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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든의 도훈의 제안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뉴 키즈는 80년대부터 결성된 그룹.
함께한 멤버들과 소화시키지 못할 곡은 세상에 없었다.
안무도 같이해야 한다는데, 전성기 시절 그들보다 더 춤을 잘 추는 그룹이 있었던가?
제이든은 젊은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흔쾌히 조건을 수락하고 원하는 곡을 골랐다.
이것이 실수였다.
도훈은 조금 더 높은 수준을 원했다.
블랙홀과의 합동 공연에서의 역할은 게스트였다.
그런데 왜 게스트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지…….
제이든은 생각을 이어 가지 못했다.
그의 귓가에 서슬 퍼런 목소리가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스탑. 제가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요? 센터에 나와 있는 제이든은 동작을 두 배로! 나머지는 움직임을 줄이세요. 그리고…….”
지금 그들의 안무를 교정해 주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신서희였다.
신서희는 까다로운 선생님이었다.
단 5분만 블랙홀과 안무를 맞추면 되었다.
그 무대의 주인공은 블랙홀이고 뉴 키즈는 그저 얼굴만 비추면 되니까.
그런데 대략적인 동선을 가르쳐 주겠다는 신서희라는 선생은 단 1센티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건 마치 데뷔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묘하게 짜증이 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제이든은 나머지 멤버를 힐끔 바라봤다.
모두들 무대를 즐기던 10대 시절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원, 투, 쓰리! 거기에 두 번째 줄만 턴!”
신서희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제이든이 신서희의 말에 순순히 따르는 데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제이든은 신서희의 현역 시절 공연을 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파리로 놀러 갔을 때 같았다.
중력을 무시하며 우아한 곡선을 그리던 그녀의 동작을 제이든은 잊을 수 없었다.
은퇴해서는 유명 안무가로 자리를 잡았지만, 그녀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때는 이미 뉴 키즈가 해산한 이후였으니.
그녀에게 안무를 지도받을 일은 영영 없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지금 이렇게 땀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제이든은 힐끔 옆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그가 찾는 사람은 도훈이었다.
조금 전까지 옆에서 자신을 지켜보던 도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신서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마이갓. 제이든! 정신을 어디에다 두는 거예요!”
그녀의 호통에 제이든은 재빨리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 * *
도훈은 내비게이션의 다음 경로를 수행하기 위해 무대 뒤로 걸어갔다.
천천히 걸어가는 도훈의 뒤로 황수영이 쪼르륵 따라왔다.
“아쉽네요, 도훈 씨.”
둘이 있을 때는 실장이란 호칭보다는 이름을 부른다.
이제는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사업 파트너가 되었으니까.
도훈이 물었다.
“뭐가요? 수영 씨.”
“저는 뉴 키즈와 도훈 씨의 공연을 보고 싶었거든요.”
“헉.”
“약속을 잊으신 건 아니죠?”
“그야 당연하죠. 약속은 약속이니까요.”
“그럼 됐어요. 그런데 어디 가시는 거예요?”
“우리 애들 확인해야죠.”
“그런데 표정이 조금…….”
황수영이 손가락으로 도훈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녀의 말대로 도훈의 얼굴을 살짝 굳어 있었다.
도훈이 재빨리 손을 저었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뭔가 수상한데요?”
황수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도훈의 뒤를 따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무대 뒤쪽으로 도착한 도훈은 진행 요원에게 말했다.
잠시 좀 들어가겠습니다.
도훈을 알아본 진행 요원이 고개를 숙였다.
도훈은 팔짱을 끼고 무대를 바라보는 유재성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재성 씨.”
“앗, 이 실장님. 아까는 고마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도리어 고마워해야죠.”
“참, 그 약속은 유효한 거죠?”
“당연하죠.”
“와. 저 엄청 기대하고 있는 거 아시죠?”
“표정에서 보입니다.”
“제가 뉴 키즈와 식사를 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네요. TV에서만 보던 사람들인데…….”
“뉴 키즈도 유재성 씨 좋아한대요.”
“헉, 저를 어떻게 알고요?”
“미국에서도 한국의 몇몇 프로그램은 인기가 있잖아요.”
“헉, 막 가슴이 뛰려고 하는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죠.”
말을 마친 유재성은 무대 위를 누비는 블랙홀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도훈이 물었다.
“우리 애들은 어때요?”
“오디션 출신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다른데요. 데뷔 무대라고 느껴지지 않아요. 정확히 말하면 데뷔는 아니죠. 방송에서 무대를 한 적이 있으니까요, 하하.”
“네, 맞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제가 만나 본 아이돌 중에는 손에 꼽을 정도네요. 나중에 우리 프로그램에 섭외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진짜로요?”
“네, 그건 제가 피디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도훈은 유재성과 이야기꽃을 피웠다.
옆에서 지켜보던 황수영은 지금 상황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뭔가 걱정이 있어 보였다.
그런데 막상 무대의 사이드 도착하자 갑자기 영업을 뛰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말이다.
황수영은 도훈의 매니저를 자처한 것을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미스트를 비롯한 국내 그룹의 덕질에 빠졌던 것은 회사 일에 관심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너무 뻔한 일상에 지쳐서였다.
회사의 일부를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누구도 그녀에게 직언을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녀도 누군가의 간섭을 받을 만큼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았다.
세상은 그런 사람을 천재라고 한다.
그녀는 업무에 있어서만큼은 천재였다.
남들이 일주일 걸릴 업무를 단 2시간이면 끝낼 정도로 업무에 능숙했다.
덕분에 그녀의 가족도 그녀가 덕질하는 것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의외성이 가장 많은 곳이 바로 아이돌 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아이돌 판은 경제계의 축소판이었다.
