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189화 (189/250)

(189)

양복을 입은 남자가 온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했다.

설명은 이어 가던 경비원이 뭔가 생각난 듯 손뼉 쳤다.

“아. 맞다! 잠시만요. 그 사람이 저희 회사 CCTV에 찍혀서 녹화분 떠 놨거든요.”

경비원은 재빨리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USB를 하나 들고 왔다.

활짝 웃으며 경비원이 빨간색 USB를 건넸다.

“이겁니다. 사장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USB를 건네받은 도훈이 다시 지갑을 꺼내자 경비원이 뒤로 물러섰다.

“자꾸 이러시면 부담됩니다.”

“아니에요. 이건 USB 값이에요. 어디 가서 땅 파 보세요. 하늘에서 USB가 떨어지나요?”

도훈이 씩 웃자 경비원이 마지 못해 봉투를 받았다.

도훈은 차 안에서 녹화된 영상을 확인했다.

영상을 확인하던 도훈은 재빨리 멈췄다.

낯익은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충격을 받았던 것이 이걸 수도…….”

도훈은 혼잣말을 뇌까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    *    *

전화를 받은 엄지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경자에게 달려갔다.

“회장님!”

“또 무슨 일이여?”

“큰, 아니, 큰일은 아니고 작은 일이에요.”

“그냥 본론부터 말해. 본론부터.”

“그러니까…….”

엄지연은 도훈과 통화한 내용을 장경자에게 전했다.

도훈의 부탁은 간단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할머니인 장경자의 집에서 보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설명을 듣고 난 장경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여기 있고 싶다는 거지? 그럼 고민해 봐야겠네.”

“일단 오후에 짐부터 옮겨 놓는다고 하는데요.”

“고놈 봐라…….”

장경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에 엄지연이 말했다.

“오지 말라고 할까요?”

“그냥 둬! 손주가 여우 짓하는데 말리는 것도 그렇잖아.”

장경자가 피식 웃었다.

그 모습에 엄지연도 웃었다. 아무리 봐도 기분 좋은 모습이었다.

*    *    *

일주일 후 장경자의 저택.

새벽 시간인데도 거실은 시끌벅적했다.

도훈은 장경자의 집에 짐을 옮겨 놓고 일주일에 한 번씩 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도훈의 첫 번째 방문이 바로 어젯밤이었다.

도훈은 밤늦게 퇴근해서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거기에 손님까지 데려와서 방 하나를 내줘야 했다.

장경자는 새벽 운동을 가자면서 도훈을 깨웠다.

“아직도 안 일어났어?”

“네, 회장님. 그냥 놔두고 우리끼리 다녀오죠.”

“엄 비서야, 다시 깨워 봐.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르고 내 집에 왔으면 내 말에 따라야 하는 법이지. 안 그래?”

“표정 보면 응급실에라도 실려 가야 할 판인데요.”

“그러면 그럴수록 새벽 운동에 빠지면 안 되지. 참, 큰 방에서 곯아떨어진 놈들도 깨워.”

“그 친구들은 조금…….”

“여기가 로마야, 내 집이야?”

“그야 회장님 집이죠.”

“그럼 내가 곧 법이지. 안 그래?”

“네, 일단…….”

엄지연은 말끝을 흐렸다.

장경자가 마루에 장식된 징을 들었기 때문이다.

장경자가 들고 있는 징은 진짜 장식품이었다.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은 명장이 한 달을 꼬박 새워 만든 징이었다.

장경자는 그 징을 선물 받고는 이제까지 애지중지했다.

장경자가 누구도 건들지도 못하게 한 징을 갑자기 꺼내 든 것이다.

사실 명장이 만들었다고 하니,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소리조차 듣지 못한 징을 어떻게 판단하겠는가?

엄지연은 장경자가 징을 치지는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도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새벽부터 왜 그러세요.”

“언제 일어났어?”

