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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평범하면서도 인상이 좋아 보이는 후덕한 중년 사내였다.
그런 평범한 외국인이 목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상한 것은 그 외국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아-!”
더 이상한 것은 처음 목소리를 낼 때부터 지금까지 한 호흡으로 이어 가고 있었다.
인간이 폐에 담아 둘 수 있는 공기의 한계는 무시한 채 계속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전에 도훈이 질렀던 고음보다도 어찌 보면 난이도 있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숨이 차서 헐떡거려야 할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음이 점점 올라갔다.
“아아아아!”
그의 목소리에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 사람 대체 뭐야?”
“그러게…… 자기가 타잔이라고 착각하는 거 아니야?”
그들의 대화에 옆에 있던 친구 하나가 급하게 끼어들었다.
“이런 무식한 놈들하고는, 너희는 까를로스도 몰라?”
“까를로스?”
“까를로스 베아제, 세계 3대 테너.”
“그게 뭔데?”
“와, 이런 무식한 놈들 보소. 이번에 마이클이 이끄는 LA오케스트라하고 같이 공연한다고 하잖아.”
“아무리 봐도 세계 3대 테너 같지는 않은데…… 그냥 아저씨잖아.”
“너는 왜 외모만 보고 판단해? 저 목소리를 들어 봐. 그리고 이 잔을 봐 봐.”
“잔이 왜?”
“지금 잔이 물결치고 있잖아.”
“헉.”
친구가 놀란 듯 비명을 질렀다.
그가 가지고 있던 잔이 잔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끼를로스의 목소리 때문인 것은 확실했다.
그가 지금 그들의 옆을 걸어갔으니 말이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무대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터벅터벅.
거의 일 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누구도 시간을 인지하지는 못했다.
그만큼 놀라웠고 그만큼 뜻밖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체를 알아본 이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정체를 모르는 이들도 중년 사내가 무대로 향한 이유가 궁금했다.
무대 앞에 선 외국인, 즉 까를로스는 아직도 음을 높이고 있었다.
아직까지 한 호흡이라는 것은 관객 중 몇몇만 알고 있었다.
마이크를 잡고 있던 황수정은 마른침을 삼켰다.
황수정은 그가 까를로스임을 알아보았다.
그때였다.
까를로스의 목소리가 멈추며 주변이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가 멍하니 까를로스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는 검지를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황수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 무슨 뜻이에요?”
“저기 보세요, 저 측정기.”
까를로스는 이탈리아어로 했지만, 5개 국어에 능통한 황수영이 그 말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덕질을 할 때는 하더라도 후계자 수업에 충실했던 그녀였다.
그녀는 능숙한 이탈리아어로는 무슨 말이냐는 듯 다시 물었다.
“측정기라니요?”
“저 사람이 들고 있는 측정기요.”
까를로스의 말에 황수영이 이경민이 들고 있는 측정기를 확인했다.
순간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곳에는 믿지 못할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녀는 나지막이 측정기에 적힌 숫자를 말했다.
“110데시벨이네요.”
“그렇죠?”
까를로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측정기의 수치는 놀라웠지만, 지금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 지 황수영은 알 수 없었다.
“110데시벨이 나온 게 까를로스 씨와 무슨 상관이죠?”
그녀의 질문에 주변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중년 사내의 정체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웅성거림 속에 까를로스가 다시 손가락을 가리켰다.
모두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마이크 스탠드가 있었다.
황수영은 그제야 이유를 알았다는 듯 웃었다.
“아, 까를로스 씨도 이 무대에 참여하시게요?”
“그게 아니라, 나는 저 사람의 팬입니다.”
“저 사람이라니요…….”
황수영은 말끝을 흐렸다. 까를로스가 가리키는 곳에는 마이크 스탠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마이크 스탠드 뒤에는 도훈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까를로스가 말을 이었다.
“무대의 우승자는 관객의 함성으로 정한다고 했죠? 나는 저 사람을 위해 소리 질렀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소음 측정기에 나와 있는 숫자고요, 그럼 승자는?”
까를로스가 씩 웃자 황수영이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황수영은 그가 한 말을 그대로 번역했다.
“그러니까…….”
그녀가 번역한 대화에 파티장에 있던 사람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지 않아도 완벽한 무대였다.
처음 공연부터 마지막까지 거를 타선이 없다고 생각했던 오늘의 파티 무대였다.
그런데 마지막에 세계 3대 테너라 불리는 까를로스까지 등장해서 양념을 쳐 준 것이다.
모두는 흥분한 듯 소리 질렀다.
아아!
와아!
그들의 함성 속에 무대 위에서 고개를 떨군 한 명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 * *
파티장 옆에 만들어진 접객실.
그곳에는 외국인 둘과 한국인 한 명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하나는 바로 도훈이었다.
무대의 우승자가 최 회장을 만날 수 있는 기회 획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최 회장은 등장하기 이전.
도훈은 눈앞에 있는 두 인물을 보고 적잖게 놀랐다.
