을 남겨야 했다.
누군가 이런 도훈의 생각을 안다면 왜 장혁을 안 살리냐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도훈이 정한 규칙에서 벗어난다.
도훈은 머릿속에 앞으로 일어날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넣고 있다.
그것을 혼자 다 막으려면 자신의 삶은 없어진다.
자신과 관계가 없는 일은 그냥 자연의 법칙에 맡긴다는 것이 도훈의 규칙이었다.
그런데 장혁과 관계를 맺는다?
잠시 생각하던 도훈이 말했다.
“처음 나를 만났을 때 편하게 부르라고 했죠.”
“네, 제가 처음 데뷔했을 때 만났던 작곡가 선생님이 저를 장혁 군이라고 불렀거든요.”
“그럼 좋아요. 장혁 군이 하자는 대로 하겠습니다. 원하는 대로 그 곡을 주겠습니다.”
“네?”
“싫어요?”
“아, 아닙니다. 갑자기 쉽게 허락하셔서…….”
장혁은 자신의 안쪽 주머니를 힐끔 바라봤다.
육백만 원 짜리 영수증이 들어 있는 곳이었다.
장혁은 육만 원이 헛되지 않았다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도훈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선, 아니 실장님.”
“장혁 군 취미가 바이크죠?”
“네, 맞습니다.”
“오늘부터 바이크는 타지 마십시오.”
“바이크를 타지 말라니요? 그게 무슨…….”
“둘 중 하나를 택하십시오. 바이크냐 아니면 노래냐.”
“그야 물론…….”
장혁이 말끝을 흐렸다.
표정이 펴졌다가 일그러졌다를 반복한다.
마치 고뇌하는 햄릿을 보는 것만 같았다.
수많은 물결이 장혁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고 드디어 잔잔해졌다.
그는 해탈한 선인처럼 평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 타겠습니다. 그러니 곡을 주시죠.”
“계약서에 적겠습니다. 위약금도 적겠습니다. 국내 법원은 인정하지 않겠지만요.”
“…….”
“그래서 관할 법원은 해외로 하겠습니다. 알아보니 미국 몇 개 주에서는 선례가 있더군요.”
“앗? 미국요?”
“네, 그럼 인정하시나요?”
“네, 알겠습니다.”
장혁은 환하게 웃었다. 그런데 어깨가 축 처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착각이 아닐 것이다.
장혁은 바이크를 타고 바람을 맞을 때 가장 큰 자유를 느낀다고 한다.
그것은 어느 음악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나온 말이다.
그가 죽은 후 그 잡지에서는 이런 칼럼을 썼다.
그의 자유에 대가가 따랐다고…….
그가 만끽한 자유로움에 비하면 너무 큰 대가였다.
계약서를 지킨다면 아마 그는 활동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갑작스러운 결말에 박창성과 한지혜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도훈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때 식사가 나왔다.
눈이 한계까지 커질 정도의 진수성찬.
뭐, 낮에 먹는 간단한 식사로는 진수성찬이라는 이야기였다.
카메라맨 몇은 옆 사람에 혹시 추가로 자기들이 낼 돈이 있는지 확인하기까지 했다.
코스가 다 나올 때쯤 박창성과 한지혜는 후식을 먹지 못하고 입을 딱 벌려야 했다.
도훈과 장혁, 사이에 일어난 일은 마치 믿거나 말거나 같은 TV 프로그램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가장 놀란 것은 블랙홀 멤버들이었다.
우시원은 아직 밥을 반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가필드라면 우시원이 감히 눈도 마주칠 수 없는 그룹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형이라 불리는 도훈이 그에게 스승과 같은 대우를 받고 있을 줄을 몰랐었다.
거기에 가필드의 신곡을 직접 프로듀싱해 줄 것이고 약속까지 했다.
그 약속에 가필드는 블랙홀을 친동생처럼 보살피겠다고 했다.
물론 우시원은 그 제안이 탐탁지 않았다.
우시원은 주변에서 친형제들이 얼마나 많이 싸우는지를 봐 왔다.
친동생은 말고 조금 거리가 있는 동생으로 대해 줬으면 했다.
사실 가필드의 장혁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언제 튈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 같은 존재가 옆에 있다는 것은 안전핀 빠진 수류탄을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았다.
그냥 쥐고 있을 때는 괜찮지만, 신경을 딴 데 팔다가 수류탄을 놓는 순간 대참사가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물론 우시원의 개인적인 생각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우시원이 나올 때였다.
장혁이 우시원의 어깨를 감쌌다.
순간 우시원의 어깨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움찔 떨렸다.
그 모습에 장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시원이라고 했지?”
“네, 선배님.”
“그냥 형이라고 불러. 그리고 괜히 그런 표정 짓지 마. 나 이상한 사람 아니라니까.”
“저, 그런 생각 안 해요. 선배님.”
“에이, 얼굴에 다 쓰여 있는데 잡아떼기는!”
장혁은 사람 좋은 얼굴로 씩 웃었다.
하지만 우시원은 그 웃음 속에 독사의 독니를 본 것처럼 뒷걸음질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장혁의 기사를 찾아보면 키워드에 항상 포함되어 있는 문장이 있었다.
그것은 ‘종잡을 수 없는!’이라는 문구였다.
우시원이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녜요, 선배.”
“참, 안경 벗어 봐.”
“네?”
우시원이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러운 말이었다.
우시원은 드디어 올 게 왔구나 하는 생각에 한숨을 삭였다.
투견이나 쌈닭이라고 소문이 났지만, 폭력을 쓴다는 내용이 없었는데…….
우시원은 상념을 떨쳤다.
상대는 가필드의 장혁이었다.
우시원은 코알라가 아닌 순한 양이 되어 안경을 벗었다.
그러고는 눈을 찔끔 감았다.
장혁이 황당하다는 듯 바라봤다.
“우시원! 지금 뭐 하는 거야?”
“안경 벗으라고 하셔서요.”
“아니, 그건 얼굴 보려고 한 거지.”
“얼굴이요? 대체 그게 무슨…….”
“아무래도 내 후계자 나온 것 같다. 너는 내가 외모로 제일 인정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아마도…….”
“없어!”
“네?”
“내 사진이나 거울을 보고 감탄하는 것 이외에는 내가 누군가의 외모를 보고 감흥을 느낄 때는 없어. 그런데, 오늘 처음으로 감탄했다. 안경 벗으니까. 완전히 달라 보이네. 물론 내가 있는 한 너는 넘버 투야, 우시원.”
“아.”
우시원은 탄성을 터뜨렸다.
단순한 감탄사는 아니었다. 놀람의 속에는 기쁨과 두려움이 교묘하게 섞여 있었다.
굳이 말하면 5 대 8의 황금 비율이었다.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크다는 말이었다.
우시원은 살다 살다 이런 자뻑 캐릭터는 처음 봤다.
그때 뒤에서 도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 여기서 뭐 햐냐? 빨리 나가서 마지막으로 힘내야지.”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
장혁이 힘차게 답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 모습에 도훈이 물었다.
“시원아, 쟤 지금 뭐라는 거야? 왜 너희 프로그램에 저렇게 열을 올려?”
“그,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실장 형.”
우시원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