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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훈은 수다를 떠는 직원들을 지나쳐 촬영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막 회의실이 있는 안쪽으로 걸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방금 직원들이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다.
동시에 도훈은 본능적으로 멈췄다.
묘하게 귀에 거슬리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퇴출’이라는 단어였다.
도훈은 한민국을 보고는 슬쩍 눈짓했다.
“민국이는 수영 씨하고 먼저 회의실에 가 있어.”
“실장님은 어디 가시게요?”
“나는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도훈은 뒤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러고는 도훈은 일단 재킷을 벗었다.
“참, 이것도 미리 가져가.”
“알았어요. 빨리 오셔야 해요. 제가 카메라 울렁증이 있단 말이에요.”
“카메라 울렁증이라…….”
도훈은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한민국을 바라봤다.
한민국의 이제까지 모습을 생각해 보니 이제까지 카메라 정면은 본능적으로 피했던 것 같았다.
도훈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옆에 있으면 괜찮고?”
“네, 묘하게 안전하다는 느낌이 있네요. 그런데 실장님이 없으면 이상하게 불안해요.”
도훈은 슬며시 손바닥을 바라봤다.
그곳에 떠 있는 매니저의 비밀 수첩을 확인하고 있었다.
한민국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매니저의 비밀 수첩인 것 같았다.
하지만 비밀 수첩은 그저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혹시 패시브 스킬이라도 있는 것일까?
도훈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님을 도훈은 알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와이셔츠의 단추를 풀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벽면에 있는 거울을 본 도훈은 머리까지 마구 헝클었다.
한참 동안 머리를 만진 도훈은 거울을 보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황수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코디까지 붙여서 세팅했더니 갑자기 머리를…….”
황수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도훈은 오전에 유명 미용실에서 세팅을 받고 왔다.
그런데 지금의 행동으로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황수영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황한 그녀의 표정을 본 도훈이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들어갈 때는 빗으로 잘 빗고 들어갈 테니까 먼저 출발하세요.”
“아니, 그래도 그렇죠.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렇게까지…….”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냥 알아볼 게 있어서요. 그러니까 먼저 가세요.”
도훈이 웃으며 복도 끝의 회의실을 가리켰다.
황수영과 한민국이 출발하자 도훈은 힐끔 바닥을 봤다.
복도 바닥에는 파란색 끈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파란색 끈의 끝에 붙어 있던 네임 태그에는 스태프라는 글자가 굵은 고딕체로 인쇄되어 있었다.
도훈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목에 걸었다.
그러고는 거울을 다시 한 번 봤다.
며칠 밤을 새운 것 같은 복장에 헝클어진 머리.
모든 것이 완벽했다.
도훈은 천천히 밖으로 나가 제작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가는 도훈을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 있는 제작진 중 반 이상은 피곤함에 모두 고개를 떨구고 있으니 도훈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도훈은 자판기 옆에서 캔 커피 하나를 뽑았다.
그러고는 수다를 떠는 직원들 사이에 자리 잡았다.
도훈이 나타났지만, 직원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만큼 대화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도훈은 아무 말도 안 하고 커피를 홀짝이며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 중 가장 열을 올리는 건 며칠 전 인사를 나눴던 막내 피디 고운미였다.
고운미는 어찌나 화가 났는지 입에 침을 튀기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게 말이 돼, 언니?”
“그래, 나도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올려놔도 유분수지. 언니, 우리가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국장에서부터 사장까지 죄다 오케이 사인을 냈다고 하던데…….”
“그래도 이건 아니지, 우리가 다 만들어 놨는데, 그걸 기획한 사람을 잘라? 언니가 좀 나서 봐.”
“야, 나 이번에 진급 걸려 있는 해잖아, 괜히 나섰다가…….”
“그럼 박 피디님한테 부탁해 볼까? 박 피디님은 임제호 총괄님이랑 각별한 사이잖아.”
“야, 박 피디도 여기서 잘렸어. 그런데 어떻게 이 일에 나서?”
“와, 굴러온 돌이 이렇게 박힌 돌을 빼도 되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일단 복지부동. 운미야, 너도 웬만하면 참아라.”
“나는 사표 내는 한이 있어도 못 참을 것 같은데…….”
그때 고운미가 어딘가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언니라 부른 피디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언니, 일단 피하자. 그 자식 왔다.”
“그래.”
직원들은 순간 이동하듯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커피 자판기 쪽이 아닌 으슥한 곳에 모여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고는 멀리에서 커피 자판기 앞을 얼쩡거리는 한 사내를 적의에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
도훈도 그들과 같이 뒤쪽으로 피한 상태에서 사내를 바라봤다.
순간 도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눈매를 좁혔다.
직원들이 경계하는 사내의 얼굴이 묘하게 얼굴에 익었기 때문이다.
낯설지 않다는 것은 전생에 도훈과 인연이 있던가 꽤 유명한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과연 누굴까?
도훈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사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머리에 손을 댔다.
동시에 도훈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사내는 주전자 뚜껑을 열 듯 자신의 머리에서 가발을 분리했다.
그러고는 가발을 빗으로 빗기 시작했다.
