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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한 한지혜의 눈빛에 박창성이 재촉했다.
“그거라니?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봐. 나 지금 일해야 하거든.”
“누구는 일 안 해요? 저도 일하러 나온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저 오늘부터 아이돌 메이킹 팀에 합류하라고 해서 여기로 바로 온 거예요.”
“헉, 어떻게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전부 임 선배님의 배려죠, 몰래 가서 놀라게 해 주라고 하시던데요.”
“아 이 양반이!”
박창수는 미간을 좁혔다.
임제호와는 친형제나 다름없지만, 이럴 때면 정말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이곳에 책임자는 자신인데 한마디 상의도 없이…….
박창성은 생각을 멈췄다.
어쨌든 결과가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한지혜가 이곳에 온다면 자신이 일은 반으로 줄어들 것이 분명했다.
박창성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바뀌자 한지혜가 만족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호호, 표정을 보니 성공한 것 같네요.”
“놀란 게 아니라 짜증 지수를 올려놨지.”
“아, 그럼 정보 안 줄래요.”
“정보는 또 뭐야?”
“내가 아까 한 말이요. 오늘 미디어 패스에서 나온 기사거든요.”
“미디어 패스?”
“어때요? 호기심이 당겨요?”
“일 끝나고 찾아보면 되는 걸 가지고 왜 이렇게 생색내?”
“그거 바로 기사 내려갔어요. MBS에서 난리 났다고 하던데요.”
“흠…….”
박창성은 자신이 업무 중이라도 잊은 채 작은 신음을 토해 냈다.
한지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다른 건 아니고 기사 내용이 20호실의 도원결의였어요.”
“거기서 삼국지의 도원결의가 왜 나와?”
고개를 갸웃하던 박창성은 시선을 바로 돌렸다.
생각해 보니 블랙홀의 멤버 모두가 20호실 출신이 아니던가?
순간 박창성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한지혜가 씩 웃으며 설명을 마저 이었다.
“스타플레이어에서 화제가 되었던 곡 있잖아요…….”
“흠, 그 랩 말이야? 구두 발자국?”
“그거 누가 불렀는지 아세요? 저기 저 친구들이에요.”
“그게 말이 돼?”
박창성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그들이 안무 연습을 끝내고 랩 파트 레슨으로 돌아갔다.
강시혁이 신호하자 블랙홀의 멤버들은 슬쩍 입을 뗐다.
―새벽에 뒤척뒤척…….
―구두 굽 소리는 터벅터벅…….
이어지는 랩에 박창성이 한지혜에게 속삭였다.
“이거 지난번에 배경음악이랑 너무 똑같잖아.”
박창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블랙홀의 멤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자신의 노래처럼 이 곡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는 분명히 오리지널이었다.
이 곡이 누가 불렀을까도 사실 시청자들에게는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저 친구들이었다니!
동작과 소리로 라임을 만들며 소리로 입체감을 주는 랩에 박창성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 한지혜가 속삭였다.
“저거 제 작품인 거 아세요?”
“그게 무슨 말이야? 김 피디.”
“선배, 저거 배경음악으로 깔았던 게 저하고 고운미 피디 제안이었어요. 그러니까…….”
한지혜는 신이 나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설명을 듣던 박창성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거 대형 사고 아니야? 김 피디랑 고 피디 잘리는 거 아니야?”
“벌써 퇴사했잖아요. 그거에 저희 잘못은 없어요. 그거 문 총괄이 다 승인한 거예요.”
“그 작자가 허락했다고?”
“바쁘니까 알아서 하라고 했어요.”
“그럴 리가 없는데…….”
“문 총괄은 그때 이 실장님 때문에 혼이 쏙 빠졌거든요.”
“이 실장님 때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 실장님 활약이 좀 튀었거든요. 나중에 영상으로 확인해 보세요.”
“…….”
박창성은 멍하니 한지혜를 바라봤다.
아무리 들어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박창성은 걱정 하나가 늘었다.
“자, 잠시만.”
“왜 그러세요? 박 선배.”
“지금 MBS에서 사고 치고 여기로 온 거잖아. 그리고 거기서 사고 친 기반으로 케이넷에 입사한 거고. 이거 꼭 산업 스파이 같지 않아?”
“그거 상관없어요.”
“어떻게 상관이 없을 수 있지?”
“아마 다른 일 때문에 정신없을 거예요.”
“다른 일이라면…….”
“뭐, 예를 들어서 이런 일이죠.”
말을 마친 한지혜는 자신의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미디어 패스의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아까 내려갔다면서?”
“이건 다른 기사예요. 자세히 읽어 보시면 사정을 알 거예요.”
박창성은 한지혜가 가리키는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는 한지혜가 말한 뜻을 알고 있었다.
기사 내용만 보면 이건 범죄였다.
이번에 나온 기사는 시청자 온라인 투표 조작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때였다.
지이잉, 지지잉.
한지혜의 핸드폰이 거칠게 울렸다.
핸드폰을 확인한 한지혜는 상대를 확인하더니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 모습에 박창성이 물었다.
“누군데 그렇게 무시하고 그래?”
“문 총괄이요. 발등에 떨어진 불 끄려고 할 거예요.”
“…….”
“또 그런 표정! 걱정하지 마세요. 문 총괄이 내부자 색출하려고 전화한 걸 테니까요.”
“휴, 이거 난리 나겠네. 콘서트를 앞둔 애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아마, 그건 별개의 문제가 될 거예요.”
“순위가 조작되었다는 건데, 어떻게 별개가 되지?”
“그쪽은 벌써 팬덤이 자리 잡았잖아요, 거기에 임시 소속사가 SW엔터예요. 지금 누굴 걱정하세요?”
