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미라클이라는 단어는 유난히 귀에 박혔다.
그때 아저씨 중 하나가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게 말이야. 미라클 대표의 자식이 왜 그런 짓을 하지…….”
“에이, 누가 듣겠어.”
“여기에서 누가 듣는다고 그래?”
“그래도 혹시 모르지……. 이 근처에 장경자 회장이 산다고 하던데.”
“미라클의 장경자? 그 사람이 왜 약수터에 와?”
“여기 약수터에 자주 온다고 소문났다니까.”
“그거야 헛소문이지. 주의를 봐 봐. 경호원처럼 생긴 사람이 있는지?”
다른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주변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에 스쳐 지나간 곳에는 장경자도 있었다.
그의 소매를 친구가 잡아끌며 약수터를 내려가자 장경자가 엄지연을 바라봤다.
그들의 대화에서 나온 내용을 알아보라는 신호였다.
상황을 모르는 제이든이 조심스럽게 도훈에게 물었다.
“도훈, 우리가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노. 제이든이 잘못한 건 없어요. 그냥 집안일이에요.”
“하하. 나는 우리가 잘못한 줄 알고 살짝 찔렸잖아요.”
환하게 웃는 제이든을 보고 있던 도훈은 시간을 확인했다.
“제이든, 빨리 내려가서 유레카로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요.”
“왓?”
“오늘 녹음 마무리하기로 했잖아요.”
“아직 일정이 남았는데 뭘 그리 서둘러요?”
“오늘 녹음 마치고 약속한 블랙홀의 후속곡 피처링도 해 주셔야죠.”
“그거야 껌…….”
제이든은 말끝을 흐렸다.
어제 강시혁과 작업을 해 보니 껌이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어찌 보면 데뷔할 때보다도 더 녹음 과정이 혹독했기 때문이다.
* * *
아침 밥상에는 한 명이 더 추가되었다.
그는 다름 아닌 애론이었다.
애론이 아침 밥상에 합류하자 장경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들 들어. 이건 꼭 게스트하우스 같구먼.”
“하하, 조금 분위기가 그렇죠. 그런데 애론은 할머니가 초대하신 거예요?”
“어, 내가 초대했어. 관상을 보면 밖에서 굶기에 딱 좋잖아. 괜히 먼 곳에 왔다가 끼니 굶고 다닐까 봐. 아침은 여기에 와서 먹으라고 했어.”
“하하.”
도훈이 웃자 맞은 편에 앉은 애론이 말했다.
“하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유.”
“풉.”
터져 나오는 웃음에 도훈이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 * *
그날 오후.
도훈은 도심의 어느 호텔에서 누군가와 마주 보고 있었다.
“장 비서님, 잘 지내셨나요?”
“네. 덕분에요.”
“덕분에 일은 잘 마무리된 것 같습니다. 다만!”
도훈이 말을 끊자 장 비서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재벌이란 족속은 원래 부하 직원이란 개념이 없었다.
그저 불과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장 비서가 이번 사건을 통해 느낀 것이다.
장 비서가 사라지자 그의 후임으로 다른 직원이 들어왔다고 들었다.
이도준은 장 비서가 사라지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다만, 검찰만이 장 비서의 행방을 수소문할 뿐이었다.
장 비서는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그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도훈이었다.
문제는 도훈도 같은 집안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장 비서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긴장한 장 비서의 모습에 도훈이 말을 이었다.
“긴장하지 마시고요. 장 비서님.”
“죄송합니다. 제 표정이 읽혔나 봅니다.”
“네. 읽지 않으려고 해도 얼굴에 쓰여 있으니까요. 그런데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갑자기 말을 끊으셔서 긴장했습니다.”
“제가 말하려 하던 것은 일이 끝나고 어디로 가실 거냐는 얘기예요.”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미라클로 돌아갈 수는 없잖습니까?”
“음.”
“유레카로 오시죠?”
“네?”