“아까부터요. 아침부터 왜 징을 치려고 하세요?”

“안 일어나니까 그렇지.”

“그러지 않아도 일어나려고 했어요. 이제 가요.”

도훈이 부스스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누가 봐도 세수도 안 한 모습이었다.

그때 장경자가 말했다.

“쟤들도 데려가야지.”

“저 친구들은 그냥…….”

도훈은 말을 맺지 못했다. 다시 징이 울렸기 때문이다.

대애엥!

맑고 경쾌한 소리가 방 입구에서 울려 퍼졌다.

도훈이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저 친구들은 그냥 놔두고 우리끼리 다녀오죠.”

“로마에 왔으면…….”

“알았어요. 할머니 집이니까, 할머니 말을 따라야죠. 힘드실 텐데 그냥 저 주세요.”

도훈이 징을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방을 바라보며 힘껏 징을 내려쳤다.

댕!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리였다.

도훈은 갑자기 또 징을 쳤다.

댕!

도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진짜 소리 좋은데요. 매력 있어요.”

“이놈아, 징 부서진다.”

“에이, 한 번만 더 쳐 볼게요.”

댕!

그때였다. 방 안에서 잠들어 있던 이들은 그제서야 반응했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 금발의 사내.

그는 바로 제이든이었다.

제이든을 시작으로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든은 조금 전의 소리가 피곤해서 들리는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제이든은 어젯밤 자정까지 강시혁과 함께 녹음을 진행했다.

데뷔 이후 이렇게 열심히 작업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한국행은 그에게 전환점을 가져다주었다.

나이는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의욕만큼은 신인 시절 때로 돌아가 있었다.

이제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제이든은 그런 자신감의 원천이 도훈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도훈과 있으면 의욕이 샘솟듯 솟아났다.

어제는 거짓 하나 안 보태고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내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녹음에 임했다.

덕분에 진행 중인 곡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여기까지 왔을 때는 손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곳으로 온 이유도 그들이 묶고 있는 호텔로 돌아가기 힘들어서였다.

이곳은 유레카의 스튜디오에서 30분 거리였으니까.

그렇게 정신을 놓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연속으로 들린 소리 덕분에 귀까지 먹먹해졌다.

눈을 뜨자 보인 것은 도훈과 그의 할머니였다.

입꼬리를 올린 표정은 어디선가 많이 봤던 것 같았다.

영화에서 흔히 보는 악덕 교관 그 자체였다.

*    *    *

30분 후, 그들은 뒷산의 약수터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제이든은 아직도 잠이 덜 깼는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줄을 서 있었다.

제이든은 억울하다는 듯 도훈을 바라봤다.

“도훈, 이거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여기에 줄을 서 있어요?”

“약수터잖아요, 당연히 줄을 서서 받아야죠.”

도훈이 앞쪽 줄을 가리키자 제이든이 고개를 흔들었다.

“제 말은 왜 저 물을 받아야 하느냐는 뜻이에요. 그냥 똑같은 물이잖아요.”

“흠, 그게 느낌이 다르다고 할까요? 한번 마셔 보세요.”

도훈이 씩 웃었다.

그때 약수터를 지나가던 아주머니 둘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아이구, 우리 동네 약수터가 글로벌해졌어. 외국인들도 줄을 섰네.”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저 사람 어디선가 본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그들의 대화에 제이든이 고개를 숙였다.

“도훈, 저 사람이 날 알아본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요, 제이든.”

“아니야, 이쪽으로 오고 있잖아.”

“여기에 제이든을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도훈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것도 잠시, 도훈은 그들은 경계하듯 힐끔힐끔 아주머니들을 살폈다.

제이든의 말대로 그들은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다 다를까. 아주머니 한 분이 말을 걸었다.

“혹시, TV에 나왔던 분 아니에요?”

“네?”

“TV에 나왔던 분 맞잖아요. 매니저 하시는 분.”

