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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성이 태블릿에 뜬 글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게 뭐예요? 선배님.”
“뭐긴 뭐야, 트리거지. 박 피디 자세히 읽어 봐.”
임제호가 방아쇠 당기는 시늉하자 박창성이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증거가 좀 부족한데요.”
“이런 기사가 괜히 터졌겠어? 그리고 여길 봐.”
“헉.”
박창성이 다음 글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스타플레이어의 촬영 현장에서는 특정 기획사의 연습생 죽이기가…….
기사의 끝에는 스타플레이어가 특정 소속사의 연습생을 밀어줬다는 몇 가지 증거를 나열했다.
밀어준 연습생이 있으면 피해 본 연습생도 일을 터.
그중 유레카의 연습생인 우OO와 서OO를 거론했다.
누가 봐도 우시원과 서찬휘였다.
순간 박창성의 눈이 빛났다.
이것은 아이돌 메이커에 뿌려질 MSG로 충분했다.
사골을 우리고 우려서 억지로 뽑아내는 것보다는 이렇게 기사가 터지면서 시청자의 눈에 드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선배님, 저 좀 나가 볼게요.”
“오늘 쉬는 날이잖아. 스태프도 생각을 해야지, 너 하나 움직이면 오늘 모처럼 쉬는 그 친구들도 비상 걸린다.”
임제호는 손을 흔들며 박창성을 말렸다.
임제호의 말대로 책임자가 움직이면 그 밑에 있는 직원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직원이 따라가면 그 아래 사람도 움직일 수밖에 없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재난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전에는 괜찮았지만, 박창성은 이제 프로그램 하나를 책임지는 제작 피디였다.
박창성도 그 말뜻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네, 그러니까. 비밀로 해 주세요.”
말을 마친 박창성은 뒤쪽에서 휴대용 캠코더 하나를 꺼내더니 커다란 백에 집어넣었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처럼 비장한 눈으로 임제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살아서 돌아오겠습니다.”
“안 돌아와도 돼. 그러니까. 이따 들어오더라도 나 잠 깨우지 마.”
“아, 선배 너무하시네, 이 정도의 결의를 봤으면 조금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칭찬은 MBS에서 나오면서 평생 할 칭찬 다 했잖아. 그러니까 나 잠 좀 자자.”
임제호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케이넷과의 계약은 진짜 신의 한 수였다.
케이넷의 대표가 이렇게 막강한 제작 권한을 줄지는 상상도 못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예능국장으로 올라간다고 해도 못 누릴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 * *
잠시 후.
박창성 경기도 인근의 상가 건물의 이 층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이 층의 한쪽에는 조그맣게 상호가 나와 있었다.
<미디어 패스.>
박창성 간 곳은 해당 기사를 작성한 인터넷 신문사였다.
미디어 패스는 얼마 전부터 폭로성 기사를 간간이 내보내고 있는 곳이었다.
이 층으로 올라간 박창성은 미디어 패스의 앞에서 잠시 당황했다.
밖에서 보기에도 초라해 보여서 이쪽이 맞나 의심하며 올라왔다.
막상 올라와 보니 미디어 패스의 상호는 어디에도 없었다.
박창성은 다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201호라…….”
박창성은 미디어 패스의 기자를 만나기 위해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담당 기자는 사업자 등록증에 나와 있는 주소 대신 이곳을 가르쳐 줬다.
박창성은 가장 구석에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다른 곳에는 숫자가 있는데 그곳만 숫자가 없었다.
대신 찻집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박창성은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그가 막 문을 열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덜컹 열렸다.
박창성은 깜짝 놀라 뒤쪽으로 물러나다가 급기야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앗.”
당황한 박창성은 자신의 몸보다 먼저 백에 들어있는 카메라를 확인했다.
이 카메라를 오늘 쓸 일도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닌가.
카메라를 확인하고 있는 박창성의 시야에 가느다란 하얀 손목이 들어왔다.
“손잡으세요.”
“괘, 괜찮습니다.”
“보니까.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일단 잡고 일어나세요.”
“알겠습니다.”
