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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지혜가 콧김을 뿜어내자 고운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요, 언니…….”
“왜? 운미 씨.”
도훈과 인연이 있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몇 시간 전부터 고 피디에서 운미 씨로 호칭을 바꾼 한지혜였다.
물론 고운미도 한지혜를 언니라 부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둘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커피 자판기 쪽으로 걸어갔다.
주변에 사람이 없자 고운미가 나지막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괜히 걱정하는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운미 씨. 그냥 모르는 남이면 몰라도. 이대로 가다가는…….”
말을 하던 한지혜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한지혜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보니까 유레카를 찍은 것 같은데…….”
“그건 맞는데, 이상하게 이도훈 실장님을 보면 안심돼요. 뒤통수 맞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도 그렇긴 한데…….”
“그럼, 우리 몰래 숙소 촬영분 좀 볼까요?”
“숙소 촬영분?”
“실시간으로요.”
고운미 환하게 웃자 한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운미의 제안은 간단했다.
도훈이 지내는 20호실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본다는 것이었다.
방마다 들어가 있는 카메라의 숫자는 무려 10대.
그 정도의 카메라면 모든 장면을 잡기에 충분했다.
물론 방송에 부적절한 장면은 철저하게 걸러 낸다.
그것도 피디들의 업무에 속한다.
어차피 볼 거 빨리 확인해보자는 것이 고운미의 생각이었다.
한지혜는 영상실로 향하며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막 세 시가 넘어가고 있다.
“운미 씨, 아무래도 실시간으로 숙소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녹화된 장면만 봐야 할 것 같아.”
“왜요?”
“지금 세시야. 아직 깨어 있을 리가 없잖아.”
“하긴 그러네요. 그럼 간단하게 확인만 하고 가요.”
“그래.”
한지혜를 영상실이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스르륵.
그녀들은 도둑고양이처럼 영상실에 몰래 숨어들었다.
사실 철야 근무나 마찬가지였지만, 도훈과 유레카의 영상만을 확인해 보려는 둘이었기에 이렇게 몰래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한지혜는 재빨리 20호실에 저장된 녹화분을 확인했다.
처음 나타난 영상은 휑했다.
“운미 씨 조금 더 빨리 돌려봐.”
“네, 알았어요. 언니.”
고운미는 속도를 16배속으로 올렸다.
잠시 뒤, 숙소로 한둘씩 들어오고 절망에 빠진 서찬휘와 우시원의 모습이 나온다.
그들을 위로하는 것은 같은 숙소를 쓰는 연습생.
가장 격하게 위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장선우였다.
그것도 잠시, 그들은 카메라 앞에서 해야 할 행동을 다 했다는 듯 자리로 돌아갔다.
한지혜는 웃음을 터뜨렸다.
“풋.”
“언니 왜 그래요?”
“아니, 진심이 묻어나야 시청자들도 공감하지. 저렇게 형식적으로 위로하는 게 말이 돼?”
“저거 보세요.”
고운미는 영상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장선우가 뭔가를 주섬주섬 챙겨 온다.
장선우는 서찬휘와 우시원에게 뭔가를 쓱 내밀었다.
그 모습에 한지혜가 입을 딱 벌렸다.
“와, 저거 육포 아니야? 혹시 우리가 간식으로 육포 준 적 있어?”
“아니, 없는데요.”
“저거 마이너스 점수 먹겠는데…….”
“숨길까요?”
“아니, 그냥 둬 봐. 괜히 시간이 비면 나중에 난감해지잖아. 저것도 시청자들에게는 재미지. 잠시만, 여기서부터는 속도 내려.”
한지혜가 화면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도훈과 자신이 나오고 있었다.
도훈을 숙소로 안내하고 자신이 나오는 장면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그 뒤로 마치 콩트 같은 장면이 주르륵 이어진다.
한지혜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때였다.
그들은 난데없어 작은 목소리로 쉴 틈 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한지혜가 외쳤다.
“운미 씨 볼륨 좀 높여 봐요.”
“네, 언니.”
순간 스피커에서 랩이 흘러나왔다.
한지혜는 힐끔 내일의 스케줄을 확인했다.
오늘 예정되어 있던 랩 파트 레슨이 내일로 미뤄진 상태.
그들은 늦은 시간까지 랩을 연습하고 있던 것이다.
“재능 교환인가?”
재능 교환은 제작진에서도 추천하는 연습 방법이다.
보컬이 특기인 연습생은 다른 특기의 연습생에게 자신의 재능을 전달한다.
그러면 그 연습생도 자신의 재능을 개인적으로 가르쳐 준다.
멘토들에게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순전히 분량을 뽑기 위한 방법이었다.
서로 간의 캐미를 뽐낼 수 있는 것이 바라 재능 교환이니 말이다.
한지혜를 고개를 갸웃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운미 씨, 실시간으로 카메라 돌려봐요.”
“지금 자고 있을 텐데요.”
“일단 돌려봐요.”
고운미는 재빨리 화면을 조정했다.
실시간으로 화면이 바뀌고 그녀들은 입을 딱 벌렸다.
20호실은 아직도 대낮이었다.
랩을 연습하는데 땀까지 흘리고 있는 그들.
한지혜는 자신도 모르게 쓴 입맛을 다셨다.
문득 오늘의 중창 오디션이 기억난 것이다.
사실 한지혜는 도훈과 우시원 그리고 서찬휘의 공연이 재능에서 비롯된 것인 줄 알았다.
원래 태어나기를 축복받은 목소리라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자신의 예상은 완벽하게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의 목소리는 재능이 아닌 노력이 90%를 차지하는 것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연습하는 이들이 101명의 연습생 중 있을까?
