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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175화 (175/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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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지연은 안약을 식탁 위에 놓고는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장경자를 힐끔 바라본 엄지연은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엄지연은 장경자의 인간적인 모습이 좋아 보였다.

    이 광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장경자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경제인들 사이에서는 철혈의 여제, 강남의 용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장경자가 다친다면 피 대신 얼음물이 흘러나올 것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니 그녀를 보필한다는 것은 엄지연에게는 부담이었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장경자에 대한 선입견은 완벽하게 무너졌다. 바로 장경자의 눈물을 봤기 때문이었다.

    그 뒤 엄지연은 장경자의 눈물을 숨겨 주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손자 앞에서는 그저 평범한 할머니로 변하는 장경자가 낯설지 않았다.

    장경자가 서류 봉투를 열어 본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직감적으로 이것이 도훈이 준비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선물은 열기 전이 가장 감동적인 법이었다.

    장경자는 이 순간을 즐기려는 듯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재롱 잔치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한번 보세요. 그럼 의미를 아실 거예요.”

    도훈은 장경자가 손에 쥐고 있는 서류 봉투에서 내용물을 꺼냈다.

    그곳에는 팸플릿 몇 장만이 덩그러니 들어 있을 뿐이었다.

    도훈은 팸플릿을 장경자의 앞에 늘어놓았다.

    장경자는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공연 팸플릿이었다.

    그런데 이게 재롱 잔치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고개를 갸웃하던 장경자는 바로 눈을 크게 떴다.

    도훈이 말한 의미를 눈치챘기 때문이다.

    자신의 앞에 있는 공연 일정은 딱 한 명을 위한 것이 분명했다.

    장경자 자신을 위해서 도훈이 준비한 공연이 분명했다.

    그곳에 나와 있는 출연자가 모두 장경자가 좋아했던 가수들이었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것이 그 가수들이 3일의 간격을 두고 출연한다는 것이다.

    “우리 손자가 내 취향을 이렇게 잘 알고 있을 줄은 몰랐네.”

    “손자가 할머니 취향을 모르면 그건 직무 유기죠. 안 그런가요?”

    “그던데 이 사람들이 모두 다 출연한다고?”

    “네.”

    “나를 위해 이 많은 돈을 들였다고?”

    “케이넷 연말 특집이에요. 어차피 찍어야 하는 거 제가 다 끼워 넣었어요.”

    “흠.”

    “아무래도 내게 부탁할 게 있는 것 같구나. 이번에는 내가 화끈하게 들어주겠다.”

    “그럼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지금?”

    “네, 아무래도 집안싸움이 일어날 것 같아요.”

    “집안 싸움이라…….”

    장경자는 도훈을 바라보며 표정을 굳혔다.

    조금 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지금은 살얼음이라도 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도와주시지 않으셔도 돼요. 사실 제가 재롱 잔치를 준비한 이유는 딱 한 가지에요.”

    “계속 말해 보렴.”

    “할머니가 충격을 받으실 일이 없으셨으면 해요. 저는 할머니가 언제까지고 건강하시길 바라니까요.”

    “내가 충격을 받는다고? 네가 나를 너무 무르게 봤구나.”

    “대한민국에서 누구보다 강하신 분이라는 건 저도 알죠. 그런데 가장 믿었던 사람한테 배신당하면…….”

    “도훈아.”

    “네, 할머니.”

    “지금 나를 물로 보는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그깟 배신 때문에 충격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 우습구나.”

    “큰아버지가 배신해도요?”

    “우리 도훈이가 많이 컸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혹시 미라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느냐?”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래, 정확히 모른다니 말해 주마. 아마도 세훈이는 비밀 금고에 있는 내 돈을 노릴 것이야.”

    “비밀 금고라니요?”

    “남들이 나를 보고 대한민국 최고의 현금 부자라고 하지.”

    “네, 그렇죠.”

    “그 현금이 어디 있겠니?”

    “…….”

    “설마 그 많은 현금을 은행에 맡겨 놨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도훈은 조용히 장경자를 바라봤다.

