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162화 (162/250)

(162)

의미심장하게 웃는 한수진의 모습에 박창성이 재빨리 물었다.

“아군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제가 이 일을 하면서 부탁받은 건 딱 하나였어요.”

“그게 뭡니까? 한 기자님.”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투자자를 도와줄 것! 그게 약속이었어요.”

“투자자요?”

박창성이 뜻밖의 말이 눈을 가늘게 뜨자, 한수진이 피식 웃었다.

“앗, 제가 실수 했네요. 그분은 투자자라고 하기에는 조금…….”

살짝 말끝을 흐리는 한수진 기자.

잠시나마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스쳐 지나갔다.

쌈닭이라는 별명에는 걸맞지 않은 미소였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투자자는 아니에요. 우리 직원들 사이에서는 키다리 아저씨라고 불러요.”

“키다리 아저씨요?”

“네, 키다리 아저씨 맞아요. 기자 정신이 외면받은 지금 우리한테 조건 없이 지원을 해 주시니 키다리 아저씨 맞죠. 참고로 그분을 뵌 적은 없어요. 다만 그냥 소설책 속에 키다리 아저씨 같아서 그렇게 부르는 거니까 오해는 마세요.”

“아까 조건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뭐, 조건이라고 해 봤자. 키다리 아저씨가 원하는 기사 취재 하나 하는 것뿐인데요, 뭐.”

“음.”

“중요한 건 그 기사마저도 팩트만 내보내기로 했다는 거죠. 그분은 우리 같은 기자에게는 신이에요.”

“한 기자님 같은 기자요? 그럼 다른 기자분도 계시는 거예요?”

“그렇죠, 신문사의 연예부 가 보셨어요?”

“뭐, 우리 쪽으로 취재를 오니 저희가 가 볼 일은 없죠.”

“한번 가 보세요. 대부분의 신문사 연예부에는 똑같은 사훈 하나가 적혀 있을 거예요.”

“사훈이라니요? 어떤…….”

“돈이 되는 기사가 진정한 기사다!”

“아, 일리 있는 말이네요.”

“저희는요. 진실에 목말라 있는 대중의 호기심을 채워 주기 위해 모였어요.”

“…….”

박창성은 순간 어깨를 살짝 떨었다.

한수진의 눈빛에서 일종의 광기를 봤기 때문이다.

지금 얘기해 보니 전에 돈이 안 통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누군가에 대한 미움보다는 진실을 향한 열망이 바로 취재의 원동력이었다.

돈을 배제한 진실은 이쪽 시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돈이 기본이 되는 진실만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니 한수진이 이 바닥을 떠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를 다시 이 바닥으로 불러들인 키다리 아저씨는 과연 누굴까?

순간 박창성은 그녀와 자신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실을 추구하다가 쫓겨난 그녀에게 누군가 자본을 대서 미디어 패스를 설립하게 했다라…….

이건 예능국에서 버림받고 갈 곳 없던 자신과 임제호를 스카우트해 준 케이넷의 대표와 같았다.

혹시?

박창성이 의문을 떠올릴 때 박수진이 입을 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비즈니스 좀 하죠.”

“비즈니스라면 어떤 거죠?”

“이 판을 키우셔야 박 피디님도 유리하잖아요. 아이돌 메이커의 방영일은 앞으로 한 달. 그때면 스타플레이어가 배출한 열 명의 아이돌이 한참 전국 투어를 하고 있을 때겠네요.”

“네, 그렇죠. 일단 파일럿 에피 형태로 내보내고 상황을 볼 겁니다. 이번에 안 되면 방영 일자를 연말로 바꿔야겠죠.”

“제가 이번에 터뜨릴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박수진은 눈을 반짝이며 상체를 내밀었다.

갑자기 다가오는 박수진 기자 덕분에 박창수는 몸을 의자 등받이에 최대한 기댔다.

그 모습에 박수진 기자가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귓속말하려고 그런 건데 그렇게 도망가시면 어떻게 해요?”