한지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스타플레이어가 성공하려면 도훈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문동훈으로부터 지켜야 해.”
한지혜의 혼잣말에 고운미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동참할게요.”
* * *
다음 주 금요일, 유레카의 회의실.
회의실에서는 몇몇이 모여서 스타플레이어의 3화를 모니터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2주간의 텀을 두고 방영된 스타플레이어 3화는 유레카라는 회사에서는 커다란 이슈를 불러왔다.
이번 모니터링은 한유라가 책임을 맡기로 했다.
사실 모니터링에서 책임을 맡는다고 해 봤자 감상평이나 차후 시청률 정도를 입력하는 정도였다.
문제는 지금 이곳에 온 인원이 문제였다.
20명 정도가 들어갈 회의실을 사람들이 꽉꽉 채우고 있었다.
그곳에는 도훈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황수영도 있었다.
사실 황수영의 존재는 한유라에게 그다지 거슬리지 않았다.
문제는 자신의 가장 큰 자산이라 할 수 있는 정여진까지 이곳에 왔다는 점이다.
“선생님, 이거 끝나면 11시인데 괜찮으시겠어요?”
“한 팀장, 난 괜찮아. 늙으면 원래 잠이 없잖아. 이 실장 나온다는데 내가 어떻게 집에만 있어?”
“그냥 집에서 보셔도 되는데…….”
“아니야, 이런 중요한 건 꼭 같이 봐야지. 우리 옛말에 기쁨은 나눠야 한다고 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혹시 매주 무리하시려는 건 아니죠?”
“봐서…… 혹시 내가 오는 게 부담스러워?”
“그건 아닌데, 이번에 칸에 가실 수도 있는데, 무리하시면 안 되잖아요.”
“칸은 무슨 칸? 아직 멀었어.”
“아니에요, 지금 초원의 집을 칸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한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원래 그 친구들이 바람 넣는 거 전문가야.”
“아닌데…….”
한유라가 말끝을 흐리자 옆에 있던 이지유가 활짝 웃으며 끼어들었다.
“한 팀장님은 어떻게 저보다도 기대를 더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당연히 기대해야지, 내가 정 선생님하고 같이한 세월이 얼만데. 그죠, 선생님.”
한유라가 활짝 웃자 정여진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래, 고마워. 이전 작품은 힘들 것 같고 다음에 노력해 볼게.”
겸손하게 한발 물러서는 정여진을 본 2팀장 한유라는 아무 말 없이 웃었다.
한유라는 마치 불상처럼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 미소를 짓다가 고개를 돌렸다.
회의실에 가득 찬 열기.
이것은 분명히 한 사람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바로 7팀의 이도훈 실장.
그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덜컹.
문이 열리자 누군가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들어왔다.
그는 다름 아닌 강영웅이었다.
강영웅은 어색하게 웃으며 정여진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우리 영웅이도 왔네.”
정여진이 활짝 웃으며 맞자 강영웅은 뒤를 힐끔 돌아봤다.
“다미도 선생님께 인사해야지.”
그 말에 강영웅의 뒤에서 그의 딸 다미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것도 잠시, 정여진을 보며 활짝 웃으며 달려갔다.
정여진의 앞에선 다미는 공손하게 배꼽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사탕 할머니.”
그 인사에 한유라가 눈을 크게 떴다.
정여진을 할머니라 부르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앞에 붙은 사탕이란 말은 너무 생뚱맞았다.
한유라의 시선에도 정여진은 다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만 원짜리 지폐와 함께.
다미는 사탕은 받았지만, 지폐는 받지 않고 강영웅을 바라봤다.
정여진은 푸근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오늘은 사탕이 하나밖에 없어서 돈으로 주는 거니까. 나중에 사 먹어.”
아직도 다미는 강영웅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영웅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미가 다시 배꼽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들의 모습에 한유라는 앞에 사탕이 붙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여진은 아이들을 좋아해서 사탕을 챙겨 오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나눠 주곤 한다.
물론, 사탕만으로는 서운하다고 조그만 선물도 덤으로 준비했다.
한유라는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래도 할머니랑 호칭은 너무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회의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자, 시작합니다.”
강시혁은 우렁찬 목소리로 시선을 집중시킨 뒤 손뼉까지 쳤다.
짝짝.
순간 모두의 시선이 회의실 앞에 있는 스크린에 모였다.
그들은 마른침을 삼키고 광고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반짝이는 타이틀 자막과 함께 영상 속에서 멘트가 흘러나왔다.
―아직은 100명의 전사가 그대로 남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전사 1명이 더 추가되었다는 점입니다. 과연 누구일까요? 잠시 뒤에 확인하시겠습니다.
―와아!
아쉬움이 가득한 탄성이 효과음으로 흘러나오고 화면이 바뀌었다.
새로 추가된 보컬 트레이너와 멘토들에 대한 소개가 잠시 이어지더니 무대로 영상 넘어갔다.
모두의 기대 속에 나타나는 한 명의 연습생.
“아아!”
“와, 이 실장님이다.”
이건 효과음이 아니었다.
유레카 회의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환호성이었다.
환호성이 점점 커지자 강시혁이 다시 일어나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쉬, 다들 조용. 그리고 우리 시원이하고 찬휘도 신경 써 주십시오.”
“맞아요, 축구 경기도 아니고……. 그런데 이 실장님이잖아요. 이 정도 응원은 해야죠.”
“맞아.”
“옳소.”
그들의 환호성을 강시혁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환호성은 십분도 안 되어 십 분의 일로 줄어들었다.
이상한 것이 도훈과 우시원 그리고 서찬휘의 분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바라보던 정여진이 한유라에게 물었다.
“한 팀장,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 실장 얼굴이 왜 한 번도 안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