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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주식이라고요?”
“참, 주식은 아니고 뭐라더라? 무슨 화폐에 투자하라고 하던데……. 달러도 아니고 뭐였지. 어쨌든 나도 조금 사 뒀어.”
장경자는 어깨를 으쓱하며 뭔가를 쓱 내밀었다.
도훈은 눈을 크게 떴다.
장경자가 내민 것은 USB였다.
장경자는 USB를 도훈에게 내밀더니 말을 이었다.
“이건 고생한 선물로 줄 테니, 잘 간수해.”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비밀번호라고 하던데.”
장경자는 쪽지를 내밀었다.
순간 도훈의 눈이 커졌다.
화폐, USB 그리고 패스워드를 조합하자 이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도훈의 표정을 본 장경자가 말했다.
“꼭 표정이 내가 잘못했다는…….”
“아,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도훈이 다급하게 손사래 치자 장경자가 웃는다.
“얘기 들어보니 애론인가? 뭔가 하는 친구한테 투자도 한다고 하더구만…….”
도훈은 장경자의 웃음에서 오싹함을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했던 장경자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 대충…….
“아셨어요?”
“그래, 나도 맛 좀 보면 안 되겠나?”
“그쪽 기업이 부채가 좀 있어서요. 할머니는 투자할 때 신용도를 보시잖아요.”
“미래 자동차에서도 그쪽 투자를 검토하고 있던데, 몰랐다면 실망이구나.”
“뭐, 대충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래 자동차와 할머니는 전혀 다르지 않나요?”
“다르다라……. 한번 얘기 좀 들어 보자.”
“미래는 동종 업계 쪽에 투자하는 거잖아요. 같은 밥상에서 반찬도 나눠 먹고 밥이 많으면 서로 덜어 줄 수도 있고…….”
“그래서?”
“투자 금액에서 손실을 봐도 다른 쪽에서 보충할 수 있단 말이죠. 그런데 할머니는 밥상만 차려 주고 구경만 할 수도 있으니, 그게 문제죠.”
“오호. 그럼 너는?”
“저는 그냥 없는 셈 치려고요.”
“없는 셈이라……. 나한테 얼마 전에 거금을 빌려 놓고 속 편한 소리 하는구나.”
“할머니의 선물이 있으니 그건 상관없어요. 할머니가 빌려주신 채권의 만기가 10년 뒤잖아요.”
“이자는 안 내고?”
“이자는 한꺼번에 드리기로 했잖아요.”
“부담스러울 텐데…….”
“괜찮아요.”
도훈은 씩 웃으며 USB를 바라봤다.
암호화 화폐 열풍이 분 것이 아마도 팔 년 후일 것이다.
앞으로 그때 이 USB에 들어있는 암호화 화폐를 정리한다면?
사실 도훈도 돈을 조금 묻어 놨다.
거금을 들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도훈이 바꿔 놓은 연예계 역사만 해도 앞으로 꽤 많은 파문을 낳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암호화 화폐까지 손을 댄다면?
장경자가 준 천만 원이란 금액도 작은 것이 아니었다.
이 천만 원이 팔 년 뒤에는 얼마가 되어 돌아올까?
시장의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면, 시가 총액 100위 안의 기업도 살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될 것이었다.
순간 도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얘기를 들어보면 장경자는 애론 머스크와 자신이 투자 얘기를 주고받은 것까지 알고 있었다.
이세훈이 비밀 금고에 손을 대는 것을 장경자가 모르고 있을까?
그때였다.
엄지연이 다급하게 달려왔다.
“엄 비서야, 바닥 무너지겠다.”
“회장님, 이건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뭔데 그렇게 정신이 없어?”
“일단 보세요.”
엄지연은 TV의 입력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바뀌고 그곳에서는 뉴스 앵커가 흥분한 듯 외치고 있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케이블 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돈뭉치는 과연 누구의 돈일까요? 예전 마늘밭에서 발견된 돈뭉치보다 더 많은 양의 화폐가…….