장 비서의 두 눈이 커졌다.
그 모습에 도훈이 손을 내저었다.
“강요는 아닙니다. 연봉은 미라클에서 받던 만큼 드리겠습니다.”
“그럼 제가 이도훈 실장님의 비서로…….”
“아닙니다. 유레카에서 아무래도 미국에 지사를 둬야 할 것 같아서요.”
“미국이요?”
“네, 이번에 지사를 설립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낯선 환경이다 보니 설립에서부터 관리까지……. 참, 거기에 외국어도 능통해야 일하기가 편하죠.”
“유레카가 미국에 지사를 설립할 이유가 있나요?”
“요즘 연예란은 안 보시나 보네요.”
“네, 경제면만 봅니다.”
사실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장 비서는 뉴스를 아예 끊고 살았다.
괜히 신문 기사나 뉴스를 보면 가슴이 벌렁대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도훈이 웃었다.
“참, 그러고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일단 한번 보시고 결정하세요.”
도훈은 리모컨을 들어 TV 전원을 켰다.
틱 소리와 함께 TV의 화면이 들어왔다.
도훈이 시청하려는 채널을 돌리려다가 멈칫했다.
뉴스에서 도훈의 관심을 끌 만한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다음 소식은 위조지폐 유통에 관한 소식입니다. 뜻하지 않은 위조지폐 유통으로 당국이…….
도훈이 유심이 뉴스를 보자 장 비서가 물었다.
“위조지폐에 대한 뉴스는 간만에 보네요.”
“그죠. 분명히 잡히는 건 시간 문제죠.”
“대체 어느 간 큰 놈들이 요즘 세상에 위조지폐를…….”
장 비서는 다음 기자의 멘트에 말끝을 흐렸다.
―사건의 시작은 위조지폐라는 것을 모르고 은행에 입금시켰다고 합니다. 은행에 입금시킨 기업 사람은 모 엔터테인먼트 그룹의…….
순간 장 비서의 눈이 커졌다.
장 비서는 뉴스 화면과 도훈을 번갈아 봤다.
기사가 끝나자 도훈은 아무렇지 않게 채널을 돌렸다.
그 모습에 장 비서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기사를 유심히 보시는 걸 보면 아는 눈치신 것 같은데…….”
“이 사건으로 장 비서님은 자유가 됐습니다.”
“네?”
“장 비서님께 채워졌던 족쇄는 한 달 안으로 풀릴 겁니다.”
“이 사건이 저와 무슨 상관이길래요.”
“아마 머지않아 경찰은 저 위조지폐가 어디서 왔는지를 밝혀낼 겁니다.”
“누구한테 온 건데요?”
“제 사촌 형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뭐, 저도 저렇게 멍청할 줄은 몰랐네요.”
도훈은 피식 웃었다.
어느 정도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미끼를 물 줄은 몰랐었다.
장경자의 비밀 금고는 도훈의 예상대로 털렸다.
산자락에 있던 금고가 털렸지만, 미라클과의 접점은 전혀 찾지 못했다.
문제는 그 안에 남아 있는 돈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금고를 턴 사람과 경찰에 신고한 사람이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그들은 도훈이 예상하던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그들은 대부분의 돈을 그곳에 빼낸 후 신고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금고에 있던 돈을 어디로 빼돌렸을까?
물론 그 돈이 어디로 빼돌렸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도훈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그 돈은 언젠가는 은행으로 갈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 돈에는 위조지폐가 숨겨져 있었다.
위조지폐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도훈은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금고를 턴 것은 도훈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거액이 들어있는 무기명 채권은 도훈이 미리 다 빼돌렸다.
그러던 중 금고 안에 위조지폐가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아마도 장경자가 몇 년 전 시장 상인에게서 받은 지폐일 것이다.
위조지폐에 관한 사건은 도훈도 전생의 기억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조직적인 범죄가 아닌 단 한 명이 만들어 낸 위조지폐 사건으로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놨던 사건이었다.
