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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원이 묻자 도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고 내가 시킨 대로 하면 돼!”
“뭔가 조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우시원의 모습에 도훈이 피식 웃었다.
“나 못 믿는 거 아니지?”
“그야 믿죠. 실장 형을 못 믿으면 누굴 믿어요.”
“그럼, 실시!”
도훈이 스타플레이어의 팬 사인회 장소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사인을 받기 위한 팬들이 길게 줄을 늘어서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팬 사인회를 받고 나면 옆으로 이동해서 탑 보이 그룹 중 하나인 가필드와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는 포토존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번 팬 사인회는 팬들에게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을 기회였다.
스타플레이어의 사인도 받고 가필드와 함께 셀카도 찍고 말이다.
이렇게 사람이 몰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SW의 대표 그룹인 미스트도 아니고 국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가필드였다.
그중 센터를 맡은 장혁은 다른 팬덤들도 인정하는 얼굴 천재.
스타플레이어의 사인은 덤이고 목적이 셀카인 팬들도 제법 있을 것이다.
도훈의 지시에 따라 블랙홀 멤버들이 사인을 받기 위한 대기 줄에 섰다.
그 모습에 도훈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한지혜가 다급하게 다가왔다.
“실장님, 어쩌시려고요?”
“밥상을 차려 놨으면 저희가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죠.”
“밥상이라니요?”
“저기 보세요.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 놨잖아요.”
도훈이 다시 팬 사인회 장소를 가리키자 한지혜가 힐끔 그곳을 확인하더니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저는 저게 밥상으로 안 보이는데요?”
“제 눈에는 밥상으로 보이네요. 그래서 막 숟가락을 올려놨습니다.”
“숟가락이라면?”
“저기 줄을 서 있잖아요.”
도훈은 줄 서 있는 블랙홀 멤버들을 가리켰다.
* * *
서찬휘는 지금 죽을 맛이었다.
도훈이 내린 지시는 이곳에 줄을 서서 스타플레이어의 멤버들에게 사인을 받고 가필드와 셀카를 찍으라는 것이었다.
도훈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중요한 포인트를 말해 줬다.
최대한 진짜 팬인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흥분한 표정으로.
최대한 친한 척.
그리고 정중하게 말이다.
사실 이건 서찬휘에게 맞지 않는 옷과도 같았다.
서찬휘는 붉은 천을 향해 달려드는 성난 황소와 같았다.
주위는 돌아보지 않고 직진하는 성격.
그런데 성격을 죽이고 스타플레이어의 사인을 받으라니!
물론 스타플레이어의 멤버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프로그램이 조작되었다는 정황이 발표되긴 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는 않았다.
서바이벌 무대에서 떨어질 만하니 떨어졌다는 것이 서찬휘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뽑힌 최종 인원은?
살아남을 만한 매력을 갖춘 아이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이 블랙홀보다 더 뛰어난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스타플레이어는 그들만이 가진 고유의 매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블랙홀도 대중에게 어필할 매력이 있다고 자부한다.
물론 같은 매력의 포인트는 다르다.
블랙홀은 다른 그룹에는 없는 국내 최고의 비보이 출신 춤꾼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서찬휘 자신의 이야기였다.
서찬휘는 약간의 자뻑 경향이 있었다.
이것은 서찬휘의 장점이자 단점.
여기까지 생각한 서찬휘는 자존심이 상한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서찬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찬휘야, 입 집어넣자.”
“앗, 실장 형.”
“그래, 얼굴 좀 펴고!”
“형이 왜 제 옆에 있어요.”
“나도 사인받으려고.”
“사인을 받는다고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인데, 너희만 시킬 수는 없잖아.”
“아, 실장 형…….”
서찬휘는 감동한 듯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냈다.
“찬휘야.”
“네, 실장 형.”
“그런 부담스러운 눈빛 하지 말고 우리 앞을 보자.”
“네.”
서찬휘가 눈을 빛내며 줄어드는 줄을 바라봤다.