“녹음기 다 껐는데 왜 귓속말을 합니까?”

“우리 사무실에 있는 녹음기는 아직 못 껐거든요.”

“아 제기랄, 왜 저보고는 끄라고 해 놓고 기자님은 안 끄시면 어떻게 합니까.”

“녹음기가 어디 있는지 몰라요.”

“네?”

“모른다고요. 이렇게 어지러운데 녹음기가 어디 있는지 기억날 리 있나요?”

“정리 좀 하시죠.”

“옛말에 그런 말이 있죠.”

“무슨 말이요?”

“적을 속이려면 나부터 속이라는 말이요. 도둑이나 적이 오면 여기서 뭘 훔쳐 갈 수 있겠어요?”

“흠.”

박창성이 헛기침을 했다.

일단은 그녀의 말이 맞았다. 원하는 자료 때문에 이곳에 왔다고 해도 훔쳐 갈 수 없었다.

그만큼 난장판이었으니 말이다.

“이게 다 기자님이 의도하신 거리고요?”

“의도는 아닌데 결과만 좋으면 됐죠, 뭐.”

“무슨 결과가 좋습니까? 이런 식이면 기사도 못 쓸 것 같은데요.”

“그래도 정보는 다 모았어요. 혹시 그거 아세요?”

“뭘 말입니까?”

“임제호 피디와 박 피디님이 왜 스타플레이어에서 쫓겨났는지요?”

“…….”

“뭐, 감은 잡고 계시겠지만, 두 가지 힘이 작용했어요.”

“어떤 힘인지 궁금하네요.”

“하나는 SW의 압력이 있었어요.”

“뭐, 그건 가능하겠네요.”

“또 하나는 미라클의 압력이고요.”

“미라클이요? 혹시 대기업 미라클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미라클이 구멍가게는 아니죠.”

“미라클이 왜 선배와 저를 쫓아냅니까?”

“다루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거죠. 박 피디님과 임제호 피디님은 회사에서 원하는 방향을 자꾸 틀었어요.”

“회사에서 원하는 방향이 뭔가요?”

“유레카의 파멸이요.”

“네?”

“그냥 그렇게만 알고 계세요.”

“유레카는 미라클의 계열사잖아요.”

“정확히는 미라클 회장의 지분이 들어가 있죠. 이제는 거의 독립한 상태예요.”

“그래도 가족인데 왜?”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이 뭘 하든 신경 쓰는 사람은 없는 법이잖아요. 즉, 집안싸움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유레카를 치라는 것을 거부했다고 쫓겨났다는 거네요.”

“네.”

“그게 사실이라면 당장이라도…….”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박수진이 끼어들었다.

“당장 국장이나 방송사 대표 만나서 따지시게요?”

“따져야죠.”

“지금 계신 곳도 연봉도 많이 받고 스카우트 되신 거잖아요. 그런데 전 회사에서 그걸 따진다면……. 그걸 보통을 무리수라고 하죠.”

“아, 무리수…….”

박창성은 박수진의 말을 곱씹었다.

그녀의 말대로 무리수가 맞았다.

순간 박창성의 머릿속에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그것은 박수진 기자가 자신보다도 그 당시 상황을 더 잘 안다는 점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걸 다 아시는 겁니까?”

“그러니까 기자죠.”

“흠, 그것도 그렇지만 이해가 안 되네요.”

“그런 영업 비밀을 첫 미팅에서 가르쳐 주는 사람도 있나요?”

“…….”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일단 계획부터 세워 보죠.”

박수진 기자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널린 서류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아, 어디 갔지……. 여기 있네요.”

한참을 뒤적이던 박수진이 뭔가를 찾은 듯 눈을 빛냈다.

박수진 기자는 서류를 한 장을 박창성에게 건넸다.

“이게 요번 주에 나갈 저희 기사예요.”

“이걸 제게 주시는 이유가 뭐죠?”

