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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훈은 이 상황 꿈만 같았다.
머리를 감싸 쥐던 한 시간 전 상황과는 180도 표정이 바뀐 그였다.
그때 김기훈은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제가 보기에는 꽤 정교한 무대 같은데, 이 무대를 꾸미는 데 사흘 가지고 될까요?”
김기훈은 도훈이 내민 태블릿을 가리켰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되었다.
사흘 만에 준비할 수 있는 무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도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차질 없이 진행하겠다고 대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 대표님이요?”
김기훈이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도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역시 대표님 말씀이라면 믿을 수 있죠.”
넙죽 고개를 숙이며 김기훈은 주위를 바라봤다.
대표가 누군지는 몰랐다.
그냥 대표라고 하니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주변을 살피던 김기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 오묘했기 때문이다.
이번 회의에 참석한 케이넷과 유레카 측의 사람들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그 모습에 김기훈의 가슴을 철렁 가라앉았다.
혹시나 상대의 말에 허풍이 섞여 있을까 걱정되어서였다.
그 표정을 읽었는지 임제호가 나섰다.
“김 팀장님 그렇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대표님이 약속하신 거니 사흘 뒤에 맞춰서 무대가 완성될 겁니다.”
“죄송합니다. 제 표정이 읽혔나 보네요, 하하.”
“뭐, 협업을 하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많이 일어나죠. 상상도 못 할 일들이 흔한 게 이쪽 아닌가요? 저도 공무원분들과 작업을 많이 해서 팀장님 사정을 잘 이해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계약된 업체마저도 잠적하는 바람에 무대 장치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아무렇지 않게 사흘이면 된다고 하시니 살짝 걱정된 건 맞습니다.”
“우리 대표님이 알아서 해 주실 겁니다.”
말을 마친 임제호는 조용히 옆쪽에 앉아 있는 황수영과 도훈을 바라봤다.
임제호도 이번 일로 도훈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다.
도훈의 정체를 알고 나니 모든 상황이 한 번에 이해가 되었다.
소속은 달랐지만, 도훈은 스타플레이어에서 같이 동고동락한 사이였다.
도훈에 대한 충성심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 김기훈은 임제호가 왜 도훈과 황수영을 바라보는지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협상이 매끄럽게 흘러간다는 것이었다.
김기훈은 사실 이번 미팅을 기대하지 않았었다.
마치 기름칠을 한 것처럼 슬슬 굴러가자 도리어 이 상황이 놀랍기만 했다.
그가 이해 안 가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연예 기획사가 자신의 이익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비용도 물 쓰듯 막 쓰는 것이 김기훈의 눈에는 그들이 호구처럼 보였다.
조용히 도훈을 바라보던 김기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시청 앞마당을 그냥 집이라 생각하고 쓰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그럴 작정입니다.”
“앗, 그렇게…….”
김기훈이 당황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바로 수긍하는 경우는 못 봤었다.
그때 도훈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무대 작업을 하다 보면 상의해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 물어볼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일단 여기 협업 계약서부터 읽어 보시죠.”
도훈은 계약서 두 장을 건넸다.
김기훈이 계약서를 살피자 도훈이 설명을 이었다.
“수정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계약서를 읽던 김기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괜찮습니다. 저희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나요?”
도훈이 계약서를 가리켰다.
김기훈이 지적한 것은 무대 설치에 문제가 생기면 위약금 책정을 했기 때문이다.
“무료 봉사 수준인데, 여기에 억대 위약금을 넣으시면…….”
“괜찮습니다. 이 정도는 약속해야 신뢰가 쌓이지 않겠습니까?”
“허,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저야 좋지만요.”
김기훈이 뒷머리를 긁적이자 도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답했다.
“대신 전기나 수도에 대한 비용은 시청에서 담당하기로 계약서에 적혀 있지 않습니까?”
“허허, 그게 얼마나 된다고요…….”
김기훈은 말을 얼버무렸다. 상대가 마음을 바꿀까 두려워서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기훈과 도훈은 계약서에 나란히 도장을 찍었다.
시장까지 모두 승인한 내용이었기에 새로 살펴볼 필요는 없었다.
잠시 차 한 잔이 오간 후, 김기훈은 계약서를 서류철에 꽂아 넣었다.
그것도 잠시, 김기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서류를 다시 살폈다.
계약서에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이 하나 기억났기 때문이다.
계약서를 힐끔 살핀 김기훈이 물었다.
“그런데 무대에 오를 공연자가 누군가요? 계약서에도 그렇고 행사 계획표에도 나와 있지 않아서요.”
“사실 비밀입니다. 혹시 초청 가수에 따라서 무대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달라지나요?”
“그럴 리가 없죠. 이렇게 훌륭한 무대를 만들어 주신다는데 누가 무대에 오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김기훈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다행이네요.”
“하하, 이렇게 지원해 주시는데 무슨 공연을 하던…….”
“저희도 미리 밝히면 관객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까 봐. 걱정이 많습니다. 추억을 주려고 한 기획인데 관객들이 너무 많이 몰리면 행사 자체가 무산될 수 있으니까요.”
도훈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김기훈이 다시 웃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김기훈은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숨기고 있었다.
케이넷에서 초청할 가수라고 해 봤자 탑티어는 아니었다.
아마 자신이 짠 라인업에도 밀릴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밝히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대표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무명을 위해서 이렇게 큰 무대를 만든 것이 분명했다.
밝히지도 못할 무대 라인업에 무대 비용을 쏟아 넣는 것을 보면 공과 사를 구분 못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김기훈의 생각이었다.
* * *
사흘 후.
추억을 소환하라! 녹화 당일.