그들의 뒤쪽에는 VJ들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주변에 있는 팬들은 그 의미를 모르는 것 같았다.
앞에 있는 스타플레이어 멤버와 포토존에 있는 가필드만 신경 쓸 뿐이었다.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박창성은 한지혜를 바라봤다.
“이 실장은 지금 왜 그러는 거래?”
“다 차려진 밥상에다가 숟가락만 올려놓으면 된다고 하시던데요.”
“아, 미치겠네.”
“한번 믿어 보세요.”
“믿기는 뭘 믿어. 우리 프로그램이 뭐야?”
“추억을 소환하라잖아요. 그걸 새삼스럽게 왜 물어보세요.”
“한 피디!”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막 부담스러워지려고 해요, 선배.”
“추억을 소환하라를 찍고 있는 것도 맞지만, 지금 장면은 전부 아이돌 메이킹에 편집해서 넣을 거란 말이야. 메인이 아이돌 메이킹이고 서브가 추억을 소환하라인 걸 잊지 말자고. 그런데 남의 그룹 팬 사인회에 줄을 선다고?”
“생각해 보니 이거 국내 최초 아닐까요?”
“국내 최초는 맞지. 국내 최초로 폭망한 프로그램이 될 수도 있어. 아이돌 메이킹이라는 콘셉트 자체가 그룹의 결성 과정과 성장기인데, 저렇게 하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 경쟁 그룹의 팬 사인회에 줄은 선다는 건 아무래도…….”
“장점도 있지 않을까요?”
“한 피디가 생각하기에 장점이 있어 보여?”
“뭐…….”
한지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창성이 말을 끊었다.
“잠시만!”
“왜요?”
“지금 쟤는 왜 저기로 가는 거야?”
“누구요? 우리 블랙홀 멤버들은 줄을 잘 서고 있잖아요.”
“아니, 거기 말고……. 가필드 장혁 말이야.”
“에이, 화장실 가는 거겠죠.”
“그런데 왜 팬 사인회 줄을 헤집고 다녀?”
“급한 거겠죠. 아무래도…….”
“아니 이 실장한테 가는데.”
“그러게요? 표정이 심상치 않은데요. 혹시 원한이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설마요.”
“아니야, 생각보다 이 실장한테 원한을 가진 사람이 많다고 들었어.”
“그래도 이렇게 사람 많은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지금 저길 봐 봐. 전부 가필드 팬덤 천지야. 저기서 장혁이 뭐라고 이 실장한테 한마디라도 하면…….”
“에이, 설마요.”
“장혁 쟤도 얼굴은 멀쩡한데 또라이라고 소문난 놈이야.”
“또라이라니요?”
“지난번에 곡이 마음에 안 든다고 작업실 파일을 모조리 초기화시켰다잖아. 그것 때문에 소속사 대표도 난리 난 건 당연했지.”
“가필드 소속사면 장 스튜디오잖아요. 장혁의 작은아버지가 대표고요.”
한지혜가 고개를 갸웃하자 박창성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그때 장준 대표가 장혁 죽인다 살린다, 난리 쳤다고 들었어.”
장준은 장혁의 작은아버지이자 장 스튜디오의 대표였다.
“저도 들었던 것 같아요. 장혁이 완벽한 곡 아니면 지우는 게 최선이라고 그랬다면서요. 그래서 작곡가는 잠수 타고요. 앨범은 일 년이나 연기되고요.”
“그래, 그런 또라이가 바로 장혁이야. 아무래도 말리러 가야겠어. 저 동작은 지금 멱살 잡으려는 거잖아.”
박창성이 다급하게 도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잠시만요, 조금 지켜봐요.”
“잘 봐. 저 또라이 새끼가 이 실장 치려고 하잖아. 이 실장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고.”
그 말에 한지혜도 달려갔다.
박창성의 말 대로였다.
장혁은 도훈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만약 가필드의 장혁이 이곳에서 도훈과 일이 벌어진다면?
가필드뿐 아니라 유레카와 블랙홀도 문제였다.
