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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정여진이 말을 이었다.
“그나마 친한 배우들도 근 몇 해 동안 연락이 안 된 친구였다고 해서 포기하고 있었거든. 참, 세월도…….”
살짝 말끝을 흐리는 정여진은 조용히 하늘 위에 뜬구름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도훈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운이 좋았습니다.”
말을 마친 도훈도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뭐, 도훈의 혼자 힘으로 찾은 것은 아니었다.
도훈은 엄지연 비서에게 따로 부탁을 해서 그를 찾아봤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장진수를 찾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온전히 도훈이 부담하기로 했다.
덕분에 도훈은 오늘 아침 장진수의 행방에 대해서 찾을 수 있었다.
장진수가 있는 곳은 바로 대한병원의 병실이었다.
* * *
잠시 후, 도훈은 정여진과 함께 병실의 복도를 거닐었다.
복도를 지나치며 병실의 앞에 있는 환자의 이름을 꼼꼼히 확인했다.
도훈이 넘겨받은 정보는 대한병원에 입원하고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거기에 정형외과 병동이라고만 들었다.
덕분에 이렇게 일일이 확인을 하면서 복도를 지나가고 있던 것이다.
얼마나 갔을까.
도훈이 슬슬 지쳐 갈 때였다.
정여진이 흥분한 듯 병실을 가리켰다.
“이 실장! 저기 있어, 저기.”
“아, 진짜 여기 계시네요.”
“자, 그럼 빨리 들어가자고.”
“잠시만요, 선생님.”
“왜 그래? 이 실장.”
“대충 어떤 상황인지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음, 이 실장 말이 맞아. 아무래도 그게 좋겠어.”
“네,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사정이 굉장히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도훈은 엄지연으로부터 들었던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뭐, 사정이 안 좋아진 것은 흔한 스토리였다.
그냥 이혼 후 아픔만이 그를 괴롭힌 것은 아니었다.
그 후 친구와 사업을 하다가 잘못 선 보증에 대한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면 사업체를 키워서 다시 가정을 합치려 했다고 한다.
그 후 친구에게 뒤통수를 맞고 지금은 공사판을 전전하다가 병원 신세까지 지게 된 것이다.
뭐, 병원비도 모자라서 며칠 뒤에는 강제 퇴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도훈과 정여진은 바로 병실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안을 몰래 살폈다.
안쪽을 슬며시 바라보던 정여진의 눈이 커졌다.
만난 지 오래되었지만, 안쪽의 침상에 앉아 있는 것은 분명히 일사천리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생 장진수였다.
긴 꽁지머리는 어디 가고 이제는 탈모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휑했지만, 분명히 그는 아는 동생 장진수였다.
다행인 것은 장진수의 표정이 그리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장진수는 병실의 환자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우리 아들이 TV에 나왔다니까.”
“에이, 거짓말도…….”
“아니라니까! 우리 아들이 TV에 나왔어. 그 뭣이냐…….”
장진수는 TV 프로그램을 떠올리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한참을 생각하던 장진수가 병실의 환자에게 말했다.
“스타플레이어란 프로그램이야. 김 씨도 알지? 잘생긴 놈들 나와서 노래 부르는 프로그램 말이야.”
“허허, 알지. 나도 그 프로그램 좋아혀. 거기 나오는 훤칠한 친구들 보면 젊었을 때 날 보는 것 같아서…….”
“에이, 무슨 농담을 그렇게 현실성 없게 하는 거야.”
“아니, 진짜라니까.”
“자네 거짓말도 황당하지만, 장 씨 거짓말도 재미있어.”
말을 마친 환자는 장진수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장진수가 발끈한 듯 말했다.
“내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그래?”
“전에 유명한 배우였다면서? 그런데 무슨 배우가 노가다 뛰다가 병원에 입원하고 그래?”
“…….”
장진수는 환자를 멀뚱히 바라봤다.
그러자 환자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거기에 장 씨 아들이 무슨 TV에 나와?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장 씨는 가족이 찾아온 적도 없잖아.”
“…….”
장진수는 말없이 상대를 바라봤다.
사실 상대가 이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었다.
당시 활동하던 영상은 너튜브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어딘가에 비디오테이프가 남아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을 재생할 플레이어는 여기에 없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때와 지금의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
모든 것이 세월의 흔적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조용히 장진수의 옆에 다가왔다.
장진수의 옆에 다가온 이는 다름 아닌 정여진이였다.
정여진은 안타까운 얼굴로 장진수를 바라봤다.
장진수와 대화를 나누던 환자는 낯선 이의 등장에 눈을 크게 떴다.
그 모습에 장진수도 고개를 돌렸다.
순간 장진수의 눈이 커졌다.
“헉.”
“알아보겠어? 동생.”
정여진이 아무렇지 않게 웃자 장진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누님, 제가 일사천리의 행동대장인 누님을 어떻게 몰라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동생이 다쳤다는 걸 듣고 급하게 달려왔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뭐,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처지라서…….”
살짝 말끝을 흐리는 장진수.
정여진은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아무리 사업이 망했다고 하지만,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처지라고 하니 이해가 안 되었다.
그 시선을 눈치챘는지 장진수가 손을 내저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누님.”
“아니야, 그래도 다행이네.”
“다행이라니?”
“이렇게 살아 있어서.”
“그런데 저 뒤에 계신 분은 누구예요? 혹시 누님 매니저?”
장진수가 도훈을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하자 정여진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건 다른 분들에게 방해되니 휴게실에서 이야기하자고.”
정여진은 휴게실 쪽을 가리켰다.
그때 환자 하나가 말했다.
