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주현빈이 고민하는 사이에 그의 파트가 돌아왔다.
“…….”
주현빈의 입에서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블랙홀 멤버 모두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다.
순간 주현빈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자신은 입만 뻥끗하고 있는데 스피커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와 나의 비트.
―히얼 히얼. 노노. 마음으로 들어줘!
주현빈은 긴 다리를 쓰윽 옆으로 밀며 센터 라인에서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어딘가를 힐끔 바라봤다.
그들의 목소리에 관중은 일제히 일어났다.
장소담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응원봉을 마구 흔들어 대고 있었다.
한참을 열중하던 장소담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친구 윤장미가 태블릿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소함은 황당한 표정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너, 지금 뭐 해?”
“메모하고 있잖아.”
“무슨 메모?”
“블랙홀에 대한 분석.”
“허허, 해설충 아니랄까 봐…….”
“지금, 이건 진짜 중요한 문제거든.”
“무슨 문젠데?”
“지금 보컬 파트에서 문제가 생겼어.”
“내가 듣기에는 멀쩡한데?”
“그러니까, 문제지.”
“멀쩡하게 잘 노래하는데 그게 왜 문제야?”
“문제가 생겼는데, 다른 멤버 하나가 커버 쳤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저기 주현빈이 립싱크했거든.”
“립싱크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무슨 문제인지 잠시 목소리를 내지 못했어. 그런데 멤버 중 그걸 알고 대신 그 파트를 소화한 거야. 사실 이건 다른 그룹 라이브에서도 가끔은 있는 일이거든.”
“…….”
장소담은 입을 딱 벌린 채 아무런 말도 못 했다.
이건 해설충을 넘어서 스나이퍼였다.
거기에 더해서 멤버의 이름을 알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때 윤장미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로 호흡이 맞는 그룹은 대부분이 십 년 정도는 호흡을 맞춘 친구들이야. 그런데 지금 무대에 있는 블랙홀은 갓 데뷔한 신인이라는 점이지.”
“헉, 너무 파고 들어간 거 아니야?”
“문제는 하나가 더 있어.”
“또 뭐가 문제인데? 예상문제야? 기출문제야?”
“에이, 농담하지 말고, 이건 심각한 문제야. 내가 자세히 봤는데, 주현빈의 목소리 대타를 찾을 수 없었어. 주현빈이 립싱크를 할 때 입을 연 멤버는 없었거든.”
“헉, 그게 무슨 말이야? 귀신이 불렀단 말이야?”
“그럴지도…….”
“야, 오싹하게 왜 그래?”
“그게 아니라면 식스맨이 있을 수도 있어.”
“식스맨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농구에서 보면 주전과 같은 벤치 멤버 있잖아.”
“식스맨이라…….”
“나는 그 식스맨을 찾고 싶어. 내가 풀지 못한 문제는 없었는데 좀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
“해답을 알기 위해서는 적진으로 뛰어들어야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난 팬클럽 회장이 되겠어.”
“헉.”
“팬클럽 회장이 되면 블랙홀과 가까워지겠지…….”
“아.”
장소담은 입을 딱 벌리고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윤장미를 바라봤다.
그 옆에 있던 윤장미의 누나 윤선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마치 동생 윤장미의 이론이 일리 있다는 표정이었다.
* * *
블랙홀의 마지막 곡이었던, ‘비트’가 끝나자 유재성은 그제야 숨을 쉬었다.
“시, 실장님, 지금 뭐한 거예요?”
“잠시 백업 멤버가 됐습니다.”
“아, 왜 실장님이 노래를 불러요? 그리고 나머지 멤버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재성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이런 광경은 무대 인생 이십 년 만에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유재성은 조용히 무대를 바라봤다.
블랙홀 멤버들은 객석을 향해 정중하고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것은 신인에게만 볼 수 있는 인사였다.
그들은 간절한 눈빛을 담아 관중에게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서찬휘의 짧은 인사와 함께 블랙홀 멤버들은 무대에서 빠져나왔다.
무대를 빠져나온 그들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역시나 도훈이 있는 곳이었다.
그중 주현빈은 마치 경주마처럼 달려왔다.
온 힘을 다해 달려온 그는 도훈의 앞에 멈췄다.
주현빈의 큰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무너진 둑처럼 그는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그 모습에 도훈이 말했다.
“왜 그래?”
“헉,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뭐가?”
도훈이 어깨를 으쓱하자 서찬휘가 나섰다.
“아까 현빈이가 실수했을 때 나왔던 목소리가…….”
“그래, 내가 맞아.”
“대체 어떻게 그 타이밍에 딱 맞춰서 들어오신 거예요?”
“흠, 감이라고 할까? 바로 전에 현빈이의 호흡이 살짝 거칠어지더라.”
“헉.”
서찬휘가 입을 벌렸다.
물론 옆에서 대화를 듣던 유재성도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진행 요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재성 씨, 무대로요.”
“네, 알겠습니다.”
유재성은 재빨리 무대를 향해 뛰어갔다.
이제 그의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뛰어가면서도 도훈을 바라봤다.
“이따 꼭 얘기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도훈은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만들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뒤통수가 뜨끈뜨끈해진 도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황수영이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도훈이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돼요. 분명히 아무런 계획 없이 여기 온 것 같은데, 갑자기 유재성 씨의 마이크를 뺏은 것도 그렇고…….”
황수영은 속사포 랩을 쏟아 냈다.
숨도 쉬지 않고 질문을 쏟아 내는 황수영을 블랙홀 멤버들이 말렸다.
“누나, 일정 진정하시고.”
서찬휘가 나서서 황수영을 말렸다.
“아니 싸우자는 게 아니라, 도저히 이해가 안 되잖아. 어떻게 타이밍이 그렇게 딱 맞아?”