앵커는 쉬지 않고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이건 도훈의 큰아버지, 즉 이세훈이 벌인 일이 틀림 없었다.
도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제라도 119에 연락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장경자가 쓰러진다면 분명히 이 타이밍이 될 것이 뻔했다.
자신의 돈이 모두 날아간 상황에서 멀쩡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힐끔 옆을 보니 엄지연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엄지연은 비밀 금고의 존재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도훈이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엄 비서야, 저건 왜 나를 보라고 했나?”
“네?”
“저게 뭔 대수라고 호들갑을 떠냔 말이다.”
“회장님, 저건…….”
“치워라, 뭐 저런 푼돈 가지고 호들갑 떨 거면 산책이나 가자.”
“아, 죄송합니다. 회장님. 산책 준비할게요.”
엄지연은 재빨리 이 층으로 올라갔다.
그 모습에 도훈은 석상이 된 채 장경자를 응시했다.
정작 충격은 도훈이 받았다.
이번 사건이 장경자를 쓰러지게 만든 주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건 도훈의 착각이었다.
그렇다면 장경자를 쓰러지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도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할머니, 내일 저랑 건강검진 받으러 가요.”
“허허, 그 표정하고 대체 무슨 일이지?”
“할머니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죠.”
“날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한발 늦었다.”
“늦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난주에 받고 왔어.”
“한 번 더 받으시죠.”
“예끼, 지난주에도 힘들어서 죽을 뻔했는데, 그 짓을 또 하라고?”
“어느 병원에서 받으신 거죠?”
“오성 의료원에서 받았다.”
“아, 잘하셨어요.”
도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번 의심이 싹트자 쉴 틈 없이 생각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미라클 그룹과 관련이 있는 병원이라면 장경자의 건강을 믿고 맡길 수 없었다.
이세훈의 입김이 들어갈지도 모르니 말이다.
다행히 오성 병원은 미라클과 관련 없는 의료재단이었다.
그때 장경자가 말을 이었다.
“대충 들었으니 너도 저게 내 돈인 줄 알겠지?”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왜 아무렇지도 않으신 거죠?”
“나는 저따위 돈보다 추억이 더 소중하단다.”
“…….”
“예를 들어 오늘 같은 추억 말이다.”
도훈은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됩니다. 할머니.”
“뭐가 이해가 안 되지?”
“할머니의 가치관에서 돈이 최고였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추억이 최고라니 약간은 혼란스러워서요.”
“돈이란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무기지. 너는 전쟁터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니?”
“…….”
“총 혹은 칼? 뭐, 무기가 가장 중요하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사람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도구란다.”
“도구라……. 네, 이해했습니다.”
“그래. 도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지.”
“네, 그렇다고 전쟁터에서 총을 뺏기는 사람도 없겠죠.”
“그래. 그래서 내가 돈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거지. 그런데 저건!”
장경자가 화면을 가리켰다.
화면에서는 아직도 앵커가 산자락에서 발견된 현금 뭉치에 대한 멘트를 이어 가고 있었다.
이제는 현장에 나가 있는 기자까지 출연한 상태.
그들은 산자락에서 발견된 원화와 달러 뭉치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힐끔 화면을 보던 장경자가 말을 이었다.
“저건 고장 난 총에 불과하지. 방아쇠는 낡아서 누르기만 해도 부러지고…….”
“흠, 그건 맞는 말이에요. 탄창은 제가 비워 놨으니까요. 그런데 부러질 방아쇠라는 건 조금 이해가 안 가네요.”
도훈이 고개를 갸웃하자 장경자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뭐라고 했지? 탄창을 비워 놨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별건 아니에요. 그냥 할머니의 금고에서 대부분의 돈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놨어요.”
“흠.”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아니 잘했다. 나도 거를 놈은 이참에 거르고 싶다, 휴.”
한숨을 쉬는 장경자에게 도훈은 열쇠 하나를 건넸다.
“이건 제 선물이에요.”
“혹시…….”
