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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우가 영상을 뒤로 돌리자 눈 깜짝할 사이에 조금 전 대화가 재생됐다.
순간 서찬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쪽을 슬금슬금 보더니 재빨리 동생들의 손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문이 덜컹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도훈이었다.
도망치던 서찬휘가 멈추자 뒤쪽에서 따라붙던 주현빈과 장선우도 다급하게 정지했다.
그 가속도에 중심을 못 잡고 나자빠지는 주현빈.
그때 도훈이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연습이 좋아도 이렇게 무리하면 안 되지.”
“아, 죄송합니다. 실장님.”
“그냥 형이라고 하라니까.”
“아, 형.”
주현빈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도망가던 서찬휘가 입을 삐쭉 내밀면서 끼어들었다.
“실장 형. 얘네들 연습한 게 아니라 저 잡으려고 쫓아온 거예요.”
“아, 찬휘 형이 왜 그 얘기를…….”
주현빈이 머리를 감싸 쥐며 서찬휘를 노려봤다.
그 모습에 도훈이 물었다.
“그건 무슨 얘긴데.”
“그러니까…….”
서찬휘가 자신이 강시혁에게 부탁한 것을 술술 털어놨다.
그 얘기를 다 듣고 난 도훈은 배를 잡았다.
순간 우시원이 끼어들었다.
“왜 그렇게 웃으세요, 실장 형.”
“갑자기 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나서…….”
말을 하려던 도훈은 슬쩍 주위의 눈치를 봤다.
생각해 보니 전생의 기억들이었다.
멤버는 조금 달라진 것 같지만, 강시혁과 인연을 만든 아이돌은 블랙홀과 비슷했다.
십 년 가까이 있으면서 서로 불협화음이 하나도 없었다.
도훈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친형제 같아서 그렇지.”
“실장 형, 그거 욕 아닌가요? 저 우리 친형하고는 말도 안 해요. 그 인간 생각하니 괜히 열나네요.”
서찬휘가 손부채질하며 얼굴 식혔다.
그때 장선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친형이 없어서 그런지 찬휘 형이나 시원이 형이 친형같이 느껴질 때가 많아요.”
“에?”
서찬휘가 살짝 놀란 듯 장선우를 바라보며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려놨다.
“자식, 그럼 내가 그냥 친형 해 줄게.”
“고마…….”
장선우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서찬휘가 헤드록을 걸었기 때문이다.
도훈이 보는 앞에서도 시끌벅적한 블랙홀의 맴버들.
그때였다.
우시원이 서찬휘의 등을 콕콕 찔렀다.
서찬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왜 그래 우시원?”
“저기 봐 봐.”
우시원이 서찬휘의 뒤쪽을 가리켰다.
하지만 우시원은 장선우를 놓지 않았다.
뭐, 장선우도 장난인 걸 아는지 벗어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서찬휘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에이, 그래도 나는 안 놓을 거야.”
“아니, 저기 카메라 좀 보라고, 스타플레이어 때보다 더 많아.”
“그게 무슨 말이야?”
서찬휘는 장선우에게 걸었던 헤드록을 풀고 앞을 바라봤다.
우시원의 말대로 스타플레이어 때보다 더 많은 카메라가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두를 비추고 있었다.
블랙홀의 멤버 모두는 멍하니 카메라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도훈이 다급하게 외쳤다.
“오늘부터 메이킹 필름 촬영이라고 했잖아!”
“언제요?”
서찬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도훈이 말을 이었다.
“강 피디님 통해서 전달했는데 못 들었어?”
“아, 저희는 못 들었어요.”
“보나 마나 강 피디가 말 안 했네.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강 피디가 너희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때는 무슨 말인가 했는데…….”
“헉.”
서찬휘가 비명을 지르며 주변을 바라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찬휘는 다급하게 물었다.
“언제부터 찍은 거예요?”
순간 뒤쪽에서 누군가가 나왔다.
“오전부터 와 있었지. 숨어 있느라고 힘들었어. 서찬휘 맞지?”
활짝 웃는 사내의 모습에 서찬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뵌 것 같은데…….”
