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다음 날 아침.
도훈은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뜻밖에 먼저 일어나 있는 친구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현빈이었다.
주현빈은 벌써 말끔하게 세안을 끝낸 뒤 주방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도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조용히 주현빈의 뒤에 섰다.
순간 도훈은 눈을 크게 떴다.
주현빈의 앞에는 된장찌개가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끓고 있었다.
거기에 멸치볶음과 잡채까지 벌써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누가 보면 전업주부인지 알겠네.”
“앗, 일어나셨어요?”
“항상 아침은 네가 한 거야?”
도훈이 놀란 듯 물었다.
사실 도훈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도훈은 슬쩍 우시원과 서찬휘가 잠이 든 방을 바라봤다.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팀을 위한 희생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들보다 두 시간은 더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야 하니 말이다.
도훈의 표정을 본 주현빈이 어색하게 웃었다.
“처음에 번갈아 가면서 했는데, 그냥 제가 한다고 했어요. 시켜 먹을 때 빼고는 그냥 제가 주방을 맡기로 했어요.”
그 모습에 도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일은 분담해서 해야지. 혼자서 맨날 아침 준비를 하면 몸이 버텨?”
“형들은 잘못 없어요. 이건 순전히 제가 원해서 아는 거예요?”
“네,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도 아니고 왜 혼자서 하는데?”
도훈의 말은 진심이었다.
어제는 들어오자마자 짐 정리도 안 하고 혼자 책부터 펴려는 모습이 살짝 이기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반대였다.
계속해서 아침 식사를 맡고 있었다니!
얘기를 들어 보면 아침 식사만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주현빈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제 입맛이 조금 까다로워서요. 제가 자취만 3년째거든요. 친구들 사이에서는 별명이 별주부예요.”
“별주부? 자라처럼은 안 생겼는데…….”
말끝을 흐린 도훈은 주현빈의 이곳저곳을 살폈다.
별주부라면 분명히 별주부전의 자라밖에 더 있겠는가?
그때 주현빈이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전업주부 같다고 해서 생긴 별명이에요 별난 주부라고 해서 별주부요. 자매품 구주부도 있어요. 구주부는 주부 구단의 준말이래요. 친구들이요.”
“푸웁.”
도훈은 본능적으로 웃음을 토해 냈다.
얘기를 들어보니 걱정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요리에 나름대로 자부심도 있고 애정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현빈은 도훈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솔직히 웬만한 백반집 음식도 제 입맛엔 안 맞아요.”
“그래서 네가 하는 거라 그거네.”
“네, 밥은 제가 하고 청소는 찬휘 형 담당이에요. 계획표 관리하고 잡일은 선우 담당이고요. 그리고…….”
주현빈은 계속 자신들의 역할을 소개했다.
마치 어제 도훈이 숙소에 관해서 설명하는 것을 따라 하는 것 같았다.
랩처럼 설명을 쏟아 내던 주현빈이 깜짝 놀라 뒤돌아섰다.
주현빈은 재빨리 가스 불을 끄고 한숨을 쉬었다.
“큰일 날 뻔했네요. 조금만 더 지났어도 맛이 변할 뻔했어요. 선우랑 형들 좀 깨워 주실래요.”
“내가 이 집에서 할 역할은 자명종이구나.”
“그냥 아날로그 알람으로 해 주세요. 자명종이라고 하니 무슨 조선 시대에 와 있는 것 같잖아요, 헤헤.”
“그래, 그러마. 그런데 내가 할 일은 진짜 없는 거야?”
“그냥 형이 있는 것만으로도 안정이 되니까요.”
주현빈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그래 고맙다.”
“참, 우리 막내는 어떻게 됐어요?”
“막내라…….”
도훈은 살짝 말끝을 흐렸다.
주현빈이 말한 막내는 20호실의 막내였던 박수호를 말함이었다.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도전했던 박수호는 우시원과 서찬휘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았다.
박수호가 보여 준 능력에 비교해서 그에 대해서 딱히 오는 감은 없었다.
