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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곳에 있던 친구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장님, 자꾸 놀리지 마세요.”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주현빈이었다.
주현빈은 까를로스와 도훈이 듀엣 무대를 가진 다음 날 투표에서 떨어졌다.
도훈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놀리는 건 아니고, 프로그램 참가 연습생이 이곳에 있다는 거 자체게 스포잖아. 그런데 영웅이 형이 자꾸 스포하지 말라니까 그러지.”
“저 말고 떨어진 친구들이 꽤 있어요. 그러니까…….”
그때 강영웅이 다급하게 달려와 주현빈의 입을 막았다.
“스포는 너 하나만으로도 충분해. 자꾸 펼치지 마!”
“아, 알겠습니다. 선생님. 흡.”
주현빈이 급하게 강영웅의 손을 피하며 외쳤다.
“나이 차이가 얼마나 난다고 무슨 선생님이야.”
강영웅이 주현빈을 쏘아보자 주현빈이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마구 내저었다.
“죄, 죄송해요. 그럼 뭐라고 불러야…….”
“그냥 형이라고 해.”
“알겠습니다. 영웅이 형.”
그때 까를로스가 외쳤다.
“모두 조용히 하고 집중!”
성악가 특유의 울림이 실내에 퍼지자 모두는 화면에 시선을 집중했다.
도훈은 어이없는 상황에 혼잣말을 뱉었다.
“역시 목소리 큰 사람이 왕이군.”
“쉿!”
주현빈이 검지에 입술을 갖다 댔다.
잠시 후.
프로그램의 끝을 알리는 자막이 하단에 나타났다.
순간 강영웅이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던 중 강시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강영웅이었다.
“이거 뭔가 빠진 것 같지 않아? 꼭 탄산 빠진 콜라 맛 같은 느낌인데.”
“네, 맞습니다. 뭔가 많이 빠졌어요. 이건 촬영 분량에 칼질을 한 게 아니라 아예 분쇄기에 넣고 간 수준인데요.”
강시혁의 말에 강영웅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도훈이 앉아서 뭔가를 보고 있었다.
강영웅은 자리에서 일어나 도훈에게 다가갔다.
“이도훈, 지금 한가하게 동영상이나 볼 때가 아닌…… 어?”
강영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도훈이 보고 있던 것은 지금 방송이 끝난 4회차의 미방영분 영상이었다.
다만 조금 이상한 것은 카메라의 움직임이 다소 거칠다는 점이었다.
마치 VJ가 핸디캠을 들고 같이 이동하면서 찍은 듯한 영상이었다.
거기에 다른 인물들은 거의 나오지 않고 도훈과 유레카의 멤버들만 나오고 있었다.
이어서 이번에 새로 합류한 주현빈의 무대가 나왔다.
순간 강영웅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 저 정도 실력으로 떨어졌다고?”
강영웅은 고개를 돌려 뒤쪽에서 어색하게 웃는 주현빈을 바라봤다.
스타플레이어 4회에서 봤던 공연을 쭉 나열한다면 중간 정도의 레벨이었다.
강영웅은 주현빈이 스타플레이어에서 실력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리라 확신했다.
그때 도훈이 씩 웃으며 답했다.
“형이 생각해도 이상하죠.”
“그래,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저도 이제 준비하려고요.”
“무슨 준비를 해?”
“저희도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을 준비해야죠.”
“헉. 무슨 프로그램을 준비해. 지금 스타플레이어 하고 있잖아.”
“오디션 프로그램 말고요.”
“…….”
강영웅이 고개를 갸웃하자 도훈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시선이 모이자 도훈은 황수영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수영은 조용히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TV 화면이 바뀌었다.
그곳에서는 기획서 하나가 나왔다.
기획서 상단에 굵직한 폰트로 쓰인 제목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그때 황수영이 스크린 앞으로 나왔다.
모두는 고개를 갸웃하며 황수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가장 황당하게 바라보는 것은 유레카의 2팀장 한유라였다.
