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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성의 대답에 박창성은 잽싸게 물었다.
“바쁘실 텐데 여기 진행을 맡기 위해서 다른 스케줄을 다 뺐다고요.”
“그만큼 저한테는 의미가 있으니까요. 생각해 보세요. 어렸을 때 TV를 보면서 설렜던 탑스타와 한 무대에 선다는 게 어떤 기분일 것 같아요?”
“지금 충분히 그런 기분을 느끼고 계시잖아요.”
박창성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모습에 유재성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은 달라요. 진짜 이런 기회는 흔치 않아요.”
“유재성 씨가 진행하는 무대에 서지 않은 대한민국 탑스타가 몇이나 있을까요? 그런데 이게 기회라고요?”
“그럼 기회죠.”
“조금 이상한데요.”
박창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유재성이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제가 이제까지 무대에 같이 서 본 스타가 아니에요.”
“그럼 혹시 원로분인가요? 아! 그러고 보니 그게 말이 되네요. 원로 가수분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죠. 설마…….”
박창성은 눈을 가늘게 떨었다.
‘추억을 소환하라’는 임제호의 프로젝트였지만, 중요한 것은 아이돌메이커의 주인공인 블랙홀의 무대이기도 했다.
“박 피디님, 눈치채셨나 봐요.”
“네, 대충 눈치챘어요. 조영필 선생님이 나오는 거 아닌가요?”
“앗, 왜 그런 생각을…….”
유재성이 당황한 듯 마구 손을 흔들자, 박창성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아닌가요?”
“아닌데요.”
“그럼, 대체 누구길래 재성 씨가 스케줄을 다 제쳐 놓고 달려온 건가요?”
“그런데 이거 재미있네요.”
“뭐가 재미있습니까?”
“마치 스무고개 같잖아요. 비밀이라고 들었는데 정말인가 보네요, 하하.”
유재성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자 박창성이 입을 쑥 내밀었다.
“아, 왜 놀리고 그러세요?”
그 모습에 유재성이 말을 이었다.
“피디님, 삐진 척하지 말고요. 한번 맞혀 보세요. 만약에 맞히시면 피디님이 연출하는 프로그램에 출연 약속드립니다.”
“흠…… 지금 하신 말씀 진짜죠.”
박창성은 턱을 매만지며 유재성을 바라봤다.
“아, 왜 사람 말을 못 믿고 그래요.”
“가벼운 내기치고는 보상이 너무 좋으니까 그렇죠.”
“아마도 절대 예상 못 한 스타일 겁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2000년대 스타가 절대 아닙니다.”
“네?”
박창성은 유재성과 임제호를 번갈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임제호는 고개를 돌렸다.
정답을 알려 주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박창성은 한숨을 내쉬며 유재성과 스무고개를 시작했다.
그 후, 꽤 많은 스타들의 이름이 나왔지만, 박창성은 결국은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휴.”
한숨을 내쉰 박창성은 커피 자판기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재성이 낸 문제는 풀 수가 없었다.
90년대부터 활동했던 스타들의 이름을 모조리 꺼냈지만, 정답이 아니었다.
박창성은 피식 웃었다.
오늘 무대에 유재성이 사회를 보는 것만으로도 화재성은 충분했다.
뒤에 나올 스타가 누구든지 그건 뒤의 일이었다.
커피를 홀짝이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커피 자판기 앞으로 다가왔다.
자세히 보니 시청의 홍보팀장인 김기훈이었다.
그는 커피 자판기 앞에서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아마도 동전이 없는 듯 보였다.
박창성은 씩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이거 쓰세요.”
“아, 박 피디님!”
“일찍 나오셨네요.”
“아무래도 제가 무대를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그러지 않아도 찾아뵈려고 하던 참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무대를 만드신 거예요? 그것도 며칠 만에…….”
김기훈이 무대 쪽을 가리키자 박창성은 손을 내저었다.
“저희 협력 업체 쪽이 일을 잘하는 편입니다.”
“케이넷이 외국 협력 업체를 쓰고 계신지는 전혀 몰랐어요.”