한해에도 수많은 회사들이 생겨난다.
어느 해는 생겨나는 회사보다 폐업하는 회사도 많다.
대한민국을 호령하던 기업이 오너의 실수로 문을 닫을 때도 있다.
아아돌도 마찬가지였다.
수백 개의 그룹이 생겼다가 소리 없이 사라진다.
몇 해에 걸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일어나는 사이클이다.
그중 몇은 자리를 잡고 팬덤을 구축해 나아간다.
기업이 신뢰를 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다만, 기업보다도 의외성이 많다.
기업보다 그 움직임이 다이나믹하다.
황수영이 아이돌판에 열광한 것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 내는 가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예상도 못 할 가치를 지닌 원석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도훈이었다.
황수영은 도훈을 데뷔시키고 말 것이다.
그리고 대중이 매기는 그의 가치를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도훈을 매니지하면서 다른 하나의 욕심이 생겼다.
그것은 매니저로서의 도훈도 궁금해졌다는 점이다.
누군가를 키운다는 것은 숨은 가치를 찾아내는 것 이상일지도 몰랐다.
황수영이 봤을 때 도훈은 숨겨진 가치를 찾아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가치를 창조해 내는 사람이었다.
매니지를 할 때도 그렇고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그랬다.
황수영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황수영의 부담스러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훈은 유재성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제 두 번째 곡이 끝나고 세 번째 곡이 이어진다.
강한 일렉기타의 전주가 초반부터 작렬하는 곡이다.
지이잉! 드드등!
마치 록 밴드가 무대에 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노래의 제목은 비트.
고양미가 작곡하고 도훈이 편곡한 곡이었다.
도훈이 가장 기대하는 곡 중 하나였다.
도훈은 이 곡이 대중에게 어떻게 평가를 받을지 궁금했다.
전생의 기억으로 이 곡은 고양미 작곡가의 스테디셀러였다.
당시 한 음악 평론가는 이곳이 딱 오 년만 일찍 나왔으면 세계에서도 먹혔을 것이라고 평했다.
이 평은 직설적으로 말하면 유행에 뒤처졌다는 말이었다.
당시에는 뒤처졌지만, 지금이라면 어떨까?
정확히 이 곡은 도훈의 기억보다 6년 일찍 나왔다.
일렉 사운드에 강렬한 비트.
현재 기준으로는 앞으로 미국과 유럽 쪽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이었다.
음악 평론가의 말대로라면 이 곡은 세계적으로 알려질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이 곡의 가장 큰 문제는 보컬 부분이었다.
사운드와 랩에 의존하는 듯한 전반부가 끝나면 찌르는 고음을 뿜어내야 하는 킬링 파트로 넘어간다.
우시원이 중심이 되고 나머지 멤버가 돌아가면서 파트를 소화해야 한다.
물론 연습 때에는 라이브로 진행하기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도훈은 유재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재성 씨, 마이크 좀 부탁드립니다.”
“마이크는 왜요?”
“그냥 궁금해서요.”
도훈의 말에 유재성이 아무 의심 없이 마이크를 넘겼다.
“여기요.”
“고마워요, 재성 씨.”
도훈이 마이크를 만지자 유재성이 깜짝 놀라 손바닥을 보였다.
“참, 그 마이크 연결된 거예요. 지금 켜시면 안 돼요.”
“에이, 제가 그런 실수할 사람처럼 보이세요?”
도훈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자 유재성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죠. 이 실장님 보면 그런 실수하실 분이 아니죠.”
“네.”
고개를 끄덕인 도훈은 마이클 주저 없이 마이크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순간 유재성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 * *
주현빈은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지금 소화하고 있는 ‘비트’란 곡은 템포가 너무 빨랐다.
신서희의 혹독한 훈련, 아니 레슨이 아니었다면 이 곡에 맞춰 춤을 춘다는 것은 꿈도 못꿀 것이다.
‘헉, 헉.’
숨이 차올랐지만, 표시 낼 수는 없었다.
주현빈은 차오르는 숨을 다시 넘기며 수습했다.
사실 안무 자체는 연습할 때보다도 부드럽게 이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보컬 쪽이었다.
이렇게 숨이 차오르는 데, 과연 음 이탈 없이 소화할 수 있을까.
그때 다른 멤버들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렇게 바래.
―내가 너를 원해!
―강렬한 비트에 맞춰!
―비트, 비트.
따다다단, 따다.
점점 빨라지는 반주에 음도 점점 올라간다.
이제는 주현빈의 차례였다.
턴을 하며 센터 쪽으로 방향을 튼 주현빈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갑자기 호흡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거기에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벌써 화음을 넣을 부분이 스킵되었다.
다행히도 그 부분은 다른 멤버들의 목소리에 묻혀 별로 티가 나지 않았다.
화음 파트를 맡은 것은 주현빈 말고 박수호도 있었다.
하지만 명백한 실수였다.
가장 큰 문제는 갑자기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
순간 주현빈의 눈앞에 관중의 예상 반응이 그려졌다.
신인은 역시 신인이라면 고개를 내젓는 모습.
한숨을 쉬는 모습.
연습 부족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모습.
사실 주현빈에게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그곳은 바로 중학교 시절 합창 대회 때 일이었다.
합창부의 지도를 맡았던 음악 선생님은 주현빈에게 솔로 파트를 맡겼다.
문제는 연습에서 무리 없이 파트를 소화했지만, 대회 당일 실수로 몇 개월간이 노력이 물거품 되었다는 것이다.
결과에 대해서 혼자 책임지면 이렇게 트라우마로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