    그 많은 돈을 은행에 맡겨 놓지 않는다면 어디에 보관한단 말인가?

    그 표정을 읽었는지 장경자가 말을 이었다.

    “표정을 보니까 궁금해하는 것 같구나. 하지만 네게 정답을 말해 주기는 조금 그렇지. 아니, 누군가에게 얘기해 줘야겠지만, 지금은 아니란다. 그게 누군지 정해지지도 않았고.”

    “어쨌든 큰아버지의 움직임을 알고 계신다는 거네요.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네요.”

    “그래도 이 할미를 걱정해 주는 건 고맙구나.”

    “아신다니까 다행이긴 한데…….”

    “아직 궁금증이 풀리지 않은 것 같구나.”

    “그냥 걱정이 돼서 그렇죠.”

    도훈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물론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장경자와 마주하고 나서 도훈의 머릿속에는 의문만이 쌓여 갔다.

    도훈보다 장경자가 이세훈의 움직임을 더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장경자가 쓰러졌던 원인은 다시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엄지연이 다시 장경자의 곁에 다가왔다.

    “이거 맞죠? 회장님.”

    “그래, 엄 비서가 최고다. 내 깜빡할 뻔했네.”

    엄지연이 건넨 것은 조그마한 나무 상자였다.

    마치 시계 케이스 같은 주먹만 한 상자를 장경자가 집어 들었다.

    “자, 이건 내가 주는 선물이다.”

    “선물이요?”

    “네가 재롱 잔치를 준비했다고 하니 나는 꽃다발을 줘야겠지.”

    “이게 꽃다발이라는 거죠?”

    “그래, 꽃다발이지. 너 혼자 있을 때 확인해 보면 좋겠구나. 아마 내가 준 이 선물은 네 시간을 벌어 줄 것 같구나.”

    “저 혼자 있을 때요? 그리고 시간을 벌어 준다고요?”

    “그래.”

    장경자가 기분 좋게 웃었다.

    도훈은 지금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자신이 미래를 알고 벌였던 일조차 장경자의 손바닥 위였다.

    문제는 전생에 장경자가 왜 쓰러졌는지에 관해서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    *    *

    두 시간 후, 도훈의 집.

    도훈은 장경자에게 받은 선물을 만지작거렸다.

    도훈은 이 선물이 시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시간을 벌어 줄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 시계가 맞을 것이었다.

    장경자가 주는 시계라…….

    과연 어떤 시계일까?

    도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순간 도훈은 눈을 크게 떴다.

    예상과는 달리 상자에는 두 개의 열쇠가 들어 있었다.

    두 개의 열쇠라?

    도훈은 재빨리 열쇠를 살펴봤다.

    자동차 키 같은 것은 분명 아니었다.

    창고 혹은 주택을 열쇠처럼 두 개의 열쇠가 묶여 있었다.

    도훈은 그 아래 보증서처럼 생긴 쪽지를 바라봤다.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장경자의 직접 손으로 쓴 것으로 보이는 글씨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도훈이는 보아라…….>

    조그마한 글자는 제법 촘촘해서 양으로 따지면 A4용지 두 장은 너끈할 것으로 보였다.

    도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장경자가 전하는 메시지를 바라봤다.

    장경자는 이것이 도훈의 몫이라고 하고 있었다.

    장경자는 상속분을 미리 준다는 내용의 편지와 함께 열쇠 두 개를 넣어 놓은 것이다.

    편지를 다 읽고 난 도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열쇠 두 개가 장경자가 주는 몫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하던 도훈은 가장 편지의 중간중간에 찍힌 한글과 숫자를 다시 살펴봤다.

    편지에 인쇄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는데 지금 보니 한글과 숫자는 분명히 주소였다.

    번지수로 적혀 있는 것으로 봐서는 한참 전에 적어 놓은 주소 같아 보였다.

    도훈은 재빨리 노트북을 켜고 그 주소를 확인해 봤다.

    타다닥.

