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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진의 물음에 한유라가 말했다.
“흠, 뭐 이따가 나오겠죠.”
반사적으로 틀에 박힌 답을 했지만, 그녀도 이해가 안 가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처음 소개할 때 나오고 나서는 묘하게 앵글에서 비껴가고 있었다.
도훈뿐 아니라 유레카 전원이 카메라에 앵글에서 외면받고 있었다.
그때였다.
중창 미션을 받은 유레카의 모습이 나왔다.
순간 회의실 내부의 텐션이 급속도로 올라갔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화면을 바라보는 가운데 한유라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뭐지?”
한유라뿐이 아니었다.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 있다.
그들의 공연 장면은 스킵되고 바로 심사평으로 넘어갔다.
이어지는 혹평.
뒤쪽에서는 묘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보컬 트레이너인 황제우의 심사평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다른 연습생들의 웅성거림이 마이크에 잡혔다.
그것도 잠시, 화면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다.
다음 장면은 숙소를 비춘다.
불 꺼진 숙소를 배경으로 연습생들이 랩을 주고받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제법 맛깔나는 랩을 배경음악으로 하고 화면이 암전됐다.
점점 멀어지는 래퍼의 목소리는 묘하게 여운을 만들었다.
―새벽에 뒤척뒤척…….
―구두 굽 소리는 터벅터벅…….
동작과 소리로 라임을 만들며 소리로 입체감을 주는 랩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자 모두는 입을 벌리고 잠시 음악에 빠져들었다.
장면 전환에 쓰인 음악치고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 공을 들인 듯싶었다.
마치 새벽에 출근하는 부모님의 구두 굽처럼 옛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래퍼의 목소리였다.
강시혁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나온 음악은 분명 연습생이 목소리가 아니었다.
영화로 치면 사운드트랙.
상업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넣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다듬어진 노래였다.
자세히 들어보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에 강시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 아니겠지…….”
그때였다.
어느덧 래퍼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거 싶더니 완전히 사라지자 암전되었던 화면에서는 아침 해가 떠올랐다.
“전개 속도 무진장 빠르네.”
강영웅이 어이없다는 듯 화면을 가리켰다.
“와, 이건 이상하게 유레카 멤버들만 생략된 것 같은데…….”
래퍼가 주는 묘한 여운에서 깨어난 강시혁도 한마디 거들었다.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화면이 바뀌어 체육관 사이로 어깨를 좌우로 흔들며 걸어 나오는 레게 머리의 인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아래는 굵직한 자막으로 인물에 대한 설명이 들어갔다.
〈BOC의 래퍼 토마호크.〉
새로운 멘토의 등장에 연습생들이 박수를 보냈다.
체육관 내부에 메아리치는 거대한 함성.
토마호크는 음악 케이블 방송의 랩 오디션 프로그램인 〈에스크 랩 미〉에서 입상을 거둔 후 몇 년째 이 분야에서 승승장구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아래에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도 모두가 아는 인물이었다.
실력파 래퍼인 만큼 연습생들의 환호는 거셌다.
그 함성 덕분에 스피커가 붕붕 울릴 정도였다.
그 열기는 화면을 통해서 그대로 전해졌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화면을 바라봤다.
래퍼 토마호크는 연습생들이 모인 그룹별로 차례차례 조언하며 분량을 쌓아 나갔다.
재미있는 것은 전과 달리 소속사별 레슨이 아닌 숙소 멤버끼리 모였다는 점이었다.
다른 숙소는 다섯 명이 모였지만, 20호실은 여섯 명인 관계로 조금 더 눈에 띄었다.
하지만 교묘하게 카메라 앵글은 그들은 벗어났다.
모두를 비춘 뒤 영상은 래퍼 토마호크가 연습생들은 지도하는 장면을 보여 줬다.
어제 보컬 파트와는 다르게 토마호크는 연습생들에 대한 찬사를 이어 나갔다.
래퍼 토마호크는 험상궂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목소리는 온화했다.
랩을 할 때와 평상시 말할 때가 정반대인 캐릭터였기에 그가 부드럽게 칭찬할 때면 긍정적인 에너지가 더욱 발산되었다.
멘토링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카메라가 래퍼 토마호크를 따라가더니 마지막으로 20호실의 연습생들이 모인 장소를 비추었다.
순간 포커스가 흐려지며 장면이 전환된다.
무대 위에 큐시트를 들고 서 있는 MC가 마이크를 잡고 모두를 바라본다.
그는 이번 탈락자가 정해질 4회부터 진행을 맡게 된 MC 김주성이었다.
점점 클로즈업되는 김주성의 얼굴.
살짝 큐시트를 확인하는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물론 이것은 십 년이 넘는 무대 진행 경력에서 나오는 비즈니스용 표정이었다.
카메라는 그의 표정을 클로즈업!
살짝 시간을 둔 김주성의 입에 살짝 열리며 멘트가 흘러나온다.
―자, 이제 본격적인 서바이벌이 시작됩니다.
―언제부터?
―바로 지금부터!
―와아!
동시에 화면 상단에 뜬 하나의 문구.
〈To be continued…….〉
순간 유레카의 회의실에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오마이갓, 이게 뭐야? 대체 우리 애들은 어디 있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대체 MBS가 뭔 약을 먹었나?”
강시혁이 맞장구치자 옆에 있던 한유라는 아예 SBC로 채널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콘셉트가 약간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직도 방송되고 있었다.
모두가 황당해하는 가운데, 강영웅이 씩씩대면서 외쳤다.
“MBS가 이제 나랑 안 보려고 이러는 건가? 내가 예능국 국장님한테 전화 한번 넣어 봐야겠네.”