운이 없게도 위조지폐범이 만든 만 원권 몇 다발이 장경자의 손에 들어온 것.
뭐, 진짜 운이 없는 것은 이 위조지폐를 유통시킨 사람이었다.
아마도 자금의 흐름을 바닥까지 파면서 이번 사건을 수사할 것이 뻔했다.
SW엔터란 단어가 나온 것으로 봐서 분명히 이도준이 연관되어 있을 터.
마지막에는 이세훈과 이도준을 미라클에서 삭제시켜야 그룹이 살아남을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도훈이 이번 사건으로 이세훈의 자금 흐름이 적나라하게 드러남과 동시에 진짜 위조지폐범이 역사보다 더 빨리 잡힐 것이라고 확신했다.
물론 이에 대한 사실은 장경자에게 미리 통보했다.
아마도 이번 사건으로 인해 장경자가 쓰러지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때 마침 도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디링.
―난, 괜찮다.
장경자에게 온 메시지였다.
장 비서는 궁금한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을 장 비서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장 비서는 도훈의 마음을 아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번 사건에서 이도준이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가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장 비서에게 자유가 찾아올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이었다.
장 비서는 도훈에게 USB 하나를 건넸다.
“이건 제가 기록해 놓은 자료들입니다. 실장님이 알아서 쓰십시오.”
“믿으시는 겁니까?”
“저도 진심을 보여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일단 TV나 보죠.”
도훈이 피식 웃으며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에서는 광고가 끝나고 타이틀이 큼지막하게 찍혔다.
<추억을 소환하라!>
큼지막한 타이틀은 다소 예스러워 보였다.
타이틀을 배경으로 수많은 국내외 탑스타들의 공연 영상이 지나간다.
그 화면은 갑자기 흑백으로 전환되고 중간에는 점이 찍혔다.
시청자들은 시간이 지나자 화면이 흑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면은 회색빛이 감도는 우주였다.
그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
멀리서 보면 지구도 회색이었다.
점점 가까워지자 지구에 색이 입혀졌다.
그때 흐르는 내레이션.
―여러분들 머릿속에는 수많은 추억이 쌓여 있죠. 지금 여러분의 눈앞에 보이는 장면들은 먼지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쌓여 있는 추억들에 비하면요…….
―그럼, 추억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실까요!
귀에 익은내레이션이 지나간 후 점은 점점 바뀐다.
대한민국을 비추더니 이제는 서울을 비춘다.
그것도 서울의 외곽과 붙어 있는 장산시.
점점 가까워지더니 무대 위에서 멈췄다.
무대가 설치되는 장면이 10배속으로 쓱쓱 지나가더니 유람선 모양의 무대가 완성되었다.
다시 이어지는 내레이션.
―사실 이번 기획은 AI가 여러분의 추억을 분석한 결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 내레이션에 도훈은 피식 웃었다.
AI가 분석한 것이 아니라 모두 도훈의 생각이었다.
모든 것은 장경자의 취향이고 말이다.
장 비서는 무대에 선 그룹을 바라봤다.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헉. 저 사람들이 한국에 왔어요?”
“네.”
“대체 어떻게…….”
“제가 불렀습니다.”
“실장님이요?”
“조금 생뚱맞죠?”
“아닙니다. 그러실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해요.”
“하하.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장 비서는 눈을 가늘게 뜨며 TV를 바라봤다.
장 비서가 예능 프로그램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된 직장 생활에 TV를 시청할 시간이 없었을 뿐이었다.
화면을 보던 장 비서는 연신 탄성을 터뜨렸다.
자신이 숨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어깨를 들썩이기도 했다.
장 비서와 TV 시청을 하는 동안 도훈의 핸드폰은 연신 비명을 토해 냈다.
디링.
디링.
문자 메시지도 있었고 메신저로 온 메시지도 있었다.
중간중간에는 실시간 시청률을 찍어서 보내는 임제호의 메시지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