한유라는 잠시 시간을 내서 가벼운 마음으로 도훈의 집에 놀러 왔다.
처음 방문이기에 두루마리 휴지까지 사 왔는데!
갑자기 웬 프레젠테이션 화면이 나오자 황당했다.
거기에 발표를 진행한 인물은 다름 아닌 7팀의 신입 매니저였다.
7팀에서 신입이 아닌 자가 없었지만, 황수영은 한유라가 보기에는 햇병아리가 아니라 아직 부화가 안 된 달걀에 불과했다.
그런 황수영이 기획서의 첫 장을 띄워 놓고 앞으로 나오니 이해가 안 되었다.
모두를 쓱 살핀 황수영은 마치 무대 위의 진행자처럼 여유 있게 입을 열었다.
“메이킹 필름은 유레카와 저희 케이넷이 함께 협업하기로 약속한 프로그램의 명칭입니다.”
간단하게 소개를 한 황수영이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 주변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케이넷이 갑자기 왜 나와?”
“지금 무슨 일이지? 그런데 황 매니저가 왜 저걸 설명하고 있는 거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사람들이 당황하자 한유라가 번쩍 손을 들었다.
“왜, 황수영 씨가 유레카와 케이넷이 협업을 진행하죠?”
“그건 간단해요. 제가 케이넷의 관계자이기 때문입니다.”
“황수영 씨가요?”
“특별한 관계는 아니고 그냥 그쪽과 라인이 있어서요.”
순간 모두는 눈을 가늘게 뜨고 황수영을 바라봤다.
한유라는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케이넷은 음악 전문 채널.
케이블 채널 전체를 놓고 보자면 시청률이 높은 것은 아니지만, 연예기획사의 입장에서는 소홀히 할 수 없는 라인이었다.
예를 들어 무명의 연예인이 케이넷의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이유로 연예기획사에서는 케이블 채널 출신을 스카우트한다.
한유라는 도훈이 왜 황수영을 영입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물론 그것은 한유라의 착각이었다.
황수영과 도훈은 끈끈한 계약으로 묶인 상태였다.
황수영은 케이넷의 1대 주주.
바로 도훈이 2대 주주였다.
한유라는 단지 황수영을 케이넷 출신으로만 파악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황수영 씨가 정말 복덩이였네요.”
“감사해요, 팀장님.”
“일단 의문은 풀렸으니 계속 말해 보세요.”
한유라는 화면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황수영이 다행이라는 듯 뒤를 돌아 한숨을 내쉬었다.
소문이 날 때 나더라도 자신의 신분은 비밀이었다.
황백석 회장의 손녀라는 것이 들통이 나는 순간 이곳에서의 활동에 제한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한유라가 버튼을 눌러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메이킹 필름의 의미는 다 아시죠. 메이킹 필름은 제작 기간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메이킹 필름은 우리 유레카의 최초의 아이돌인 블랙홀의 데뷔 과정을 담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상이 될 겁니다.”
순간 강시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잠시만요, 유레카의 첫 번째 아이돌이라고 하셨나요? 그럼 우리 시원이하고 찬휘는…….”
“저는 실장님께 강 피디님이 이름을 정하셨다고 들었는데요.”
“…….”
강시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었다.
순간 얼마 전 농담처럼 했던 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모든 팬을 빨아드리는 블랙홀이 되자는 이야기를 누군가 했고 강시혁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기억이 떠오른 강시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시원이하고 찬휘가 들어갈 그룹이 블랙홀이라는 거죠?”
“네, 맞습니다.”
“네, 여기 있는 주현빈과 장선우도 포함이겠죠?”
“그건 강 피디님이 결정하셔야 문제라고 들었습니다. 이 자리는 프로그램 진행에 대한 발표가 아니라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황수영은 강시혁을 바라봤다.