하지만 블랙홀 멤버 모두가 박수호를 보고 싶다고 한다.
지금은 기존 소속사와도 이미 계약이 끝난 상태였다.
블랙홀의 마지막 멤버로 모두가 영입을 바라는 상태였다.
이에 대해서는 강시혁도 동의했다.
평균 이상의 보컬, 댄스, 외모, 랩 모든 게 가능한 멤버였다.
거기에 살짝 모성애를 자극하는 외모도 강시혁의 눈을 사로잡는 데 한몫했다.
문제는 그 부모였다.
도훈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수호 부모님은 이따 만나기로 했어.”
“아, 그럼 수호가 우리 팀으로 오는 거예요?”
“오게 만들어야지.”
“땡큐요, 형.”
“일단 나는 저 녀석들 깨울 테니 수고해라.”
말을 마친 도훈은 핸드폰을 꺼내 기상나팔 모드로 전환했다.
나중에 훈련소에 입소하면 아침마다 들을 음악이었다.
따따, 따다단.
잠시 후 커다란 식탁에 모여 앉자 서찬휘가 가장 먼저 수저를 들었다.
옆에 있던 우시원은 서찬휘의 숟가락을 재빨리 낚아챘다.
“야, 형이 먼저 숟가락을 든 다음에 먹는 거야. 너는 밥상 예절도 몰라.”
“우시원, 또 딴지를 거는구나. 형은 그런 예의는 싫어한단 말이야. 꼭 형을 부모님처럼 대하면 형이 얼마나 부담스럽겠어.”
“그래도 예의는 지켜야지.”
“아, 미치겠네. 형! 시원이 말이 맞아요, 제 말이 맞아요?”
둘을 동시에 도훈을 바라봤다.
도훈은 어이기 없다는 듯 둘을 바라보며 숟가락을 들었다.
“됐다, 다들 밥 묵자.”
도훈의 말에 숟가락을 들려 준비했던 장선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형,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말투인데요.”
“맞아, 드라마에서…….”
그렇게 화기애애한 식사가 시작됐다.
도훈은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뜬 순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주부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자랑을 늘어놨던 주현빈의 음식 솜씨 때문이었다.
이건 나중에 음식점을 차려도 먹고는 살 수 있는 수준의 요리 솜씨였다.
조금 과장한다면 먹고사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돈을 긁어모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저기서 칭찬이 이어졌다.
“와, 역시 현빈이 음식 솜씨가 최고다.”
“사랑한다, 주현빈.”
우시원과 서찬휘가 동시에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식사가 끝나자 주현빈이 설거지를 위해서 그릇을 모았다.
그때 장선우가 손을 흔든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장선우가 슬금슬금 싱크대로 다가서자 서찬휘가 말렸다.
“장선우, 너도 오늘은 학교 가는 날이잖아. 일단 너희 둘은 등교할 준비해. 끝나면 바로 연습실로 튀어 오고.”
“아, 그거 형들한테 맡기기가.”
“급할 때 분담하기로 했잖아, 빨리 준비하고……. 참, 교복은 내가 어제 다려 놨다.”
“헉.”
주현빈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 모습에 서찬휘가 슬그머니 장선우를 바라봤다.
“네 교복도 다려 놨으니까. 입고 가.”
주현빈과 장선우는 서로를 바라봤다.
살짝 눈물이 고인 것이 감동한 표정이었다.
장선우와 주현빈이 울먹이는 얼굴 그대로 숙소를 빠져나가자 서찬휘가 도훈에게 다가왔다.
“형은 안 도와주셔도 돼요.”
“꼭 도와 달라는 압력 같은데?”
“아니에요, 진심이에요.”
“그래, 나는 집안일은 너희에게 맡길게. 이거 방세 내 월급에서 까는 거 알지?”
“헉, 진짜요?”
“진짜지, 이거 다 내 돈으로 내는 거야. 너희들 편하게 지내게 하려고 숙소까지 바꿨잖아.”
“기숙사잖아요, 그런데도 월세 내야 해요?”