“잠시만 기다려 봐, 아예 내가 전화할게.”
정여진은 강영웅을 말렸다.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의 분노 게이지는 점점 한계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그중 가장 이를 가는 사람은 의외로 구석에 앉아 있는 김민석이였다.
도훈이 히든 보스를 자처하는 동안 유레카의 얼굴은 부사장인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MBS에서 공격이 들어오자 참을 수가 없었다.
김민석은 이를 부득 갈며 자신의 핸드폰을 찾았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 급히 오느라 부사장실에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김민석은 얼굴이 시뻘게진 상태로 회의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한유라는 김민석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부사장님 언제 오셨어요?”
“아까부터 있었는데…….”
“인사를 못 드려서 죄송해요.”
“왠지 진급하고 나서 존재감이 없어진 것 같은 건 내 착각인가?”
“부사장님 삐지셨어요? 그렇게 숨어 계시면 어떻게 찾아요?”
한유라가 웃자, 김민석이 어깨를 으쓱하며 옆으로 돌아섰다.
“그럼 안 삐져. 참, 정 선생님께는 경황이 없어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잘 지내셨죠, 선생님.”
“아니에요, 먼저 인사드려야 했는데…… 아까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정여진은 멋쩍게 웃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그 모습에 김민석이 물었다.
“어디 전화하시려고요, 선생님?”
“우리 이 실장하고 아이들 왜 나오지 않았냐고 따져야죠.”
“그건 제가 하겠습니다, 선생님. 명색이 부사장인데, 제가 해야죠.”
“아니에요.”
손을 흔든 정여진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인상을 잔뜩 찌푸린 정여진은 한바탕 배틀을 뜰 준비를 했다.
그것도 잠시 정여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핸드폰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김민석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전화기가 꺼져 있다고 하네요.”
“아, 전형적인 수법이네요. 방송사 국장들이 다 그렇죠. 아마 내일까지 꺼져 있을 겁니다. 지금 보니 유레카만 지워진 게 아니에요. 중소 기획사 연습생을 중심으로 싹 지웠어요.”
김민석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는 뭔가 결심한 듯 몸을 돌렸다.
그 모습에 한유라가 다급하게 물었다.
“부사장님 어디 가시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방송국에 찾아가야지.”
“지금 가서 어쩌시려고요. 지금 가 봤자, 국장이 자리에 있겠어요?”
“밤을 새워서라도 만나야지, 국장 놈이 없으면 대표 놈이라도 만나야지.”
이제는 ‘님’이 아닌 ‘놈’이 되어 버린 방송국 관계자.
“잠시만요.”
한유라는 재빨리 김민석을 말리려 한발 다가섰다.
김민석은 필요 없다는 듯 손을 저으며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김민석은 단순한 엄포를 늘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부사장직을 맡으면서 한 일이 사실 미미했다.
오죽하면 팀장들조차 회의실 구석에 있는 자신의 존재를 몰라보겠는가.
이젠 자신이 존재를 회사 밖으로 드러내야 할 때였다.
회사의 얼굴로서 지켜야 할 품격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제는 쌈닭이 되어야 했다.
이 소중한 직장을 지키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도훈을 떠올렸다.
도훈은 김민석의 진정한 은인이었다.
눈치 보는 직장인이 아닌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경영자로 만들어 준 것이 도훈이었다.
덕분에 어디서든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었다.
이제는 이곳이 미라클 본사 부럽지 않았다.
자신의 딸에게도 자랑할 수 있는 직장이 바로 유레카였다.
유레카 엔터를 지키기 위해서는 쌈닭, 아니 투견이라도 되어야 했다.
김민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도훈의 얼굴이 갑자기 선명해졌다.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쌓인 게 원인인 것 같았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한유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실장!”
순간 김민석은 눈앞에 있는 것이 환영이 아니라, 도훈 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민석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대…….”
그는 재빨리 자신이 입을 막았다.
아직은 도훈이 대표라는 것이 알려져서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당황하는 김민석을 본 도훈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어요, 부사장님.”
김민석에게 허리를 숙인 도훈은 이곳에서 가장 연장자인 정여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모두에게 인사를 건넨 도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도훈을 외계인 보듯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녹화로 진행되는 비공개 서바이벌 무대는 아직 진행 중이었다.
비공개 서바이벌 무대에서 50명만이 생방송 무대에 진출할 수 있다.
한참을 바라보던 한유라가 물었다.
“혹시 벌써 탈락한 거야?”
“…….”
“표정을 보니…… 혹시 탈락?”
“…….”
도훈이 아무 말 없이 한유라는 미안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아픈 데 찔러서 미안해, 이 실장. 그래도 잘했어. 매니저가 연습생 신분으로 참가한 것만 해도 어디야, 안 그래?”
“저는 탈락 안 했어요.”
“그럼 누가 탈락했는데?”
“흠, 그건 비밀이에요.”
“앗,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게 된 거야?”
“저는 연습생이면서 매니저라서 출입이 좀 자유로워요. 뭐, 겸사겸사 나왔죠.”
“그런데 대체 저게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화면에 우리 애들은 얼굴 한번 나오지 않아?”
“뭐, 총괄 피디가 바뀌고 뭔가 잡음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부사장님이 지금 방송국으로 쳐들어가려고 했어.”
한유라가 김민석을 가리켰다.
도훈은 어색하게 웃는 김민석을 바라보며 살짝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만 볼 수 있게 아주 살짝…….
이것은 김민석에게 보내는 도훈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소란은 점점 커졌다.
그 소란에 도훈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누가 노트북 좀 켜 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