“우린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대화 나눠, 장 씨.”
그는 조금 전까지 장진수를 놀리던 환자였다.
정여진이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도 계시니…….”
정여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환자들이 일제히 외쳤다.
“저희도 괜찮아요. 그런데 정말 정여진 선생님 맞아요?”
그가 질문을 던지자 옆에 있던 환자가 다급히 끼어들었다.
“그냥 배우님이라고 하면 되지, 왜 선생님이라고 해? 괜히 나이 들어 보이게.”
“아니, TV에서도 다른 배우들이 선생님이라고 하잖아.”
그들의 다툼에 정여진이 활짝 웃었다.
“저는 아무렇게나 불러 주셔도 괜찮아요.”
국민 엄마 특유의 미소가 작렬하자 환자들은 순한 양이 되었다.
“이쪽 친구들 단도리는 제가 할 테니 얘기하세요.”
“그래요. 편하게 다녀오세요, 누님.”
아예 누님이라 부르는 환자까지 생겼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리자 장진수가 말을 이었다.
“뭐, 그냥 여기서 편하게 얘기해도 될 것 같아요, 누님.”
“흠.”
정여진은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환자들은 침상에서 머리를 내밀며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정형외과 병동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일부는 양쪽 다리에 깁스를 한 환자도 있었다.
상태가 심각한데도 눈빛은 다들 똑같이 호기심을 띠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궁금한 것이 보통은 남의 속사정이 아니던가.
자신의 친구까지 재촉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정여진은 할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뭐, 더 늙기 전에 영화판에서 한번 놀아 보지 않겠어?”
“뭐요? 영화판이요?”
장진수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한 발 앞으로 나왔다.
그 모습에 정여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기회는 내가 주는 게 아니라 저 친구가 줄 거야.”
정여진은 뒤를 힐끔 돌아봤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있던 도훈이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그래도 장진수는 누굴 말하는지 아는 것 같았다.
“음, 그러니까…….”
장진수가 말끝을 흐리며 멋쩍게 웃는다.
순간 뒤쪽에서는 환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헉, 장 씨가 진짜 연예인이었어?”
“그런데 왜 병실에서는 연기 한 번도 안 했어?”
“장 씨, 다시 봤네 그려.”
모두가 장진수를 보며 놀란 듯 입을 벌렸다.
장진수를 가장 많이 놀렸던 환자는 아예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있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다시 병실 문을 열었다.
스르륵.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도훈이었다.
도훈은 얼굴까지 올라올 정도로 짐을 높이 쌓아 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정여진이 다급하게 짐을 받았다.
“이게 다 뭐야? 이 실장.”
“생각해 보니 병실에 빈손으로 오는 게 마음에 걸려서요.”
“그렇다고 이렇게…….”
정여진을 말을 잇지 못했다.
도훈이 들고 온 것은 음료수 상자였다.
그런 게 그 숫자가 문제였다.
도훈은 무려 상자를 6개나 들고 왔던 것이다.
상자를 아래로 내려놓은 도훈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그러고는 길게 심호흡했다.
“휴우.”
“왜 이렇게 많이 사 온 거야?”
정여진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묻자 도훈이 해맑게 웃었다.
“저와 함께 일한 분이 이 병실에서 신세를 지고 있는데, 다른 환자분들까지 준비해야죠.”
도훈는 씩 웃으며 나머지 환자들을 바라봤다.
환자들도 도훈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도훈은 그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래 내려놨던 음료수를 환자들에게 나눠 줬다.
“이거 드세요.”
“왜 우리한테 이걸…….”
“장진수 선생님 친구들이시잖아요.”
도훈의 말에 환자들은 입을 딱 벌렸다.
이곳에 모인 환자들은 오다가다 만난 사이였다.
그런데 친구라 하니 쑥스럽기도 하고 어딘가 어색했던 것이다.
하지만 도훈은 넉살 좋게 환자들 사이를 누비며 음료수를 전달했다.
그 모습을 보던 정여진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처럼 살갑게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은 보통 신입 매니저에게는 볼 수 없었다.
저런 모습에 자연스럽게 나오려면 몇십 년은 굴러야 가능한 것이었다.
거기에 도훈은 진심으로 자신의 그룹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훈의 진심 어린 태도에 정여진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모르는 무명 배우를 위해 저리 열심히 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이것은 이전까지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저 젊은 친구는 오래전 은퇴한 배우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보고 있을까?
정여진이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도훈은 장진수에게도 다가갔다.
도훈은 장진수에게도 음료수가 담긴 상자를 건네며 말했다.
“맛있게 드세요.”
넙죽 인사한 도훈은 다시 한 번 그를 보고 웃었다.
도훈의 표정을 본 본 장진수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까 들어보니 매니저라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인가요?”
“제가 유레카의 7팀장 이도훈이라고 합니다. 뭐, 연예인들의 매니저죠.”
“아, 그렇군요.”
“혹시 유레카에서 일해 보시는 건 어때요?”
“내가? 대체 어떻게 일을…….”
“연기 선생님으로 모시겠습니다.”
“나를 선생님으로요?”
“네.”
“아니 인생 밑바닥을 아득바득 기었던 내가 어떻게…….”
“그러니 가능하신 거죠.”
“회사에서 날 받아 준다고요?”
장진수는 못 믿는 눈치였다.
그 모습에 도훈이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도훈이 장진수에게 한 제안은 퀘스트를 위한 단순한 선행일까?
물론 아니었다.
도훈이 장진수에게 제안한 것은 전생의 기억 때문이었다.
장진수는 수많은 굴곡 어린 과거를 바탕으로 후배들에게 연기를 지도하며 명성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