“하하, 맞습니다.”

“와! TV에서 보던 분을 우리 약수터에서 보네요. 진짜 반가워요.”

“저를 알아보는 분이 계실 줄을 몰랐네요.”

도훈이 어색하게 웃자 아줌마는 재미있다는 듯 손뼉을 쳤다.

짝.

“제 눈이 그렇게 나쁘지 않은데 어떻게 몰라요. 블랙홀의 매니저잖아요.”

“앗, 블랙홀을 아세요?”

“에이, 왜 그래요? 블랙홀을 어떻게 몰라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우리 애가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렇지, 아주 엄마?”

아주머니는 옆을 힐끔 바라봤다.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우리 아주도 매일 그 영상만 본다니까. 그게 뭐더라…….”

“에이, 왜 자꾸 까먹고 그래. 너튜브잖아.”

아주머니가 씩 웃었다.

그 모습에 도훈도 마주 웃었다.

아주머니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날 공연을 기점으로 블랙홀은 어느 정도 이름을 알렸다.

그날까지는 없던 팬카페가 지금은 무려 10개가 넘었다.

우후죽순으로 팬카페가 생겼다는 것은 이제 발판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

그 소리에 아주머니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도훈의 할머니 장경자가 서 있었다.

아주머니들은 갑자기 등장한 낯선 할머니에 당황한 듯 눈치를 살폈다.

예상과는 달리 장경자는 활짝 웃었다.

“제 손자예요.”

“네?”

영문을 모르는 아주머니들이 고개를 갸웃하자 장경자가 말을 이었다.

“얘가 나 손자라고요, 잘생겼죠?”

장경자는 도훈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그 모습에 아주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 매니저님 할머니시구나. 진짜 자랑스러우시겠어요. 노래도 잘하고 일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고……. 앗, 이건 아닌가?”

아주머니는 다급히 입을 막았다.

손자를 자랑하는 할머니에게 맞장구치는 것은 약수터의 미덕이었다.

하지만 너무 오버했다고 느낀 것이다.

장경자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공부도 잘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외국어도 능숙하게 하죠. 봐요, 친구들도 외국 친구들이잖아요.”

장경자는 뉴 키즈의 멤버들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아주머니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들은 잠시 장경자와 시답지 않은 얘기를 나눈 후 돌아갔다.

흔히 볼 수 있는 약수터의 광경.

장경자는 멀어지는 아줌마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장경자의 얼굴은 득도한 고승의 모습이었다.

지금 장경자는 묘하게 가슴이 일렁였다.

미라클의 회장 명함보다 성공한 손자의 할머니라는 것이 그녀를 설레게 한 것이다.

이 설렘을 언제 가져 봤던가?

10년?

아니 20년? 아니 그보다 더 되었을지도 몰랐다.

옆에서 말없이 상황을 바라보던 제이든도 하늘을 올려다봤다.

갑자기 오래전 은퇴를 결정했던 자신들의 행동이 부질없다 느껴진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몰라보자 서운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장경자가 자신들을 도훈의 친구들이라고 하자 그것도 서운했다.

그때 도훈이 제이든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깨가 너무 가벼워도 서운하고 무거우면 힘들고……. 원래 다 그런 거예요. 제이든.”

“하하. 이제 표정까지 읽네요.”

“그럼요. 이곳에 머물 때까지는 내가 제이든의 매니전데요.”

“헉, 그 말 진짜예요?”

“그럼, 왜 제가 제이든을 우리 집에서 재웠겠습니까?”

“와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는데요.”

제이든은 활짝 웃었다.

옆에 있던 뉴 키즈의 멤버들도 웃었다.

장경자는 그들의 대화를 보고는 미소 지었다.

“이제 은퇴할 때가 됐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그때였다.

장경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약수터를 지나가던 아저씨들의 대화가 귀에 박혔기 때문이다.

“자네 그거 들었어?”

“아, 미라클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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