    딸깍.

    타이핑 소리와 마우스 클릭 소리가 번개처럼 지나가자 이내 화면이 바뀌고 주소가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그곳은 장경자의 집에서 3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도훈은 재빨리 온라인 지도의 거리 보기를 클릭했다.

    딸깍.

    하지만 나오는 것은 온통 수풀밖에는 없었다.

    도훈은 다시 외투를 입었다.

    아무래도 현장을 가 봐야 이 선물의 비밀이 풀릴 것 같아서였다.

    *    *    *

    한 시간 후.

    도훈은 서울 외곽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외곽 도로에서 살짝 들어가자 겨우 차 한 대 정도 지나갈 것 같은 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만약에 중간에 마주치면 서로 난감할 듯한 좁은 길이었다.

    도훈은 차를 몰고 조용히 그 길을 지나갔다.

    좁은 길을 오 분 정도 달리자 건물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모두가 창고였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삼 년 후면 재개발이 되는 곳이었다.

    그전에는 근교에 있으면서도 땅값이 싸다는 이유로 창고가 들어서 있는 곳이었다.

    몇몇 창고는 트럭을 세워 놓고 바삐 짐을 나르고 있었다.

    도훈은 그들을 지나쳐 자신의 목적지를 향해 차를 몰았다.

    도훈이 도착한 곳은 지나쳐 왔던 창고보다 더 조그만 건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름해 보이는 조그만 창고였다.

    내비게이션은 분명히 그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훈은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조그만 창고에서 차를 멈췄다.

    도훈은 조용히 조그만 창고 앞에서 열쇠를 들었다.

    도훈은 열쇠를 창고의 문에 끼워 맞췄다.

    창고에 들어간 도훈은 주변을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대체 불은 어떻게 켜는 거지?”

    그 말대로 창고에는 불을 켜는 전원 스위치가 없었다.

    즉,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창고였다.

    핸드폰 불빛으로 여기저기를 살피던 도훈은 문 앞에 있는 냉장고의 옆에서 캠핑용 랜턴을 하나 발견했다.

    건전지로 쓰는 것이 아닌 기름으로 쓰는 등이었다.

    친절하게도 옆에는 불을 붙일 수 있는 라이터까지 있었다.

    도훈은 라이터로 등에 불을 켰다.

    등을 들고 주변을 살피던 도훈은 눈을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창고로 보였다.

    도훈은 천천히 창고를 둘러봤다.

    둘러보던 도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물건들이 아무렇지 않게 쌓여 있었지만, 그것을 덮고 있는 포장재들에는 제법 정성이 담겨 있었다.

    도훈은 재빨리 물건 중 하나의 포장재를 걷어 냈다.

    순간 도훈은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는 한눈에 보기에 황금빛의 광채를 내는 물건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도훈은 손을 뻗어 그 물건을 확인했다.

    “진짜 황금이네.”

    도훈은 다른 물건들도 확인하기 시작했다.

    허름해 보였던 창고는 그냥 창고가 아니라 보물 창고였다.

    금괴뿐 아니라 소위 말해 명화라 불리는 작품들도 몇몇 보였다.

    이것을 모두 팔면 과연 손에 얼마나 쥘까?

    아무리 생각해도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건 장경자의 선물이 맞았다.

    말 그대로 남들 모르게 현금화할 수 있는 물건들이 창고에 가득했다.

    도훈은 자신의 외투를 뒤져 열쇠 하나를 더 꺼냈다.

    열쇠 한 개는 이 문을 여는 데 썼다.

    나머지 한 개의 쓰임에 대해서는 아직 밝히지 못했다.

    도훈은 재빨리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금고는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금고가 숨어 있을 만한 장소도 없었다.

    “뭐지?”

    도훈은 열쇠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낮에 다시 찾아와야 할 것 같았다.

    다시 올 때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밝힐 장비도 가져와야 할 것 같았다.

    창고를 빠져나가려던 도훈은 문 앞에 있는 냉장고를 보고는 발길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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