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이승찬은 무대를 다시 바라봤다.
그런데 가면을 쓴 가수에 비교해서 전혀 밀리지 않았다.
동시에 아까 들었던 블랙 화이트가 립싱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갑자기 등에서 올라오는 소름.
어쩌면 자신이 대한민국 최고의 보컬이라 불리는 것은 숨은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른 심사위원도 똑같았다.
한리나는 처음에 들리던 외국어 때문에 그들은 세계적인 스타가 누굴까를 생각했었다.
하지만 곡이 시작된 후 그들의 생각은 180도 바뀌었다.
너무 유창한 한국어 발음은 분명 외국인이 아니었다.
한국어 노래의 발음을 단순하게 흉내 내는 것이 아닌 선율에 목소리를 담아서 열창하고 있었다.
과연 누굴까?
한리나는 가면 뒤에 숨어 있을 월드 스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때 가면 속의 사내, 즉 까를로스가 점점 실력을 더 드러냈다.
마치 전에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같았다고 하면 이제는 댐이 완전히 수문을 개방한 것처럼 거침없이 자신의 성량을 마음껏 뿜어냈다.
순간 도훈은 조용히 매니저의 비밀 수첩을 바라봤다.
지금 곡이 경쟁은 아닌 것은 맞았다.
하지만 이 곡에서 까를로스를 보조하지 못하면 듀엣곡의 수준은 떨어진다.
지금 도훈은 그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는 생각보다는 까를로스에게 어떻게 보조를 맞출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M’을 제외한 알파벳을 모두 쓴 상태인데 까를로스에게 밀린다니…….
정확히 말하면 밀리는 게 아니라 그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매니저의 비밀 수첩이 아니라면 평생을 연습해도 그를 못 따라가는 것은 당연했다.
세계 3대 테너라는 자리가 노력에 의해서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도훈에게는 비밀스러운 능력이 있었다.
능력을 쓰고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은 예상도 못 한 일이었다.
그때 들어오는 마지막 남은 알파벳.
‘M’이 매직아이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MC의 약자가 아니라 자석의 줄인 말이었다.
전에 최 회장의 호텔에서 황수영에 진행 실력을 뽐낸 것은 분명히 알파벳 ‘M’의 효력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Magnetic은 과연 무슨 뜻일까?
도훈은 일단 이것을 써 보기로 했다.
슬쩍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알파벳 엠은 황금빛 물결이 되어 도훈의 심장으로 향했다.
도훈은 그때 자신을 주시하는 까를로스의 눈빛을 봤다.
도훈은 이제야 자석의 뜻을 알았다.
그것은 바로 상대를 끌어당기는 힘이었다.
마그네틱에는 자석과 관련된 뜻만이 아니라 사람을 강하게 끈다는 뜻도 있으니 확대 해석은 아니었다.
끌어당기는 힘이라 생각하자, 황수영의 편안한 무대 진행이 이해되었다.
무대 위에서 상대를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탁월한 진행 능력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
지금은 도훈은 다른 방법으로 관객들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상의 하모니!
―나 어릴 적 꿈꾸던
―그게 바로 오늘…….
도훈과 까를로스의 하모니가 무대를 뒤덮었다.
한승범은 외국인보다도 도훈의 목소리에 놀랐었다.
한번 들으면 귀를 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분명 시작할 때부터 같은 목소리로 열창한 것은 아니었다.
곡의 후반부터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자신의 역량을 숨겼다고?
한승범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가면 뒤의 외국인도 놀라운데 매니저가 거기에 보폭을 맞춘다고?
한승범은 조용히 눈을 감고 악상을 떠올렸다.
그것은 누구도 부르지 못할 것 같아서 머릿속에 묻어 놓은 악보였다.
한승범은 머릿속에 잠들었던 곡의 임자를 지금 찾았다.
바로 지금 무대에 선 그들이었다.
그때였다.
가면을 쓴 가수와 도훈의 하모니를 마지막으로 곡이 끝났다.
사실 이것은 리허설이었다.
곡 선정 1위에 대한 보상은 세계적인 아티스트의 조언을 받는 것도 포함된다.
그래서 간단하게 맞춰 보자고 시작한 무대였다.
그런데 마치 본 공연을 하듯 긴장감을 선사한 것이다.
모두의 놀라움 속에 그들의 리허설이 끝났다.
짝짝.
침묵 속에서 포문을 연 것은 역시나 이승찬이였다.
이승찬은 천천히 손뼉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보여 준 기립 박수.
사실 연습생의 무대였다고 하면 그냥 자리에 앉아서 평가했을 터.
하지만 무대 위에 있는 가면을 쓴 사내가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최대한 예의를 취하는 것이 방송을 위해서도 좋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승찬은 마이크를 들었다.
“저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승찬은 잠시 마이크를 내려놓았다.
의미심장한 얼굴로 무대와 연습생들을 번갈아 보자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는 이승찬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이승찬이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저는 이 시간부터 더 이상의 리허설, 아니 공연을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의 말에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어났다.
“지금 뭐라고 하신 거야?”
“왜, 리허설을 못 하게 한다는 거지?”
“아니, 리허설뿐 아니라, 본공연도 못 하게 한다는 거잖아. 심사위원이 저럴 권리가 있어?”
“난, 다시 듣고 싶은데.”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이건 황제우보다도 더하잖아.”
연습생들은 가장 심한 비유까지 했다.
황제우는 그만큼 악명이 높았다.
편애를 하는 것도 모자라 연습생을 불편하게까지 만들었다.
그런 황제우와 비교한다는 것은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것을 뜻했다.
이승찬의 한마디로 장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고가 되었다.
정확히는 도화선에 불이 붙은 상태.