“네, 옮겨 놓은 창고의 열쇠예요. 이건 그 주소고요. 할머니가 제게 선물을 주셨으니 저도 보답을 하는 게 맞잖아요. 그리고 혹시라도 큰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으시면 지금 연락하셔도 돼요.”
“그게 무슨 말이더냐?”
“아마 저 금고에 있는 돈을 빼돌렸을 거예요. 뉴스에 나온 돈은 일부에 불과하고요. 그런데 문제는 큰아버지가 빼돌린 돈이, 독 묻은 성배라는 거죠.”
“독이 묻은 성배라…….”
장경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모습에 도훈이 말을 이었다.
“큰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으시면, 지금이라도 그 돈을 모두 태우라고 하세요. 언젠가는 발목을 잡을 테니까요.”
“그럼, 용서하기 싫으면?”
“선을 그으세요. 언젠가는 할머니를 해칠 사람이잖아요. 그게 핏줄이든 남이든 중요하지 않죠. 차라리 피 한 방울 안 섞인 엄 비서님이 더 가족 같잖아요.”
“허허, 많이 컸구나.”
“그럼 저는 그만 일어나 볼게요. 그리고 남은 공연에도 꼭 나와 주세요. 남은 공연은 티켓은 민국이를 통해서 보낼게요.”
“티켓이라고?”
“어제 일을 너무 크게 벌여서요. 다음 장소부터는 사람들이 미어터질 것 같아요. 최대한 비공개로 하고는 있는데…….”
도훈이 뒷머리를 긁적이자 장경자가 웃었다.
“알았으니 그만 가 보거라.”
“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훈이 고개를 숙이자 장경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장경자의 집에서 나온 도훈은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추억이라…….”
순간 도훈의 시선이 조용히 돌아갔다.
추억이라는 단어와 연관된 장소가 기억났기 때문이다.
장경자가 도훈에게 준 창고가 문득 떠올랐다.
그곳은 장경자의 집에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도훈은 재빨리 내비게이션을 눌렀다.
그곳에는 최근 방문지가 나와 있었다.
도훈은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30분 정도 차를 몰고 가자 숲이 우거진 시골길이 나왔다.
밤에 오나 낮에 오나 후미진 것은 똑같았다.
도훈은 차를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창고에 세웠다.
갑자기 낯선 차가 서자 창고 경비원으로 보이는 이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아이고, 거기 세우시면 안 됩…….”
경비원이 말끝을 흐렸다.
도훈이 갑자기 지갑을 꺼냈기 때문이다.
지갑 속에는 몇 장의 봉투가 들어 있었다.
마치 경조사를 위해 준비한 봉투 같았다.
사실, 이것은 차비를 넣어 놓은 봉투였다.
이 봉투를 받을 대상은 다름 아닌 기자들이었다.
현장에 블랙홀을 취재하러 나온 기자 혹은 유레카를 방문해서 취재하러 나온 기자에게 전달하는 차량비였다.
도훈은 그들에게 줄 차량비를 항상 지갑에 넣어 놓고 다녔다.
단 몇만 원에 기사의 질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 도훈은 그들에게 줄 차비를 항상 챙겼다.
이제는 챙겨야 할 대상이 약간 달라졌을 뿐이다.
도훈은 봉투를 경비원에게 건넸다.
“안녕하세요. 자주 인사를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 그때 그 선생님이시군요. 또 안 주셔도 되는데.”
“저희 창고가 외딴곳에 있어서 걱정도 되고…….”
도훈은 경비원의 주머니에 차비를 찔러주었다.
경비원이 마지 못해 받으며 뒤쪽을 가리켰다.
“아이고, 제가 항상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참, 그러지 않아도 제가 연락 한번 드리려고 했는데요.”
“네? 무슨 일이라도…….”
“사장님 창고를 누가 감시하는 것 같아서요. 어슬렁거리기에 제가 갔더니 후다닥 내빼더라고요. 조금 이상한 것이 등산객도 아니고 번지르르하게 양복은 쫙 빼입은 신사 양반이…….”
그의 설명은 꽤나 구체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