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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초원의 집에 관계된 사람들밖에 없었다.
그때 도훈이 강시혁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이쪽으로 와, 강 피디.”
“어?”
고개를 갸웃하자 다급하게 손짓하는 도훈.
“빨리 이쪽으로!”
“아, 알았어.”
강시혁은 마법에 이끌리듯 도훈의 옆에 앉았다.
순간 도훈이 어딘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왔습니다, 감독님.”
“감독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강시혁이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누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는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그 모습에 강시혁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에 사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순간 그의 뒤에서 스크린이 내려왔다.
스르륵.
강시혁의 의문은 더욱 커졌다.
스크린이 내려왔다는 것은 이 자리에서 중요한 발표가 오간다는 이야기였다.
‘유레카의 직원인가?’
유레카의 직원은 대부분 아는데 그는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가만 보자…….’
생각해 보니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긴 했다.
하지만 일 년은 기른 듯한 수염 때문인지 얼굴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다.
그때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를 아시는 분이 대부분이시겠지만, 다시 한 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초원의 집을 제작한 감독 정재웅이라고 합니다.”
순간 이어지는 박수 소리.
짝짝.
강시혁은 눈을 크게 떴다.
정재웅이라면 자신도 아는 이였다.
그런데 지금 앞에 선 이는 강시혁이 아는 정재웅과는 분위기와 외모 모두가 달랐다.
강시혁이 아는 정재웅은 제법 통통한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앞에 있는 사내는 깡마른 데다가 수염까지 기르고 있었다.
목소리도 살짝 갈라져서 이전의 정재웅과는 전혀 달랐다.
그런데 초원의 집을 제작했다니 분명해 자신이 아는 정재웅이 맞았다.
강시혁은 힐끔 고개를 돌려 여기에 모인 이들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정여진만 보였는데,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초원의 집> 촬영 관계자였다.
그동안 안 보였던 이지유와 지난번에 잠깐 봤던 김다솜 작가도 나와 있었다.
<초원의 집>은 후반 작업이 거의 끝나 개봉 날짜를 조율하고 있는 상태였다.
거기에 더해 가편집본만으로 해외 유명 영화제 경쟁 부분에 초청을 받는 작품이 아니던가?
개봉은 영화제의 결과를 보고 잡기로 했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저 모양이란 말인가?
그때 정재웅이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의 도움 덕분에 <초원의 집>의 최종 작업이 끝났습니다. 그 첫 번째 상영을 여러분과 함께하려고 합니다. 그럼 상영을 시작하겠습니다.”
정재웅이 신호를 보내자 불이 꺼졌다.
깜깜한 공간을 뚫고 프로젝션이 쏘아 내는 빛이 지나가자 스크린에서 영상이 흘러나왔다.
언덕 위에 소나무 한 그루.
소나무가 사르르 녹더니 조그마한 집 한 채가 만들어진다.
집이 확대되고 집이 다시 녹더니 영화의 타이틀이 되었다.
<초원의 집>
참새 우는 소리가 정겹게 들리면서 화면이 암전된다.
화면의 암전에 제법 길었기 때문에 강시혁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순간 강시혁은 자신을 여기에 부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유레카와 한배를 탔기에 시사회에 부르는 것은 맞았다.
하지만 지금은 블랙홀의 데뷔를 보름 정도 남겨 놓은 시점이었다.
자신이 체크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다.
강시혁이 머릿속에 불만을 가득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그의 귀에 많이 들어본 음악이 들려왔다.
‘뭐지?’
강시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떴다.
화면은 암전된 상태에서 부분적으로 밝아지고 있었다.
마치 검은색 크레파스로 덮어 놓고 동전으로 긁는 듯한 느낌으로 화면에서는 스크래치가 나며 하나의 영상을 만들고 있었다.
문제는 그 배경으로 나오는 노래가 바로 블랙홀이 이번 앨범에 수록한 곡이라는 것이다.
강시혁은 힐끔 고개를 돌려 도훈을 바라봤다.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봐서 도훈이 계획한 일임을 알 수 있었다.
강시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훈의 의도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명의 그룹이 만든 노래를 작품에 넣는 것까지는 좋았다.
블랙홀의 노래를 작품의 배경 음악으로 써서 도움이 될까?
블랙홀의 노래를 홍보해 주겠다고 하는 의도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블랙홀은 손해 볼 것이 없지만,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바뀐다면?
그것은 문제였다.
강시혁의 걱정과는 달리 모두는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강시혁은 시선을 돌려 다시 스크린을 바라봤다.
걱정도 잠시, 강시혁은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만큼 <초원이 집>은 잘 만들어졌다.
집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애착을 작품 속에 녹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90분의 러닝타임이 끝나고 다시 불이 켜졌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누군가는 1990년에 대한 향수를 느꼈고.
누군가는 자신의 현재 상황에 감정이입을 했다.
끝내 정여진과 이지유가 맡았던 모녀는 집을 구하지는 못했다.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1번 납입한 청약 통장이 전부였다.
통장에 찍힌 그 한 줄은 그들이 삶을 시작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모두는 알 수 있었다.
이어지는 엔딩 크래딧 그때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뚜루루. 뚜뚜.
순간 강시혁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듯한 웅장한 사운드.
하지만 모든 소리는 절제되어 있었다.
음악이 주인공이 아니라 영상이 주인공이라는 듯 영상의 가장 아래쪽에 깔려 마지막 장면을 예술로 만들었다.
강시혁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다.
뮤지션이자 프로듀서로서의 본능이었다.
영상을 제거하고 순전히 음악만을 평가하고 싶었던 것.
음악에 집중하고 나니 악기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귀에 들어왔다.
음악을 듣던 강시혁은 문득 깨달았다.
지금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자신의 곡임을 말이다.