문동훈을 비롯한 제작진까지 당황하고 있었다.
“지금 이승찬이 뭐라고 한 거야? 김 피디가 가서 좀 말려.”
“네, 총괄님.”
한지혜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심사위원석을 향해 달려갔다.
서로 이견이 있고 암투가 존재하는 예능국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승찬을 말려야 한다는 것은 똑같았다.
한지혜는 재빨리 달려갔다.
여차하면 카메라를 중지시키고 마이크라도 빼앗을 기세였다.
절대 출연자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이것은 MBS의 운명이 달린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지혜는 이 순간만큼은 한 마리의 적토마가 되었다.
하지만 한지혜는 이승찬의 다음 말에 걸음을 멈췄다.
“이건 리허설이 아닙니다, 더 완벽한 무대는 없습니다. 이런 완벽한 무대를 보여 주셨는데 리허설이 필요할까요? 아니면 본무대가 필요할까요?”
모두에게 의견을 구하는 듯 이승찬은 당당하게 카메라를 바라봤다.
이승찬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와서 했던 멘트 중 이보다 더 오글거리는 대사는 없었다.
사실 피디들도 이승찬의 이런 멘트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승찬은 고개를 돌려 제작진을 바라봤다.
자신이 한 방 먹였다는 듯 흐뭇한 눈으로 문동훈과 제작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승찬을 바라보던 한리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 뭔가 생각난 듯 손가락을 튕겼다.
한리나는 이승찬에 질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리나는 마이크를 들고 도훈과 가면 쓴 출연자를 바라봤다.
“이승찬 선배님 말씀대로 리허설이나 본무대는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앙코르를 요청하고 싶군요.”
순간 장내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아아.”
“역시, 한리나 최고다.”
“한리나의 드립이 이승찬을 눌렀어.”
평상시라면 심사위원님 혹은 선생님이라도 불러야 할 이들을 그냥 연예인 이름 부르듯 외치는 연습생들.
하지만 이승찬이나 한리나 모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무대를 바라볼 뿐이었다.
무대 위에 두 명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선을 받은 가면 속 가수, 즉 까를로스는 아무 말 없이 도훈에게 턱짓했다.
도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MC 김주성이 기회를 잡았다는 듯 얼굴 한가득 미소를 드러냈다.
“그럼, 바로 한 곡 들어 보실까요? 리허설이든 본무대든 앙코르 무대든 그게 무슨 상관있습니까? 자, 60초 후에 앙코르 무대를 감상하시겠습니다.”
김주성의 멘트 뒤에 여기저기서 헛숨이 흘러나왔다.
김주성은 시계를 보더니 바로 멘트를 이었다.
“60초 지났다고 치고 무대 부탁드리겠습니다.”
씩 웃으며 무대의 사이드로 발길을 옮기는 김주성의 모습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깨알 같은 멘트를 치고 적당한 시점에서 빠져 주는 순발력을 인정한 것이다.
잠시 후.
그들의 무대는 끝났다.
하지만 이전 무대와 다른 점이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처음부터 액셀러레이터를 힘껏 밟았던 것.
둘은 목소리는 관객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들의 감성을 마구 자극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끊기자 연습생들의 눈은 촉촉해졌다.
갑작스러운 침묵이 무대로부터 전염되기 시작했다.
침묵이라는 바이러스는 의외로 객석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바로 김주성이었다.
그는 슬쩍 눈치를 보더니 박수를 치며 도훈의 옆에 섰다.
짝짝.
“좋은 무대 감사합니다. 101번 연습생, 아니 지금은 이도훈 매니저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겠군.”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가면을 쓴 출연자분은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저도 참 난감하네요.”
뒷머리를 긁적이는 김주성의 모습에 제작진들이 손짓했다.
동시에 출연자들이 볼 수 있게 자막이 나왔다.
자막은 두 가지 버전이었다.
한국어 버전과 이탈리아어 버전.
둘 다 ‘가면을 벗어 주세요’라는 문구는 동일했다.
까를로스는 조용히 가면을 벗었다.
그 모습에 장내의 연습생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꺅! 저, 정말 까를로스야.”
“와, 제작진 섭외력 보소, 어떻게 저 사람을 데리고 온 거야. 혹시 납치한 거야?”
“진짜 MBS에서 이를 갈았네.”
“오늘은 나 떨어져도 행복하다.”
“에이, A클래스 티켓 거머쥔 놈이 배부른 소리 하기는”
그렇게 연습생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제작진들 중에 몇몇은 까를로스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문동훈을 바라봤다.
임제호가 나간 후 가장 놀란 것이 바로 까를로스를 섭외했다는 점이었다.
문동훈은 존경 어린 직원들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문동훈도 까를로스가 왜 나왔는지는 모른다.
먼저 이쪽에 문의를 한 것이 까를로스였다.
스타플레이어란 오디션 프로그램에 자신이 멘토로 참여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같이 부를 곡까지 미리 정해 줬다.
이쯤 되면 한류 열풍 덕분이라고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문동훈은 다른 직원들에게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이렇게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은 자신의 공으로 만드는 것이 이 바닥의 법칙이었다.
모두가 술렁이고 있을 때 문동훈은 무대 아래 대기하고 있던 FD에서 손짓했다.
그 신호를 받은 FD는 재빨리 새로 인쇄된 큐시트를 가지고 김주성에게 다가갔다.
큐시트를 받은 김주성이 씩 웃으며 멘트를 이었다.
“시상식도 아닌데 갑자기 새로운 소식이 막 들어오네요. 다들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 말씀드리는데, 이건 비밀입니다.”
시실 김주성은 새로 받은 큐시트를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왜 새로운 큐시트를 건넸는지는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