슬쩍 가발의 헤어스타일을 다듬은 그는 다시 가발을 착용했다.
도훈은 그제야 그가 누군지 떠올랐다.
케이블 방송 쪽에서는 최고의 인맥을 자랑하는 문동훈 피디였다.
그의 인맥은 반짝이는 그의 머리보다도 더 빛났다.
그가 빛을 발한 것은 인맥뿐이 아니었다. 그는 TV의 연예면을 꽤 화려하게 장식했다.
문제는 그가 나왔던 기사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연예면이 아니라 사회면에 더 많이 나왔던 것 같았다.
그가 사회면을 장식한 이유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순위 조작 때문이었다.
그는 다른 프로그램을 카피하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도훈은 전생의 기억이 똑똑히 떠올랐다.
그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은 임제호의 스타플레이어를 카피했을 때였다.
문동훈은 스타플레이어가 뜨자 스타 앤 아이돌이라는 이름까지 비슷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발표한다.
재미있는 것은 카피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오리지널 프로그램보다 더 높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탈락과 패스를 넘나드는 점수.
그 점수에 시청자들은 열광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밀기 위해 미친 듯이 전화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게 조작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조작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그는 구속되었고.
스타 앤 아이돌은 그 후 어느 곳에서도 영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오디션 프로그램의 수요가 줄지 않은 덕분에 임제호의 스타플레이어는 계속 시즌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이쯤 되자 도훈은 직원들이 그를 적의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때 문동훈이 촬영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본 직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휴!”
“이제야 갔네.”
“그러게요.”
모두가 웅성거리는 가운데 도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저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 말에 대답한 이는 고운미였다.
“저 새끼가 우리 총괄님을…….”
고운미는 말끝을 흐렸다. 묘하게 목소리가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낯선 목소리는 아닌데 동료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굳이 말하면 낯선 이와 동료의 중간 정도?
고운미는 고개를 돌렸다.
헝클어진 머리에, 풀어 헤친 와이셔츠 상의
거기에 목에 멘 네임 태그.
거기에 어디선가 본 얼굴.
분명히 같은 제작진이 맞았다. 그런데 왜 그가 낯설게 느껴질까?
그것이 의문이었다.
고운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누구세요?”
“아, 죄송합니다. 너무 불쑥 질문을 드렸네요. 저는 지난번에 인사드렸던 이도훈 실장이에요.”
“헉, 실장님!”
“쉿, 아직 문 앞에 저 사람이 있네요.”
도훈은 아직 문 앞에서 얼쩡거리는 문동훈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고운미는 표정을 수습했다.
잠시 후 문동훈이 안으로 완벽하게 사라지자 고운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들키는 줄 알았네.”
“그럼 마주 물어볼게요. 저 사람이 누구길래 이렇게 피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설명을 시작하려던 고운미는 힐끔 주변을 돌라봤다.
다른 직원들의 눈치를 보는 듯 보였다.
그때 언니라 불린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실장님이면 괜찮아, 그냥 말씀드려.”
언니라 불린 직원이 허락하자, 고운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된 상황이냐 하면요…….”
고운미는 랩을 하듯 설명을 쏟아 냈다.
순간 도훈의 눈이 점점 커졌다.
역사가 변했기 때문이다.
스타플레이어를 당긴 나비효과일까?
고운미의 설명은 간단했다. 위쪽에서 총괄과 메인 피디진을 모두 교체한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교체 이유는 시청률 상승을 위해 배수진을 깐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불모지였던 MBS에서 스타플레이어를 이만큼 올려놓은 것이 누구던가?
바로 임제호와 그의 오른팔인 박창성이였다.
그런데 개국공신을 내치고 새로운 총괄을 스카우트해 왔다고?
이쪽 바닥에 있는 사람 누가 들어도 콧방귀를 낄 내용이었다.
도훈이 생각하기에 스타플레이어가 탐난 문동훈이 인맥을 동원해 빼앗은 것이 분명했다.
아마 일시적으로 스타플레이어의 시청률은 오늘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파멸을 향해 달려 나갈 것이다.
문동훈이라는 조작 전문가 하나 때문에 말이다.
웃기는 것은 도훈이 여기에 비빌 인맥이 없다는 것이다.
“흠.”
도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바둑을 두듯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해 보았다.
아이돌에게는 엄청난 압력을 가하며 장면을 뽑아낼 것이며 아무리 잘나가도 문동훈의 눈에 들지 못한 아이돌은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잘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동훈이 여기에 온 것이 그의 욕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면?
도훈은 의심이 가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사촌 형이 이도준이였다.
자신에게 미라클 그룹의 지분까지 빼앗긴 이도준이 가만히 있을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가 가만히 있을 성격이라면 전생에 도훈의 등에 칼을 꽂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도훈은 이도준과 문동훈을 연결해 봤다.
둘이 꽤 궁합이 잘 맞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도훈이 이곳에서 직원들에게 사정을 듣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어찌 된 일인지 알았으니 대비도 가능했다.
그때였다.
고운미가 도훈은 바라보며 머뭇거렸다.
“이 실장님…….”
“네?”
“저희 언니를 돌봐 주셔서 감사해요.”
“언니라니요?”
도훈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