현장에는 새벽부터 임제호가 나와 있었다.
MBS에서라면 중간중간 체크를 하면서 상황을 지켜봤겠지만, 케이넷으로 오면서는 안심할 수 없었다.
사실 무대 준비부터가 걱정되는 임제호였다.
그건 5분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무대를 확인한 임제호는 본능적으로 입을 쩍 벌렸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들어가는 것도 잊은 채 그는 입을 벌리고 웅장한 무대를 지켜봤다.
완성된 무대는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많이 차이가 있었다.
무대 주변으로 천막을 치고 작업한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뒤늦게 따라온 박창성도 입을 벌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이게 말이 됩니까? 선배.”
“그러게 말이야. 우리한테 확인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있었어.”
“그러니까요. 이건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려는 뜻이 분명해요. 이건 종합운동장에 마련된 특설 무대와 비슷하잖아요.”
박창성은 정신없이 무대를 가리켰다.
시청 앞마당에는 유람선 버티고 있었다.
유람선 모양의 무대는 잔디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네, 대체 이 조그만 동네에 이런 무대라니…….”
“솔직히 걱정되네요.”
“뭐가 걱정이야. 이 정도로 완성도 있는 무대가 완성됐으면 차질 없이 공연만 진행하면 되잖아.”
“그게 아니고, 이렇게 돈을 물처럼 쓰면 망하지 않겠어요?”
“에이, 다 알아서 하겠지.”
“재벌 3세의 방만한 경영으로……. 막 이런 거 말이에요. 일간지 1면에 흔히 나오는 기사잖아요.”
“창성아!”
“네, 선배님.”
“너는 시작부터 고춧가루를 팍팍 뿌리는구나. 아무래도 이게 그립지?”
임제호가 주먹을 불끈 쥐자 박창성이 재빨리 뒷걸음쳤다.
“아, 왜 폭력을 쓰고 그러세요. 선배.”
“자꾸 고춧가루 뿌리니까 그렇지.”
“자, 잠시만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이상해?”
“여기 무대 순서에 강영웅 씨 다음이 블랙홀 차례잖아요.”
“그래, 오른 블랙홀 데뷔 무대라고 했잖아. 그래서 네가 여기 온 거고.”
“그런데 다음 무대는 누구죠? 그냥 B그룹이라고 쓰여 있는데요.”
“그건 유레카에서 알아서 넣겠지. 최소 진행자한테는 가르쳐 줄 거 아니야.”
“그러니까요. 진행자도 이상해요. 진행자 Y라고만 적혀 있어요.”
“응, 진행자는 누군지 알아.”
“누군데요?”
“그건 안 가르쳐 준다. 나도 며칠 전에 알았는데, 네가 그렇게 쉽게 알면 재미없잖아.”
“에이, 쫀쫀하게 왜 그러세요.”
“그냥 믿어. 내가 보기에는 현재로도 그렇고 앞으로도 탑티어니까. 그냥 믿고 맡겨.”
“‘추억을 소환하라’가 메인이지만, 아이돌 메이커도 연계된 무대잖아요. 가르쳐 주세요.”
“그럼 돈 내.”
“에이, 쫀쫀하게! 여기 만 원이요.”
“두 장만 더 내.”
“와, 이거 왜 그렇게 살아요. 혹시 형수님한테 용돈 못 받았어요?”
“그거 비밀인데 어떻게 알았어?”
그들이 농담을 주고받고 있을 때 박창성의 뒤에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검은 그림자는 손을 호호 불면서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그거 저한테 만 원만 주시면 알려 드릴 텐데.”
“앗, 깜짝이야. 대체 누구…….”
박창성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다가 상대를 보고 눈을 한계까지 치켜떴다.
그 모습에 그림자의 주인공이 말했다.
“아, 죄송해요.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죠?”
“앗, 유재성 씨가 여긴 웬일이에요?”
“MBS에서 뵌 지가 얼마 안 되는데, 여기서 또 뵙네요.”
“MBS 스케줄도 빡빡하시다고 들었는데 여긴 어떻게 오신 건가요? 설마 진행 맡으시러 오신 거예요?”
“제가 여긴 왜 왔겠습니까? 이 새벽에 지나가는 길에 들를 리는 없잖아요. 당연히 진행 때문에 왔죠.”
“헉, MBS에서 보내 줬다고요?”
박창성이 놀라 물었다.
지금 유재성이 이곳에 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가 MBS의 전속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MBS의 프로그램에 할애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지금은 연말이었다.
거리 곳곳에서는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연예인들은 각종 행사로 눈코 뜰 새 없을 기간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바쁜 것은 역시 진행자들이었다.
그 진행자들 사이에서도 대한민국 원탑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바로 유재성이었다.
그 유재성이 지금 모든 스케줄을 미뤄 놓고 이곳에 나온 것이다.
박창성이 의문 가득한 눈빛을 보내자 유재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가라고 하던데요. 예능국에서 뭔가 약점이라도 잡힌 게 있나 봐요.”
“약점이라…….”
박창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지금 뒤쪽에서 어떤 싸움이 벌어지는지를 알고 있었다.
문동훈이 혼자 뒤집어쓸 수 없다고 물귀신 작전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위쪽에서는 잔인할 정도로 정확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모든 것이 문동훈의 개인적인 일탈이라고 하지만, 물론 예능국의 묵인이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심각한 박창성의 표정에 유재성이 말을 이었다.
“표정이 왜 그러세요, 박 피디님. 저 농담이에요.”
“농담이요?”
“네, 농담이었어요. 이번 무대는 제가 진행을 꼭 맡고 싶어서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