“우린, 실장 형이랑 영혼이 연결돼 있어요.”
우시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모습에 황수영은 말을 못 이었다.
그저 입을 벌린 채 조용히 우시원과 도훈을 번갈아 바라봤다.
서찬휘가 황당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걸 믿는 건 아니죠? 누나.”
“아, 안 믿지.”
황수영은 다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누가 봐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이제 두 번째 게스트가 무대에 오를 차례였다.
이제는 잠시 무대를 비워 줘야 할 타이밍이 온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도훈은 장경자의 집으로 향했다.
벨을 누르기도 전에 엄지연이 문을 벌컥 열었다.
“조용히 들어오세요.”
“무슨 일 있나요? 혹시 할머니가 어제 너무 무리하신 건 아니에요?”
“그건 아니에요.”
“그런데 표정이 좀…….”
도훈은 엄지연의 얼굴을 가리켰다.
도훈의 말대로 엄지연의 표정은 심각해 보였다.
엄지연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엄지연은 도훈을 저택의 거실로 이끌었다.
거실로 들어서자 갑자기 환호성이 들린다.
소리는 TV에서 나오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어제의 공연이 재생되고 있었다.
도훈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공연이 끝나고 녹화 영상을 장경자에게 건넸다.
편집본이 아니라 정면을 찍은 메인 카메라 영상 그대로였다.
덕분에 객석에 앉아서 공연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드는 영상이었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장경자가 부탁해서 준 것이었다.
도훈은 대충 상황을 알 것 같았다.
공연을 감상하는 장경자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엄지연의 배려 같았다.
그때 엄지연이 작게 속삭였다.
“새벽부터 저러고 계세요.”
“헉.”
도훈의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컸는지 장경자가 고개를 돌렸다.
장경자의 눈은 시뻘게져 있었다.
마치 토끼 눈인지 사람 눈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도훈이 왔구나.”
“네, 저 왔어요. 그런데 눈이 왜 그러세요?”
“내 눈이 왜?”
장경자는 무슨 말인지 모른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도훈이 다급하게 한발 다가갔다.
“눈이 빨개요. 대체 언제부터 본 거예요?”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고 한 세 번은 봤나?”
장경자가 피식 웃었다.
“와, 그러다 쓰러지시면 어떻게 하려고요.”
“내가 왜 쓰러져.”
“아무리 그래도…….”
“걱정하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장경자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도훈이 자리에 앉자 장경자는 다시 영상을 재생시켰다.
영상에서는 어제의 공연 마지막 부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블랙홀과 뉴 키즈의 합동 공연이었다.
뉴 키즈의 다섯 명과 블랙홀의 다섯 명이 무대에 서 있자 화면이 꽉 찬 느낌이었다.
카메라의 아랫부분은 객석.
위쪽은 무대.
공연장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앵글이었다.
영상을 바라보던 도훈은 눈을 크게 떴다.
관중의 반응 때문이었다.
공연 내내 관객들은 일어나서 어깨를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리고 쉬지 않고 응원봉을 흔들었다.
도훈은 그들의 행동이 뉴 키즈를 향한 것만이 아닌 것을 알았다.
뉴 키즈가 관중에게 향수를 불러일으켰다면, 블랙홀은 새로움을 주고 있었다.
신구 세대 보이그룹의 공연은 한마디로 신선한 쇼였다.
즉,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도 신선한 쇼를 펼쳐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이다.
다시 봐도 심장이 쿵쿵 뛰는 장면이었다.
마지막은 사실 도훈의 버프가 없이 그들의 힘으로 해낸 무대였기에 더욱 뜻깊었다.
내비게이션이 가르쳐 준 경로는 딱 두 가지였다.
도훈은 그 경로로 그들이 갈 수 있도록 인도했다.
만약 그때 내비게이션 스킬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주현빈은 바로 의지를 잃었을 것이 분명했다.
계속 활동을 이어 가는 그룹이라면, 그 슬럼프를 기다려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막 데뷔한 신인의 경우에는 조금 심각했다.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객석은 흥분한 팬들로 가득 차 있다.
이제 그들은 관객이 아니라 팬이 되었다.
뉴 키즈의 팬이자 블랙홀의 팬이었다.
팬들은 음악의 박자에 맞춰 응원봉을 흔든다.
응원봉은 다채로운 빛을 객석에 뿌렸다.
그것은 마치 바다 같았다.
이렇게 보니, 블랙홀 멤버가 바다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도훈은 그 모습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장경자는 도훈의 간곡한 부탁으로 시청을 멈췄다.
식탁에 앉은 장경자는 아직도 입맛을 다시고 있다.
도훈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참, 어제 애론 씨와는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하신 거예요?”
“아, 그 사투리 쓰는 코쟁이 양반?”
장경자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어제 공연이 끝나고 도훈은 회식 자리를 마련했다.
고생한 제작진들과 뉴 키즈 그리고 블랙홀이 참석한 자리였다.
사실 모든 것은 장경자를 위한 자리였다.
그런데 장경자는 뜻밖의 손님을 데려왔다.
그것은 바로 애론이었다.
애론과는 따로 만나려고 했는데 장경자가 자신의 손님이라면서 데려온 것이다.
장경자는 애론과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네,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친해지신 거예요?”
“우연히 옆에 앉았는데 생각보다 진국이더라고.”
“진국이요?”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데 우리랑 다를 게 없더라고. 같이 응원하다 보니 친해졌지. 사람은 좋은데 조금…….”
“혹시 투자하라고 하던가요?”
“투자 얘기는 없었는데, 그러고 보니…… 투자는 아닌데, 유망한 주식이 있다고 사라고 하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