“뭐, 저희야 실력을 보고 쓰니까요.”
박창성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박창성이 아는 바는 없었다.
도훈이 앞뒤 안 보고 무대에 투자한 결과물이니까.
커피를 마시고 뒤돌아서려던 김기훈은 무대 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저분 말이에요. 누구랑 많이 닮은 것 같지 않아요?”
“아, 유재성 씨요.”
“너무 똑같죠? 누가 보면 오해하겠어요.”
“유재성 씨 맞는데요.”
“네?”
“저도 방금 보고 깜짝 놀랐어요.”
“혹시 오늘 진행을 유재성 씨가 맡은 거예요?”
“네.”
“유재성 씨 행사 단가가 엄청 센데…….”
김기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 있는 유재성을 바라봤다.
“그냥 진행 맡으신 거래요.”
“아, 박 피디님이 MBS에 계셨다고 하셨죠? 친분이 있으신가 봐요?”
“친분 때문이 아니라 오늘 공연할 가수 때문이래요.”
“가수요?”
“유재성 씨가 가장 좋아하는 탑스타 중 한 명이라고……. 맞다. 한 명이라고는 안 했네요. 그러니 그룹일 수도 있죠.”
“탑스타가 출연한다고 그게 말이 되나요? 지금 연말이라서 한창 바쁠 때잖아요. 그런데 스케줄도 다 때려치우고 이쪽으로 온다고요?”
“그랬다네요.”
“대체 누군데 그래요?”
“그건 저도 몰라요.”
“아, 팀장님, 저 못 믿으세요? 비밀은 지킬 테니까, 가르쳐 주세요.”
“진짜 몰라요, 일단 조영필 선생님은 아니에요. 그리고…….”
박창성은 유재성에게 말했던 이름을 쭉 읊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나타난 외국인 중년 사내들이 커피 자판기 앞에 나타났다.
그중 하나가 박창성에게 물었다.
“미스터 임이 누군가요?”
“미스터 임이라면…… 임제호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박창성이 어눌한 영어로 답하자 외국인 사내가 손뼉을 쳤다.
“맞아요, 바로 그분이에요.”
“저쪽 무대 보이시죠. 검은색 파카 입고 계신 분이 당신이 찾는 미스터 임이에요.”
“땡큐,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외국인 사내는 무리로 돌아가서 그들을 데리고 무대 쪽으로 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박창성이 어깨를 으쓱하며 김기훈을 바라봤다.
“보셨죠, 저희 회사가 이렇게 글로벌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 외국인들 말이에요.”
“네, 말씀하세요.”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으세요?”
“뭐, 무대에 관련된 기사님들 중 하나겠죠.”
박창성은 고개를 흔들었다.
박창성이 보기에 그들은 이곳에서 일하는 외국인 중 하나였다.
* * *
그날 오후 박창성은 제작진들과 함께 심호흡하고 있는 블랙홀 멤버들을 찍고 있었다.
조그마한 간이 천막은 블랙홀의 대기실로 쓰는 공간이었다.
조그마한 공간 안에 조명과 카메라가 얼마나 많은지 후끈후끈할 정도였다.
그때 박창성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난로가 필요 없겠죠? 피디님.”
“아, 이 실장님 오셨네요.”
“아침부터 나오셨다고 하던데 고생 많으셨어요, 피디님.”
“아닙니다. 그건 그렇고 메인 무대에 설 탑스타가 대체 누군가요?”
“아까 인사 못 나누셨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실장님.”
“아까 도착했다고 들었는데요.”
“아까 도착했다고요?”
박창성이 고개를 갸웃하자 도훈이 말했다.
“지금 순서가 왔을 테니 목소리 들어보시면 알 거예요.”
“실장님까지 왜 그래요?”
“에이, 지금은 우리 블랙홀에 신경 써 주셔야 할 때잖아요.”
도훈은 심호흡하고 있는 블랙홀의 멤버들을 가리켰다.
평소에 방방 날뛰던 서찬휘마저도 계속 크게 심호흡하며 감정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도훈이 다가갔다.