박창성은 카메라를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메라가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 박창성은 그제야 상대를 바라봤다.
“헉.”
박창성의 눈이 커졌다.
상대는 서른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였다.
박창성이 이제까지 본 친구 중에서도 제법 예쁜 축에 속하는 것으로 봐서 느낌상 이 바닥을 좀 먹어 본 것이 틀림없었다.
박창성은 앞쪽에 길림 전통찻집이란 상호와 자신의 핸드폰에 나와 있는 문자를 번갈아 봤다.
그 모습에 상대가 한숨을 쉬었다.
“여기 맞아요. 미디어 패스 찾아오신 거라면 정확히 오신 거예요. 뭔 남자가 의심이 그렇게 많아요.”
“그럼 그쪽이 미디어 패스의 한 기자님이시라고요?”
“네, 한수진 기자 맞아요. 일단 들어오세요.”
잠시 후.
박창성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사이에 두고 상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일단 들어와서 보니 노트북과 서버용 데스크톱 몇 대.
거기에 카메라 렌즈들이 즐비한 것으로 봐서 미디어 패스가 맞긴 맞는 것 같았다.
그때 한수진이 턱짓하며 물었다.
“차 맛은 어때요?”
“확실히 찻집이라서 그런지 맛있네요.”
“그거 티 백이에요. 유통기간은 지났어도 먹을 만하더라고요.”
“앗.”
당황한 박창성이 재빨리 찻잔을 내려놨다.
“농담이에요. 괜히 차 뱉지 마세요. 주변에 자료들 다 날아가요.”
한수진은 탁자 위에 널브러져 있는 메모 용지를 가리켰다.
박창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미디어 패스라면 폭로성 기사로 요즘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인터넷 신문사였다.
그런데 막상 방문해 보니 무슨 소꿉장난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저기 메모장이 널려 있어 필요한 자료를 찾는다고 해도 반나절은 걸릴 것 같았다.
인터넷 신문사의 가장 큰 장점이 뭔가.
바로 스피드였다.
그런데 그런 스피드와는 전혀 거리가 먼 사무실이었다.
마치 영화 속에 자주 묘사되는 셜록홈즈의 사무실 분위기?
자기가 무슨 천재도 아니고…….
사무실을 쓱 살펴보던 박창성이 물었다.
“한 기자님, 그런데 왜 상호 하나 없어요.”
“여기는 임시 사무실이니까요. 옮기는 사무실마다 때 빼고 광내면 어떻게 일해요.”
“그러니까. 왜 사무실을 그렇게 옮기냐는 겁니다.”
“우리 콘셉트 잘 아시잖아요.”
“콘셉트요?”
“한군데서 죽치고 있다가는 칼침 맞기 딱 알맞아요. 기사 보시면 아시겠지만, 우리 기사의 팩트 뒤에는 꼭 한 단어가 따라다니죠.”
“폭행이요?”
“네, 팩트 폭행. 아마 우리 기사를 본 당사자는 아마 나를 죽이고 싶을걸요.”
“음. 그렇겠네요.”
“그건 그렇고. 왜 MBS의 스타플레이어는 저격하신 거예요?”
“사실이니까요. 앗, 그러고 보니 박 피디님도 당사자시구나. 이럴 게 아니라 일단 인터뷰부터 해요. 후속 기사가 다음 주쯤 나가야 하거든요.”
“네?”
박창성의 눈이 커졌다.
묘하게 꼬이는 느낌이 뒤통수를 자꾸 때리고 있었다.
자신은 아이돌 메이커 때문에 도움을 받으려고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인터뷰하자니!
이건 박창성의 계획에 없었다.
박창성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한수진이 빙긋 웃었다.
“제가 얼마 전에 개명했잖아요.”
“개명이요?”
“전에 하도 욕을 먹어서 이미지 변신 좀 하려고요.”
“개명하기 전 이름이 뭐였는데요?”
“한나리요.”
“하, 한나리라고요?”
박창성은 자신도 모르게 살짝 말을 더듬었다.
