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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테너, 까를로스가 출연을 결정했는데 방송국에서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마도 까를로스의 존재를 모르던 작가가 실수로 평범한 질문을 나열해 놨을 것이다.
그것도 잠시, 김주성이 새로운 큐시트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가면을 벗은 까를로스에게 던질 질문들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김주성은 인이어를 매만지며 메인 카메라의 옆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총괄인 문동훈이 있었다.
김주성은 문동훈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이거 진짜 질문 맞아요?”
인이어를 통해 흘러 들어오는 문동훈의 목소리.
―맞습니다, 그대로 질문해 주시면 됩니다.
“이런 거 질문하다가는 분량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드럽게 질문해 주세요.
“이걸 어떻게 이런 질문들을 부드럽게 던지나요, CP님?”
김주성이 다시 한 번 물었지만, 문동훈은 더는 답변하지 않았다.
김주성은 입을 급하게 막았다.
한숨 소리가 새어 나올까 걱정되어서였다.
그만큼 새로 받은 큐시트의 내용은 황당했다.
침묵이 무대 위를 휩쓴 것도 잠시, 김주성이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흠, 까를로스 씨는 어떻게 한국에 오시게 되었나요?”
김주성의 질문을 미리 나와 있던 통역이 전하자 까를로스가 얼굴 한가득 미소를 담았다.
“제가 좋아하는 친구를 따라 이곳에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그 친구라는 분이 마이클…….”
“네, LA 오케스트라를 맡은 마이클이 맞습니다.”
“와, 두 분이 친구셨다는 소문이 사실이군요.”
“소문이 아닌걸요, 웬만한 친구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흠, 그런데 말이죠…….”
김주성은 큐시트를 보고 살짝 말끝을 흐렸다.
살짝 달싹이는 입술은 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줬다.
김주성은 슬쩍 제작진이 있는 메인 카메라를 확인하고는 질문을 이었다.
“다른 건 아니고요. 이 프로그램, 그러니까 스타플레이어에 나온 아윌비백이란 노래의 표절 사건에 대해서도 아시는지요?”
“표절이라니요?”
“한때 논란이 되었던 사건이었는데, 나오신 김에 아시는 바가 있으면 들어 볼까, 하고 질문드려 봤습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김주성은 재빨리 까를로스의 표정을 살폈다.
이건 본인의 이야기도 아니고 다른 인물에 관한 이야기였다.
거기에 표절 당사자인 도훈이 바로 옆에 있는 상황.
녹화 촬영이 아니라면 던질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문동훈의 압박과 녹화 촬영이라는 보험이 없다면 절대 던져서는 안 될 질문이라는 것을 김주성은 알고 있었다.
그때 까를로스가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카메라가 까를로스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그 미소의 의미에 대해서 아는 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모두는 마른침을 삼키며 까를로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모두가 목이 빠질 듯 무대를 바라보고 있을 때 까를로스가 입을 열었다.
“뭐, 그 곡에 저도 간접적으로 참여했으니 이 자리에서 속 시원하게 말해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진실을 원하신다면요.”
까를로스는 해바라기처럼 화사한 웃음을 지었다.
김주성은 그의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까를로스의 말 때문에 큐시트에 있던 다섯 줄이 생략되었다.
생략된 대사는 표절 사건을 캐내기 위해 집요하게 그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밝히겠다고 하니 김주성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더해 까를로스가 간접적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그게 말이 되는가?
세계 3대 테너라 칭송받는 그가 팝 음악에 간접적으로 참여했다고?
이 발언 하나만으로도 다음 주 타임스지의 메인 기사는 정해진 것이었다.
까를로스의 지금 발언은 그만큼 센세이션했다.
그때 문동훈이 마구 손짓을 보내왔다.
빨리 진행하라는 신호였다.
김주성은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총괄 피디가 까라면 까는 게 맞았다.
최고의 진행자라 평가받긴 해도 최고의 결정권자는 아니었다.
김주성은 조심스럽게 마이크를 들었다.
“저도 듣고 싶네요.”
“뭐, 그럼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마이클 윌을 처음 만난 건 공연을 위해 LA 공항에 내린 직후였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연도를 말씀 안 드렸네요. 2005년 따사로운 봄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까를로스는 옛일을 회상하듯 조용히 먼 곳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20분 후.
제작진들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까를로스가 세계 3대 테너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세계 3대 수다맨에 들어간다는 것은 오늘에야 알았다.
어느 방송에서도 이렇게 길게 말한 적은 없었다.
시간이 돈인 까를로스가 이렇게 자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것은 프로그램 전체적으로는 이득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이 전혀 영양가가 없는 이야기였다.
칵테일을 마시고 햄버거를 먹고 아침 조깅을 같이하는 등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로 20분 동안 혼자 토크를 이어 가고 있는 까를로스였다.
문동훈은 본능적으로 움찔대기 시작했다.
도훈을 위해 함정을 파 놓은 것은 맞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지루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지금 끊어 버리면 자신이 파 놓은 함정은 물 건너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문동훈의 본능과 이성이 격렬하게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때 문동훈의 옆에 한지혜가 다가왔다.
“총괄님 적당한 때 끊어야 하지 않나요?”
“김 피디, 왜 그렇게 참을성이 없어? 지금 20분밖에 안 지났어. 상대는 세계적인 인물이야. 아마 반세기 정도가 지나면 세계 위인전에도 이름이 실릴지 모르는 인물이라고.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끊어?”