“그래야지 아이돌 메이커를 제작하시는 데 편하실 거 아니에요.”

박수진 기자는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창성이 멍하지 바라보자 박수진이 말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거예요? 저도 이제 일해야 해서요.”

박창성은 박수진에게 떠밀려 사무실을 나왔다.

다시 건물 밖으로 나온 박창성은 2층 창문에 새겨진 상호를 바라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조금 전 그녀와 대화한 한 시간은 다소 낯설었다.

마치 대낮에 도깨비를 만난 느낌이었다.

*    *    *

같은 시간, 장경자의 저택.

거실의 소파에 앉은 이세훈은 자기 아들을 흡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간만에 성과를 보였구나, 이도준.”

“말씀 감사드립니다. 대표님.”

“둘이 있을 때도 대표님이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래, 듣기 좋구나.”

이세훈이 희미하게 미소를 짓자 이도준은 고개를 재빨리 돌렸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사실 요즘 들어 웃을 일이 없었다.

가문의 떨거지라고 생각했던 사촌 동생에게 처음 당했을 때는 그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당했을 때도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는 했어도 이도준의 신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같은 일이 반복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할머니인 장경자의 눈 밖에 나자 후계 구도까지 달라졌다.

그게 요즘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이도준은 어깨를 펼 수 있었다.

유레카의 발을 꽁꽁 묶어 놓고 나니 나머지 일을 술술 풀렸다.

그때 엄지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오셨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리고 등산복 차림의 장경자가 걸어와서 소파에 앉았다.

“시간 맞춰서 오라니까 왜 이렇게 일찍들 왔어?”

“배고파서 일찍 왔습니다.”

배를 만지며 너스레를 떠는 이세준을 보자 장경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밥 먹자고 한 적 없는데, 왜 설레발을 치고 그래.”

“어머니, 아들이 왔는데 밥 한 끼도 안 주실 겁니까?”

이때만큼은 그룹의 대표가 아니었다.

그 모습에 장경자가 손을 저었다.

“밥은 알아서 차려 먹고 본론부터 말하자고.”

“네, 말씀하시지요. 도준이도 이제는 준비된 것 같습니다.”

“도준이 얘기가 왜 나와?”

“지분 이야기하려고 부르신 거…….”

“아니야, 지분 얘기는 아니고 도훈이 회사 얘기하려고 부른 거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유레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요즘 무분별한 투자로 간당간당한다고 들었는데 드디어 사고를…….”

“사고는 무슨 사고?”

“지금 상황이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 스타플레이어라는 프로그램에서 설치던 것도 저희가 막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거기에 아이돌 그룹 만든다고 투자한 돈은 어떻고요?”

이세훈은 랩을 하듯 도훈의 잘못을 나열했다.

그것을 듣던 이도준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유레카를 프로그램에서 삭제시킨 것은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업인으로서의 체면이었다.

미라클 회장의 손자가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다.

그때 장경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너였구나.”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세훈이 놀란 듯 다시 묻자 장경자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건 됐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도훈이가 독자적인 경영권을 가지고 싶다고 하더구나.”

“독자적인 경영을 하겠다는 건 미라클 그룹의 지원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는 찬성입니다, 어머니.”

이세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장경자는 엄지연에게 눈짓했다.

“나머지는 엄 비서가 알아서 해.”

장경자는 팔짱을 끼고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한발 뒤로 물러났다.

물론 이도준도 이어진 엄지연과 이세훈의 대화에는 끼지 못했다.

이도준은 유레카의 독립을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사자가 자신의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리는 것과도 같았다.

미라클의 도움이 없다면 유레카는 일이 년 내에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 도움이 아닌 악의적인 손길을 뻗친다면?

그 기간은 앞당겨질 터였다.

*    *    *

유레카의 연습실에서 블랙홀의 안무를 지켜보던 도훈이 뒤통수를 어루만졌다.

“아, 왜 뒤통수가 이렇게 얼얼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