“아마 스타플레이어 촬영 현장에서 봤겠지. 그때 파주에 있는 현장에 자주 나갔으니까. 그때 봤을 거야.”
그는 다름 아닌 박창성이였다.
“헉, 맞다. 거기 계시던 피디님이시네요.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신 거예요? 혹시 탈락자들 어떻게 지내나 인터뷰하러 오신 거예요?”
“하하, 여전히 쾌활하네. 보기 좋아. 나는 이제 MBS와는 상관없어. 케이넷으로 스카우트 됐거든.”
“헉, 진짜요?”
“그래, 첫 프로그램으로 맡은 게 메이킹 필름이야. 참, 그러고 보니 정식 명칭이 있었지. 정확히는 아이돌 메이커.”
“아, 아이돌 메이커여? 이름 좋네요. 딱 들어 보니 저희 데뷔는 확정된 거네요.”
“그야, 우린 모르지. 그냥 너희들의 흥망성쇠를 다루는 게 우리 목표야. 그래서 대본이라든지 그런 게 전혀 없으니까, 평소에 하던 대로 해.”
“하던 대로요?”
질문을 던진 서찬휘는 왠지 몸이 굳어지는 것만 같았다.
사실, 스타플레이어에서 탈락하고 가장 좋았던 것이 카메라가 없다는 점이었다.
중요한 것은 일 인당 감당해야 할 카메라의 숫자가 더 늘었다는 점이다.
당황한 서찬휘의 모습에 박창성이 말했다.
“혹시 카메라 울렁증 있는 건 아니지?”
“아, 아니에요.”
“그런데 왜 더듬어?”
“갑자기 이렇게 들이닥치시니 그렇죠.”
서찬휘는 뒤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자신과는 다르게 모두가 눈을 빛내고 있었다.
박창성이 손뼉을 치며 모두에게 외쳤다.
“그럼, 지금부터 촬영을 시작할 테니, 원래 하던 대로 하면 돼. 절대 카메라는 의식하지 말고.”
“네.”
서찬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자 박창성은 도훈을 바라봤다.
“이 실장님. 이 친구들 인성 보고 뽑은 거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박 피디님.”
“아까 촬영한 분량 봤는데, 고지를 안 하고 촬영한 분량에서도 욕이 한 번도 튀어나오지 않더라고요. 솔직히 스타플레이어에서도 욕 쳐 내느라고 눈이 빠졌거든요.”
“스타플레이어요?”
“이게 편집할 때는 괜찮았는데, 나중에 자칭 전문가들이 음원 분석해서 밝혀내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래서 촬영 때부터 방송에서 문제가 될 만한 행동이나 언어는 체크하는데, 저 친구들은 완벽하네요. 다만 문제가…….”
박창성은 슬쩍 블랙홀의 멤버들을 다시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문제가 될 만한 거 있으면 미리 말해 주세요.”
“이게 너무 밋밋하다고 할까요? 아까처럼 장난치고 연습하고 하는 장면은 오늘 하루면 충분해요. 뭔가 굴곡이 필요한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필요한 사건들은 앞으로 뻥뻥 터질 테니까요.”
“네?”
“제가 심심하지 않게 해 드릴 테니 저만 믿어요.”
“실장님을 믿으라고요? 혹시 저 친구들 X파일 같은 거 가지고 계신 건 아니죠?”
“쟤들이 무슨 X파일이 있겠어요.”
“그럼, 그 말씀은 뭐에요?”
“그건 나중에 아실 거예요. 이번 프로그램은 우리 애들 데뷔 때까지잖아요.”
“그렇죠.”
“천천히 기다리시다 보면 좋은 장면들 많이 나올 겁니다.”
“그럼 실장님만 믿겠습니다.”
박창선은 도훈에게 고개 숙이며 미소 지었다.
아이돌 메이커는 자신이 케이블로 옮기고 나서 맡은 첫 번째 프로그램이었다.
박창성은 케이넷으로 스카우트 되면서 적지 않은 계약금을 받았다.
사실 왜 그리 많은 계약금을 줬는지 모를 정도였다.