“저기 보세요. 카메라 감독들이 점점 지쳐 가고 있어요. 그리고 20분이 아니라 25분이 지났어요.”
“잠시만 기다려, 김 피디.”
문동훈은 손바닥을 보였다.
하지만 그게 서론이었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때 바로 마이클 윌을 만나게 된 거예요. 그다음 날 집에 가니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 곡이 바로 스타플레이어에 나온 아윌비백의 초안인 것 같았어요, 잠시만요.”
정작 중요한 곳에서 끊는 까를로스였다.
김주성은 다급하게 마이크를 들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겁니까?”
“일단 물 한 컵만 부탁해요. 이 무대가 많이 건조한가 봐요.”
“신경 쓴다고 썼는데, 죄송합니다.”
김주성은 어색하게 웃었다.
시실 신경 썼는지 안 썼는지는 김주성도 모른다.
하지만 성악가들은 습도에 민감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김주성이였다.
건조한 공기는 성악가들의 성대에 가장 큰 적이었다.
까를로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제가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은가 봐요. 얼마 얘기도 안 했는데 벌써 목이 건조해지네요. 얘기를 끝내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어도 여러분들의 궁금증은 다 해결해 드리고 갈 테니까요.”
다시 해바라기 웃음을 짓는 까를로스.
그를 바라보던 연습생들은 입을 딱 벌렸다.
누가 봐도 말을 많이 해서 목이 건조해진 것이 맞았다.
아직도 목청이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 컨디션하고는 별 관계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의 시작이 지금부터라는 점이었다.
서찬휘는 힐끔 무대를 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본론을 말하겠다고 하니 곧 끝나겠지?”
“아마도…… 그런데 저 옆에 통역사분 괜찮은 건가? 이건 그냥 토크가 아니라 연설이잖아!”
우시원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무대를 바라보자 서찬휘가 고개를 갸웃했다.
“통역사가 왜?”
“쓰러지려고 하잖아.”
“헉.”
둘이 입을 막자 옆에 있던 주현빈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까를로스와 비슷한 사람을 한 명 아는데, 끝나려면 아직도 멀었어.”
“그게 누군데?”
“이 실장님.”
주현빈의 말에 서찬휘와 우시원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훈의 잔소리는 지금 까를로스의 연설 못지않았다.
한번 시작하면 날이 새고 나서야 멈췄다.
정확히는 아침에 식사하면서도 그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둘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
그것은 우시원의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연습생들의 호기심을 뒤로한 채 까를로스는 계속 연설을 이어 나갔다.
“네, 맞습니다. 여러분이 들었던 곡은 가사를 새로 붙이고 새로 편곡을 한 곡이에요. 덕분에 완벽한 곡으로 다시 태어났죠.”
“그럼 편곡과 가사를 붙이는데 까를로스가 참여하신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편곡과 완벽한 가사를 붙인 것은 바로 한국인이었습니다.”
“헉.”
“그래서 생각했죠. 한국인이 이렇게 완벽한 영어 가사와 이탈리아어 가사를 붙이는데…….”
“지금 한국어 가사가 아니라 영어 가사와 이탈리아어 가사라고 하셨나요?”
“네, 마무리되어서 온 곡에는 이탈리아어까지 포함됐습니다. 덕분에 저도 오기가 생겼죠.”
“어떤 오기죠?”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 그럼 인사말 정도는 하실 수 있겠네요? 까를로스.”
질문을 던진 김주성은 속으로 뜨끔했다.
본론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데 살짝 옆길로 새어 나갔다고 생각한 것이다.
까를로스는 기다렸다는 듯 그 질문에 답했다.
“덕분에 어느 정도 한국어를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지금처럼요.”
활짝 웃는 까를로스.
하지만 김주성은 웃지 못했다.
지금 까를로스의 입에서는 유창한 한국어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김주성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시간을 보니 대충 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이탈리아어 통역사였다.
그런데 한국어를 이렇게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다니!
통역사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을 때 까를로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때 제가 놀랐던 것에 대해서 복수할 수 있어서 기쁘네요.”
“복수하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아윌비백의 원곡에 이탈리아어와 영어 가사로 편곡까지 해서 온 친구 때문에 놀랐다고요.”
“아, 그 말씀이군요. 그럼 방송이 나간 다음에 까를로스의 소원이 이뤄지겠군요.”
“아니요. 벌써 이루어졌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친구의 얼굴을 보세요, 지금 놀라고 있잖아요.”
까를로스는 옆에 있는 도훈을 가리켰다.
순간 김주성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제작진들도 당황하고 있었다.
그때 도훈이 마이크를 들었다.
“까를로스 한국말을 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왜 그때는…….”
“지금처럼 놀라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오늘 제가 나온 이유죠.”
까를로스의 말에 김주성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그럼 편곡하고 가사를 붙인 분이 바로 이도훈 매니저라는 말씀인가요?”
“물론이죠. 그리고 저와 같이 무대를 함께하기로도 약속했습니다.”
“무대라니요?”
“일주일 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제 공연이 있거든요.”
까를로스의 긴 수염이 기분 좋게 떨렸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공연 홍보까지 하는 까를로스의 모습에 김주성은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그때였다.
김주성의 눈에 다급한 문동훈의 손짓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