이번에 발표할 음원 세 곡 중 하나는 강시혁 본인이 작곡한 곡이었다.
그 곡이 지금 영하의 마지막 장면에 쓰인 것이다.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를 배경으로 영상과 함께 흘러나오자 자신의 곡인지도 모르고 들었다.
순간 음악이 멈췄다.
눈을 떠보니 영상 속에는 엔딩 크레딧에 멈춰 있었다.
불이 켜졌지만, 아무도 입을 여는 이는 없었다.
마치 여운을 즐기려는 듯 멍하니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흘러나왔다.
짝짝.
고개를 돌려 보니 정여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뼉을 치고 있었다.
이어서 회의실에 모였던 이들이 줄줄이 일어났다.
* * *
그날 오후.
강시혁은 사무실에서 도훈과 마주 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친구.”
“지난번에는 나보고 마음대로 하라면서?”
“그, 그게 아니라 저 연주는 언제 한 거지?”
“마이클한테 부탁했어. 물론 맨입은 아니지. 정상적으로 비용을 냈어.”
“헉.”
강시혁은 입을 딱 벌렸다.
마이클 윌에게 부탁했다면 그 연주가 LA 오케스트라의 연주라는 말이었다.
일반 기획사라면 오케스트라에 연주를 맡기지도 못할 터였다.
강시혁은 도훈의 신분에 대해 알고 있지만, 이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대체 얼마나 쓴 거야?”
“강 피디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혹시 억 단위야? 아니 억 단위로도 안 되지…….”
강시혁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도 금액이 나오지 않았다.
영화 속의 사운드 같은 완성도 있는 연주를 하려면 그들의 시간을 적잖게 빼앗았을 것이다.
신생 그룹 하나를 만드는 최소 비용 정도는 지불해야 LA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맡을 것이다.
수억이 아닌 억 앞에 붙은 숫자가 두 자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블랙홀의 앨범이 실패한다면?
강시혁은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머리를 감싸 쥐었던 손을 풀고 멍하니 도훈을 바라보는 강시혁.
도훈은 어이없다는 듯 강시혁의 어깨를 툭 밀쳤다.
“정신 차려, 친구.”
“지금 어떻게 멀쩡한 정신으로 얘기를 해. 대체 왜 이렇게까지…….”
“나는 강 피디하고 블랙홀을 믿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사업이잖아.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이윤을 남기려고 그룹을 만들고…….”
강시혁은 끊임없이 잔소리를 쏟아 냈다.
핵심은 간단했다.
아무리 음악이니 예술이지 하지만, 이 시장은 자본의 논리로 돌아간다는 말이었다.
그의 말에 도훈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본 강시혁이 발끈해서 물었다.
“왜 웃는데? 나는 진심이란 말이야.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땅 파서 장사하는 거 맞는데.”
“뭐라고?”
“뭘 그렇게 놀라? 원래 땅을 파야 금도 나오고 석유도 나오고 그러는 거잖아. 그리고 중요한 건!”
“…….”
“블랙홀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거지.”
“흠.”
“작품을 위해서도 나는 블랙홀의 음악이 필요하다고 봐.”
“거기까지는 인정. 하지만 다음부터는 블랙홀에 관한 깜짝쇼가 있으면 미리 말해줘. 간덩이가 오그라드는 줄 알았잖아.”
“알았어. 나도 이제부터는 바쁘니까. 잘 부탁해.”
“어디가?”
“잠시 케이넷으로 출근해야 할 것 같아서.”
“흠, 케이넷이라…… 그 일도 비밀인가?”
“비밀은 아니고 시청률 때문이라고 해 두지.”
“시청률이라……. 그런데 마이클의 오케스트라에 들인 비용 말이야. 정말 말 안 해 줄 건가?”
“흠, 돈은 아니고 마이클에게 저작권에 관해 얘기를 하니까 혹하더라고.”
“음, 돈은 들인 게 없잖아. 그럼 공짜라는 얘기잖아?”
“어쩌면…… 마이클과 오케스트라가 몇십억을 가져갈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지…….”
도훈은 씩 웃자 강시혁이 마주 웃었다.
도훈의 자신 넘치는 표정과 달리 강시혁의 표정은 조금 허탈해 보였다.
이것은 강시혁의 진심이었다.
곡 하나로 몇십억 정도의 수익을 가져가려면 대체 얼마나 팔려야 하나를 계산해 보면 답이 나오지 않았다.
* * *
같은 시간, 한국의 반대편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LA.
마이클과 까를로스는 눈을 비비고 영상을 보고 있었다.
유레카에서 열린 작은 시사회와 동시에 그들에게도 동영상을 보냈던 것.
덕분에 마이클과 까를로스는 밤을 새워야 했다.
그들은 영상을 세 번씩이나 돌려봤다.
90분짜리 영화를 세 번 반복했으니 4시간 반이 걸렸다는 말이었다.
마이클은 엔딩 크레딧이 내려오자 화면을 정지시켰다.
순간 까를로스의 눈썹이 꿈틀댔다.
“마이클! 왜 화면을 꺼?”
“이 정도 봤으면 됐지. 오늘은 그만 쉬자고.”
“한 번만 더 보면 안 될까?”
“나도 더 보고 싶지만, 체력이 안 돼.”
“내일을 휴일이잖아.”
“휴일은 가족과 함께 몰라?”
“네 가족은 뉴욕에 있잖아.”
까를로스의 턱수염이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 마이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럼 잠시 간식이라도 먹고 보자.”
“오케이, 간식은 아무래도…….”
까를로스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말끝을 흐렸다.
뭔가 떠올리려고 하는 듯 미간을 잔뜩 좁히는 까를로스.
까를로스는 생각이 나지 않았는지 고개를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