왠지 불러서는 안 될 이름을 입에 담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나라라면 자신도 기억이 난다.
눈만 마주쳐도 싸움이 난다고 해서 쌈닭이었다.
예쁘장한 얼굴과는 상반된 성격 때문에 이 바닥에서는 꽤 유명한 인물이었다.
한동안 안 보이기에 사람들은 시집가서 잘 사는 건 아닌가 했다.
사실 기자 경력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없는 것이 이 업계에서 적이 너무도 많았다.
화끈한 폭로 기사를 내보내는 것까지는 좋지만, 타협이라는 게 없었다.
아무리 특종이 걸렸다고 해도 보통은 협상이라는 것이 한두 번 오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쌈닭 한나리에게는 그따위 것은 없었다.
얼마나 성격이 급한지 그녀가 낸 단독 기사는 오타투성이였다.
일설에 의하면 그녀의 뇌에 거름망 자체가 없다는 소문도 있었다.
박창성의 표정을 본 한수진 기자가 말을 이었다.
“아, 제 소문 들으셨구나. 그거 90%는 다 거짓말이에요. 저를 모함하려는 사람들이 좀 많나요.”
“아, 그러셨구나.”
박창성은 영혼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박창성도 음악프로그램을 맡았을 때 한수진 기자에게 뼛속까지 털린 적이 있었다.
당시 문제는 녹화가 다 끝난 음악방송에서 생겼다.
모든 편집이 끝나고 다음 날 녹화분만 내보내면 끝나는 일인데. 한수진이 당시 그 음악방송에서 진행을 맞았던 아이돌을 골로 보내 버린 것.
뭐, 잘 보낸 것은 맞았다.
하지만 딱 이틀만 늦게 터뜨렸어도 방송에는 지장이 없었다.
녹화분은 방송하고 다음 촬영 때 임시 MC로 교체하면 될 일이니 말이다.
당시 MBS나 아이돌 소속사 측에서도 한수진에게 접촉했었다.
한수진은 완벽한 단호박 그 자체였다.
그녀는 통화도 끝나기 전에 기사를 송출시켰다.
그 뒤에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들이 이어졌다.
그때만 생각하면…….
박창성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부득 갈았다.
한수진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박 피디님, 그렇게 감정이입 안 해 주셔도 좋아요. 제가 성격이 좋아서 다 잊고 살 거든요.”
“아, 성격이 좋으시구나.”
“딱 보면 몰라요?”
“아까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그럼, 이따 술이나 한잔하실까요?”
“…….”
“사심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한수진 기자는 손을 휘휘 저으며 안심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박창성은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괜히 술김에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하다가는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뜨거운 커피 속에 떨어진 마시멜로처럼 흔적도 안 남을 수 있었다.
“참, 인터뷰부터 하시죠.”
“인터뷰는 나중에 하시고 스타플레이어에 관한 내용이 궁금하네요.”
“아, 그 내용이요. 별건 아닌데, ARS 투표 조작이 의심되네요.”
“헉.”
박창성이 다시 입을 벌렸다.
ARS 투표 조작이라면 별것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케이블 방송도 아니고 지상파 방송 3사 중 하나인 MBS였다.
이걸 예능국장이 승인해 준다?
아니, 이 정도 일이면 방송국 대표까지 묵인해 줘야 하는 사항이었다.
이 내용이 밝혀진다면?
방송국이 흔들릴 정도의 상황이었다.
비명도 잠시, 박창성은 재빨리 물었다.
“한 기자님, 증거는 있어요?”
“일단 녹음기부터 꺼 주세요. 그리고 대화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아…….”
박창성은 자신의 가방을 바라봤다.
카메라뿐 아니라 녹음기도 몇 개 챙겨 왔다.
박창성은 가방에 있던 녹음기를 하나씩 꺼내서 정지 버튼을 눌렀다.
그 모습에 한수진 가지가 박창성의 재킷을 가리켰다.
“그쪽에 있는 볼펜도 녹음기잖아요. 그것도 꺼 주세요.”
“이건 완전히 검문받는 느낌인데요.”
“아군이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