옛말에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장수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거는 법이라고 말이다.
박창성은 지금 그런 마음가짐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다.
지상파와 케이블이 시청률 측면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꼭 스타플레이어의 시청률은 넘고 싶었다.
아니, 넘어야 했다.
그래야 문동훈이라는 굴러 들어온 돌에 물러났던 치욕을 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케이넷의 대표는 어찌 자신과 임제호의 마음을 알고 그렇게 손을 내밀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박창성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대표가 누구든 자신을 알아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때 뒤쪽에서 황수영이 캔 음료를 제작진들에게 돌리고 있다.
생각해 보니 케이넷과 다리를 놔준 것이 황수영과 도훈이었다.
역시 유레카와는 인연이란…….
박창성은 흐뭇하게 웃었다.
* * *
이 주 후.
스타플레이어가 성황리에 막을 내리고 10명의 아이돌 그룹이 결성되었다.
그들은 프로젝트 기간 중 SW의 소속으로 활동할 것이며 결성 기념으로 첫 콘서트를…….
박창성은 태블릿에 뜬 기사를 읽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싸움에서 MBS는 SBC를 완벽하게 압도했다.
박창성의 속이 쓰린 것은 자신과 임제호가 만들어 놓은 판에 문동훈이 숟가락 하나만 올려놓고 그 모든 공을 가져갔다는 점이었다.
“아이고 머리야.”
그때 맞은편에 앉은 임제호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다.
“강 피디, 마음을 비우라니까.”
“어떻게 마음을 비웁니까? 저렇게 떴는데요. 거기에 이 실장님은 아이돌 메이커에 좋은 소식 있을 거라면서 아직도 소식이 없어요.”
“아, 그 친구…….”
임제호는 도훈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거짓말할 친구는 아니니 기다려 봐.”
“네, 알겠습니다.”
박창성은 보이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블랙홀이 상품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스토리가 너무 빈약했다.
사실 이런 다큐멘터리 장르의 프로그램이 대박 치려면 개개인의 숨겨진 스토리가 중요했다.
그런데 유레카에서는 그들의 스토리에 대해서는 철저히 막고 있다.
다만, 때가 되면 오픈할 것이라는 이야기뿐이었다.
개인사를 감추고 어떻게 아이돌 메이커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처럼 제작진이 쉬는 날에도 그들의 숙소와 연습실 그리고 휴게실에서는 수많은 카메라가 녹화를 나타내는 빨간 불빛을 빛내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일상이 반복 재생을 하는 것처럼 굴곡이 없다.
이것이 지금 박창성이 부딪친 최고의 난관이었다.
박창성은 이와 비슷한 프로그램을 진행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과 달랐다.
그룹에 해체되느냐 마느냐, 하는 수많은 갈림길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타났다.
멤버 둘이 주먹다짐을 하고 숙소를 나가기도 하고.
갑자기 부모들이 와서 멤버를 데려간 적도 있었다.
박창성은 임제호가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한강에 모인 이들 앞에 두 가지 공연이 펼쳐진다면?
옛 성현이 강의하는 것을 보겠느냐?
아니면 미친놈이 춤을 추는 것을 보겠느냐?
바로 어그로의 문제였다.
그런데 블랙홀의 경우 어그로가 너무 없었다.
데뷔 후 정상적으로 활동을 하면 분량이 나오겠지만, 데뷔전 모습에서 건질 분량은 하나도 없었다.
그때였다.
임제호가 다급한 표정으로 태블릿을 들고 달려왔다.
“박 피디, 이것 봐 봐.”
“아, 또 놀리시려고요?”
“에이, 내가 언제 놀렸다고, 박 피디.”
“선배는 MBS에 있을 때부터 저 놀리는 재미로 사셨잖아요. 맨날 지박령이라고 하면서…….”
“나 때문에 그 지박령 벗어났잖아. 여기로 왔으면 성공한 거지.”
“그건 그렇고 뭔데요?”
“여기 봐 봐.”
임제호가 태블릿을 내밀자 박창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내용을 보던 박창성의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