가필드의 팬덤 성향 자체가 워낙 다혈질이었다.
그러니 잘잘못을 떠나 유레카를 공격해 올 것이 뻔했다.
그것은 이번 프로그램에도 악영향을 끼칠 터였다.
타다닥.
운동화에서 탄 냄새가 나도록 달리던 한지혜는 걸음을 멈췄다.
뜻밖의 장면이 연출되었기 때문이었다.
장혁은 도훈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도훈을 치려고 손을 내민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두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고 있었다.
도훈은 말없이 그의 손을 잡고 득도한 고승처럼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황당한 모습에 한지혜는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장혁의 뒤쪽을 보니 가필드의 멤버들이 모두 줄을 서 있었다.
아마도 한지혜와 박창성이 뛰어간 이유와 같을 터였다.
가필드의 멤버들도 장혁의 행동을 말리기 위해 다급하게 뛰어온 것 같았다.
멤버 중 몇은 숨이 찬지 헐떡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만큼 급박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모습에 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 저 사람 누구예요?”
“그러게, 누군데 장혁 오빠가 저렇게 고개를 숙이는 거지?”
“대단한 사람인가? 혹시 소속사 대표.”
“야, 너는 오빠 소속사 대표도 모르니?”
“그럼, 매니저?”
“너는 매니저 오빠 얼굴도 몰라?”
“새로 온 오빠일 수도 있잖아. 딱 봐도 낯이 익잖아.”
“그러게 낯이 익네.”
팬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도훈을 향해 의문의 시선을 보냈다.
뜻밖에 상황에 진행되던 행사가 멈췄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이곳에 온 이들은 대부분이 가필드의 팬이었다.
그들은 사인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장혁과 도훈의 대화에 귀 기울였다.
그때 팬들의 눈이 커졌다.
장혁의 인사 때문이었다.
“아, 선생님. 왜 연락도 안 받으시고 그럽니까?”
“흠, 가필드의 장혁군 맞죠. 사람도 많은데 이렇게 갑자기 달려오면 어떻게 합니까? 장혁 군과 사진 찍으려는 팬들이 기다리고 계시잖아요.”
도훈은 팬들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장혁이 뒷머리를 긁적인다.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일단 팬들을 위한 팬 사인회에 신경 써 주신 다음, 이따 대화하죠.”
“아닙니다. 차라리 제 쪽으로 오시죠.”
“스타플레이어의 사인을 기다리는 중이라…….”
“그건 제가 따로 챙겨 드리겠습니다. 혹시…… 아닙니다.”
뭔가 말하려다가 장혁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도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장혁의 안내를 받은 도훈이 뒤따르자 줄을 서 있던 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선생님이라니?”
“저 사람이 장혁 오빠 선생님인가 봐? 그래서 얼굴이 눈에 익었나?”
“아무리 장혁 오빠 선생님이라도 우리가 어떻게 얼굴을 알아. 그런데 저 사람은 묘하게 낯이 익어.”
“혹시 ‘TV는 사랑의 사랑을 싣고’에서 나온 거 아니야?”
“장혁 오빠는 그 프로그램에 안 나왔어.”
“그럼 누굴까? 보니까 소속사 관계자는 아닌 것 같은데.”
“앗, 나 저 사람 기억났어.”
“그게 무슨 말이야.”
“저 사람 분명히 TV에 나왔어.”
“야, 똑바로 말해. 어디에서 나왔는데?”
“MBS의 스타플레이어에서 나왔잖아. 그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매니저 오빠.”
“아, 나도 기억난다. 그런데 장혁 오빠가 저 사람한테 선생님이라고 하는 거지?”
팬들은 모두 장혁과 도훈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만큼 장혁의 돌발 행동은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거기에 장혁은 팬들의 시선을 잡아 두기에 최적화된 외모까지 갖추고 있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도훈이 속삭이듯 말했다.
“장혁 군, 일단 셀카부터!”
“네, 알겠습니다.”
장혁은 도훈을 잡아끌더니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