사실 장선우는 지난주부터 연습을 시작했고 주현빈은 막 계약을 마친 상태였다.
도훈이 추천했다고는 하지만, 모두 강시혁이 먼저 눈도장을 찍은 친구들이었다.
왜, 그들이 그렇게 눈에 들어왔는지는 몰랐다.
강시혁이 그들을 주시한 것은 본능이었다.
N극이 S극을 끌어당기는 원리와도 비슷했다.
외모, 춤, 보컬 모든 것이 최상위는 아니었다.
100명의 연습생 중 유난히 눈에 들어왔던 것이 장선우와 주현빈이었다.
우시원과 서찬휘라는 기존의 데뷔조에 둘을 넣는 것은 강시혁도 원한 바였다.
강시혁이 뿌듯한 얼굴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것도 잠시, 강시혁은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 따가운 시선은 한두 명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모두는 강시혁을 쏘아보고 있었다.
강시혁은 깜짝 놀라 황수영에게 물었다.
“황 매니저,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피니님께서 답변을 안 해 주셨잖아요.”
황수영이 뒤쪽을 가리키자 강시혁이 황급하게 그곳을 확인했다.
황수영이 가리킨 곳에서는 주현빈과 장선우가 미어캣처럼 고개를 쭉 빼고 있었다.
그 모습에 강시혁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고민하는 게 아니라 현빈이와 선우가 합류하는 건 너무 당연하잖아요.”
순간 뒤쪽에 있던 주현빈과 장선우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그 웃음과 함께 다시 화면이 넘어갔다.
황수영이 이곳에서 자료를 발표한 이유는 간단했다.
메이킹 필름의 제작을 위해서 내일부터 바로 촬영팀이 유레카의 곳곳을 누벼야 하기 때문이다.
황수영은 조곤조곤 천천히 설명을 이어 나가며 그들과 일정을 조율했다.
뒤쪽에 있던 도훈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물론 도훈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매니저의 비밀 수첩이었다.
그중에서도 퀘스트가 나와 있는 부분.
[방송국을 장악하라 연계 퀘스트: 시청률을 장악하라 3단계가 진행 중입니다.]
시청률에 대한 퀘스트는 2단계가 끝이 아니었다.
며칠 전 3단계 퀘스트가 눈앞에 나타났다.
문제는 퀘스트의 수준이 너무 높다는 것이었다.
[3단계 목표: 시청률 100,000%]
[보상: 플래티넘 등급 룰렛.]
플래티넘 등급의 룰렛이라?
사실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플래티넘 등급의 복권을 한번 긁고 싶은 심정이었다.
[달성도: 2%]
지금 달성도는 미미했다.
케이넷과 알로 TV의 평균 시청률은 0.7%였다.
둘을 더하면 1.4%.
거기에 24를 곱하면 33.6%가 나온다.
하루에 대략 34%가 오른다고 하면 300일이 지나야 3단계 목표가 충족되는 것이다.
일단은 아무런 변동이 없는 상황에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수치를 보면 스타플레이어의 시청률은 3단계 목표를 충족시키는 자료에서 빠진 것 같았다.
문동훈이 도훈을 프로그램의 분량에서 삭제시키는 바람에 프로그램과 도훈의 상관관계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퀘스트를 달성하는 데 있어 방법은 간단했다.
도훈이 소유한 두 개 케이블 채널의 시청률을 높이면 되었다.
그 첫 번째 행보로 메이킹 필름을 선택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실패하더라도 블랙홀의 인지도는 어느 정도 올라갈 것으로 생각했다.
프로그램이 실패하면 멤버들의 이미지가 나락으로 갈 것이라 걱정했지만, 도훈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블랙홀은 곧 죽어도 뜰 그룹이었다.
만약 그들이 못 뜬다면 그것은 그들의 역량 부족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때 막 황수영의 설명이 끝났다.
대부분의 사람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상황.
강영웅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손을 들었다.
“잠시만요, 황 매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