“당연히 내야지.”
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반은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내는 월세이긴 해도 내는 것은 맞았다.
도훈은 커피 한 잔을 들이켠 후 메모를 남기고 숙소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오늘 박창성이 아이돌 메이커를 찍으러 오면 연습에서 꼭 보여 줘야 할 장면을 표시한 메모였다.
그 메모를 본 서찬휘는 고개를 갸웃하며 우시원을 바라봤다.
“이건 왜 연습하라고 하는 거지? 고 작곡가님 곡하고 머니 윌 씨 노래 연습하기도 바쁘잖아.”
“하긴, 나도 이해가 안 되지.”
그들이 보고 있는 메모에는 스타플레이어에서 방영되어 유명세를 치렀던 랩의 제목이었다.
당시에는 랩의 제목이 없었으나 이후에 구두 발자국이라고 부르기로 한 곡이었다.
암전된 상태에서 잠시 흘러나와서 스타플레이어 시청자들의 귀를 사로잡았던 바로 그 곡이었다.
그 곡은 당시 20호실의 연습생들이 불렀었다.
그 곡을 한지혜 피디가 몰래 삽입했던 것.
의문도 잠시, 서찬휘는 손의 휘휘 내저었다.
“뭐, 다 이유가 있겠지. 실장 형이 하는 일은 다 계획이 있잖아.”
“실장 형뿐 아니라 너도 다 계획이 있잖아.”
“내가 무슨 계획이 있는데?”
“혼자서 자문자답하는 거 말이야.”
“앗, 들켰다.”
“헛소리하지 말고 일단 우리도 빨리 준비하자. 선생님들 기다리겠다.”
우시원은 재빨리 일어났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우시원은 바람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우시원은 이번에 성공해서 도훈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도훈은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공무원 시험에 준비하다가 번번이 떨어지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군에 입대했을 것이다.
도훈을 만난 덕분에 이렇게 기회도 잡게 되었고 상상도 할 수 없이 좋은 환경 속에서 데뷔를 준비할 수 있었다.
* * *
그날 오후.
연습실에 다시 블랙홀 멤버들이 모였다.
장선우와 주현빈은 오전 수업을 마치고 유레카의 연습실로 바로 왔다.
넷이 모이자 연습실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고요했던 연습실이 다시 활기를 찾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박창성이 여기저기 손짓했다.
멤버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담으라는 신호였다.
그들을 카메라에 담던 박창성은 얼마 전 박수진 기자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아, 미치겠네.”
박창성은 자신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분명히 이른 시일 안으로 뭔가 터뜨릴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오늘까지도 폭풍전야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그때 누군가 박창성의 옆에 소리 없이 다가오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요, 선배?”
“헉, 언제 왔어? 그게 아니지. 스타플레이어는 어떻게 하고 여기에 왔어?”
“저도 사표 냈잖아요.”
“사표를 왜 내?”
“스타플레이어 촬영도 다 끝나고 시사교양국으로 복귀하라고 하길래…….”
살짝 말끝을 흐리는 한지혜의 모습에 박창성이 눈을 크게 떴다.
“대책도 없이 사표 내면 어떻게 해.”
“그냥 임제호 피디님한테 전화했어요.”
“전화하니까 뭐래?”
“케이넷으로 오라고 해서 왔어요.”
“진짜로 케이넷으로 왔다고? 대체…….”
“케이넷 대표님이 흔쾌히 수락했대요. 딱 한 시간 만에요. 그나마 어제 대표님이 이사한다고 정신이 없어서 늦어진 거래요. 그러고 보니 저도 인재는 인재였나 봐요.”
“흠.”
“참, 운미 씨도 같이 왔어요.”
“와, 그래도 되는 거야?”
“스타플레이어가 임시 팀이었잖아요. 시즌이 끝났으니 사표 내기에는 딱 좋은 시점이죠.”
“이거 참…….”
박창성은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돌렸다.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지금은 일을 해야 할 때였다.
그때 한지혜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선배, 그거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