“아.”
박창성이 탄성을 터뜨리자 한지혜가 다시 말을 이었다.
“뭐, 제가 예상한 건 아니고 이 실장님이 얘기해 줬어요.”
“그것도 이 실장님이야?”
박창성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든 일이 이도훈 실장이 연결되어 있었다.
지금도 기사에 맞춰서 이슈가 되는 곡을 연습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 같이 대화를 나눠 보면 지금의 일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 * *
같은 시간 강서구의 JK백화점 주차장.
차에서 내린 도훈은 약속 시각과 장소를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약속을 확인하던 도훈은 귀를 만지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한민국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제가 가서 알레르기약이라도 사 올까요, 실장님?”
“아니야, 누가 내 얘기를 하는지 자꾸 귀가 간지러워서.”
“에이, 누가 실장님 얘기를 한다고 그러…….”
한민국이 말끝을 흐리며 도훈은 빤히 바라봤다.
도훈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생각해 보니 실장님 뒤통수가 안 간지러울 수도 없죠. 수많은 사람이 실장님 욕하고 있을걸요.”
“욕은 먹으라고 있는 거야, 하라고 있는 게 아니고.”
“그건 무슨 신박한 논리예요?”
“욕을 하면 돈을 내야 하는데, 먹으면 돈이 들어오거든.”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황수영이 끼어들었다.
“뭔가 심오한 법칙 같네요.”
“뭐, 깊은 뜻이 있는 건 아니고 현실이 그렇죠. 이제 들어가야겠네요.”
도훈이 시계를 가리키자 한민국이 말했다.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음, 그럼 부탁해. 나는 갔다 올 테니.”
도훈은 황수영과 함께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10분 후 도훈은 백화점의 커피숍에서 한 여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단발머리에 깔끔한 원피스 차림의 여자는 한 마리의 고고한 학처럼 조심스럽게 커피잔을 들었다.
여자는 도훈과 황수영을 번갈아 보더니 입술을 열었다.
“이 실장님이라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유레카의 이도훈이라고 합니다.”
도훈은 대답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그 모습에 여자가 말했다.
“혹시 불편하세요?”
“아닙니다.”
“제가 괜히 여기에서 보자고 했나 봐요. 아무래도 처음 오시는 분은 조금 불편할 수도 있죠.”
여자는 선심 쓰듯이 도훈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도훈은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수호 어머님.”
“참, 우리 수호 얘기하고 있었죠.”
“네, 수호를 저희 유레카에 맡겨 주십시오. 저희가 최선을 다해서 스타로 만들겠습니다.”
“그럼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네, 말씀하세요. 수호 어머님.”
도훈은 여자를 보며 빙긋 웃었다.
상대는 블랙홀의 마지막 멤버로 점찍어둔 박수호의 어머니인 장미령이였다.
도훈과 장미령은 계약 문제로 이곳에서 미팅하고 있던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약속 장소였다.
장미령은 약속 장소를 JK백화점의 VVIP라운지로 잡았다.
처음에는 약속 장소에 그다지 불만은 없었다.
장소가 장소다 보니 그다지 손님이 많지 않았다.
소수의 VVIP에게만 허용된 장소이다 보니 한산한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여기가 JK백화점이라는 것이다.
JK백화점은 JK유통이 관리하는 기업이었다.
즉, 도훈에게는 적진이라는 말이었다.
적진에서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가끔 주변을 확인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 도훈의 표정을 보고 박수호의 어머니인 장미령이 작은 착각을 한 것이다.
이곳을 도훈이 부담스러워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장미령이 원하는 바였다.
“사실 수호가 스타메이커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강한 인상을 남겼나 봐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 기획사들에 연락이 계속 와서 불편할 정도예요. 그래서…….”
장미령은 쉴 틈도 없이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이야기의 요지는 간단했다.
자기 아들을 최고의 기획사에 맡기고 싶다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3대 기획사에서도 모두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도훈은 팔짱을 끼고 그녀의 말을 계속 들었다.
오늘의 협상은 쉬울 것 같지가 않았다.
뭐, 안 되면 네 명으로 데뷔시켜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확하게 깨우쳐 주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수호 어머님.”
“아, 제 얘기만 했나 봐요.”
“제가 말씀드릴 건 혹시 다른 기획사에 들어갈 때 팀은 정해져 있나요?”
“팀이라니요?”
“지금 계약을 해 봤자, 전 소속사와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아서요. 들어가면 연습생 신분일 텐데…….”
“자, 잠시만요. 우리 수호가 경쟁에서 뒤처질 거로 생각하시는 건가요? 저는 우리 수호를 명품으로 키웠어요. 수호는 자기가 마음먹은 분야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다고요.”
“네, 수호의 실력은 충분히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데뷔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다 짜 놓은 팀이 멤버 한 명 때문에 깨지는 일도 있습니다. 거기에 색깔이 안 맞는다고 다 짜 놓은 판을 엎는 경우도 허다하고요.”
“그러니까 더 기획사가 중요하죠, 저는 명품 기획사를 찾고 있어요.”
장미령이 고개를 흔들자 도훈은 눈매를 좁혔다.
장미령은 아무래도 명품에 중독된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옷과 장신구뿐 아니라 모든 사물을 명품과 명품이 아닌 것으로 구분하는 심각한 중독이었다.
장미령의 표정은 냉랭하기만 했다.
이곳에 올 때부터 결심하고 온 듯 보였다.
도훈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박수호가 낀 5인 그룹과 그가 없는 4인 그룹을 머릿속에 그려 봤다.
현재 상황으로는 5인이 최고긴 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장미령에게 다가왔다.
“혹시 수호 엄마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