“서찬휘. 그렇게 긴장하는 모습이 영 안 어울리네.”
“첫 무대잖아요. 그러니까 당연히 떨리죠.”
“솔직히 오디션 프로그램이 더 떨리지 않아?”
“그때야 카메라니까, 실수해도 편집해 주겠거니 했고 오늘은 라이브잖아요.”
“뭐, 그것도 말 되네.”
“거기에 우리 앞에서 공연할 사람이…….”
그때였다.
밖에서 환호성이 들려왔다.
와아!
그 환호성에 옆에서 지켜보던 박창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탑스타의 출연치고는 함성이 너무 작았다.
이어서 들려오는 인트로.
―따다다. 딴따!
도입부는 박창성도 익히 아는 노래였다.
이어서 무대 위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텝 하이 스텝! 오오…….
목소리까지 귀에 익었다.
박창성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누군지 알겠네요.”
“그렇죠, 노래를 듣고도 모를 수 없죠.”
“뉴 키즈 온 더 록의 노래 맞죠?”
“네, 맞아요.”
“90년대 노래를 립싱크하는 걸 보면 대충 감이 잡히네요. 그리고 유재성 씨가 모든 일을 다 재치고 이곳에 온 이유도 알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무대에 계신 분들 립싱크를 전문으로 하던 개그맨이잖아요. 유재성 씨의 선배니 당연히 모든 일을 제쳐 두고 오신 거고요.”
“헉.”
도훈이 어이없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때 우시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카메라가 자신을 비춘다는 것도 잊은 채 박창성의 소매를 살짝 잡아끌었다.
“피디님.”
“내가 무슨 실수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네.”
“실수한 거 맞아요, 립싱크가 아니에요.”
“모창을 저렇게 원곡처럼 한다고? 모창을 잘하는 탑스타라…….”
“그게 아니라 뉴 키즈 온 더 록 본인이에요.”
“에이 설마…….”
박창성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힐끔 돌렸다.
천막 안쪽이라서 밖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노래는 정확히 들리고 있었다.
순간 박창성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뉴 키즈 온 더 록이 어떤 그룹이던가?
1990년대를 기준으로 보이 그룹 중 원탑을 꼽으라면 단골로 등장하는 그룹이었다.
거기에 더해 이십 년 전에 한국에서 공연을 한 그룹이기도 했다.
입국에서부터 공연까지 모든 일이 일간지 일면을 장식하던 그룹이 바로 그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잊혀서 이제는 추억으로 남은 그룹.
그들이 지금 여기에 왔다고?
순간 박창성은 옆쪽을 힐끔 바라봤다.
그곳에는 한지혜가 큐시트를 들고 블랙홀에 집중하고 있었다.
박창성의 시선을 느낀 한지혜가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요, 선배?”
“나 좀 잠시 나갔다 올게.”
“조금 있으면 블랙홀 차례잖아요.”
“밖에 좀 확인하고 올게.”
“공연 보러 가는 거죠?”
“김 피디는 안 놀라네.”
“저는 너무 어렸을 때라서 저 그룹이 기억도 안 나요, 헤헤.”
해맑게 웃는 한지혜를 뒤로 한 채 박창성은 밖으로 나갔다.
무대에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객석 쪽으로 다가간 박창성은 눈을 크게 떴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그룹은 진짜 뉴 키즈 온 더 록이 맞았다.
박창성이 놀란 것은 두 가지였다.
그가 가장 놀란 것은 역시 진짜 전설의 그룹이 이 무대에 와 있다는 점이었다.
두 번째로 놀란 것은 너무 관객들의 반응이었다.
객석은 마치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처럼 썰렁했다.
전설의 그룹이 눈앞에서 노래하는데 이런 분위기라고?
아마도 관객들은 그들이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흔히 말하는 모창 가수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외모는 예전 앨범 표지의 십 대 모습이 아니었다.
이제는 모두 중년이 된 그들이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자신에게 길을 물었던 외국인 사내도 있었다.
그들의 팬이었던 자신도 못 알아보는데, 현재 그들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