한 명은 방금 무대 앞까지 달려와 도훈을 도와줬던 까를로스였고.
다른 하나는 바로 마이클이었다.
신서희에게 소개받았던 마이클이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도훈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도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이클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표정을 보니 많이 놀라셨군요.”
“마이클이 여기에 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
“하하, 사실은 도훈이 여기에 온다고 해서 친구를 데려왔습니다.”
“네?”
“처음에는 이곳에 안 오려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도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이클이 말을 이었다.
“원래는 한국에서 이런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요?”
“그런데 최 회장님이란 분이 초청하면서 도훈이 여기에 다고 했고, 까를로스와 저는 거기에 낚여서 온 거고요.”
마이클은 옆에 앉은 까를로스를 가리켰다.
까를로스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제법 친해 보이는 둘의 모습에 도훈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까를로스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탈리아어로 인사를 하자 도훈이 손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마이클이 물었다.
“도훈, 이탈리아어도 합니까?”
“아주 조금요, 인사말 정도만요. 그런데 왜 저를 만나러 오신 거죠?”
“그야, 도훈이 시간을 안 내줬잖아요. 나는 도훈과 조금 더 음악적인 교류를 하고 싶었어요.”
말을 마친 마이클은 까를로스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손을 탁 내밀었다.
까를로스는 허탈하게 웃으며 주머니를 주섬주섬 뒤지더니 지폐 한 장을 꺼냈다.
그는 그 지폐를 마이클이 내민 손에 올려놓았다.
둘은 아마도 내기를 한 것 같았다.
도훈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 마이클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저는 까를로스와 내기를 했거든요.”
“지금 보니 내기를 했다는 건, 누가 봐도 알겠어요.”
“무슨 내기냐 하면…… 저는 얼마 전 제가 작곡한 노래를 까를로스보다 더 잘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마이클은 수다맨이 된 듯 그동안의 일을 다 털어놓았다.
마이클이 작곡한 곡은 바로 아윌비백이었다.
그가 작곡하고 도훈이 가사를 붙이고 편곡까지 한 곡이었다.
거기에 지금 도훈이 무대에서 부르기까지 했다.
도훈은 계속 마이클의 이야기를 들었다.
마이클의 이야기에 의하면 도훈이 가사를 붙이고 편곡한 아윌비백을 까를로스에게 들려줬다고 했다.
내한 공연이 예정되어 있던 까를로스가 그 곡을 자신이 사용하겠다고 하자 마이클을 안 된다고 거부한 것이었다.
거부의 이유는 그 곡을 다른 이에게 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 곡의 임자는 도훈이었다.
정확히는 도훈이 키울 그룹, 즉 가칭 블랙홀의 첫 앨범으로 사용할 곡이었다.
세계 3대 테너라 불리는 까를로스의 입장에서는 마이클의 말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만나서 확인해 보자고 보챘다고 했다.
내기로 건 돈은 10달러.
지금 마이클은 10달러짜리 내기에서 이긴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난 도훈은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자신은 무대에 50억을 걸었는데…….
10달러짜리 내기라고 하자 서운한 느낌마저 드는 것은 왜일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훈은 미소를 피워 냈다.
앞에 앉은 이는 세계 3대 테너 까를로스였다.
지금 이 시간은 어쩌면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었다.
이런 기회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야말로 천우신조.
이 모든 것은 괴짜라고 소문난 까를로스였기에 가능한 내기라고 생각했다.
그때 의문 하나가 생겼다.
마이클과 까를로스는 도훈을 보기 위해 왔다고 했다.
그런데 최 회장은 왜 마이클과 까를로스를 불렀을까?
도훈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렸다.
덜컹.
그곳으로 들어오는 백발의 노인.
키는 작지만, 어깨와 허리를 꼿꼿하게 쫙 펴고 있었다.
아마 그 사람이 최 회장인 것 같았다.
재미있는 것은 두루마기를 걸쳤다는 것이다.
두루마기 자락을 펄럭이며 들어오는 모습은 마치 신선이라 착각해도 될 정도였다.
도훈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자네가 이도훈 맞지?”
“네, 맞습니다.”
“많이 컸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오늘 처음 뵙는…….”
“험, 전에 봤는데 기억이 안 나나?”
“네?”
도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최 회장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에 대해서는 귀가 닳도록 들었다.
경제계에서 최 회장을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란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장경자에게도 최 회장의 얘기는 종종 들었다.
그런데 그가 자신과 안면이 있다고 한다라?
도훈은 이해가 안 되었다.
도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최 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도훈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에 최 회장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하하, 이거 너무하군.”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내가 악수를 청했는데 받아 주지 않은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네.”
“악수요?”
“악수 몰라? 핸드셰이크, 이거 말이야.”
최 회장은 손을 흔드는 시늉을 했다.
도훈이 재빨리 손을 잡자 그는 반갑다는 듯 맞잡았다.
물론 악수는 마이클과 까를로스에게도 이어졌다.
악수를 나눈 최 회장은 자리에 앉으라 손짓한 후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를 어떻게 아는 건지 궁금해하는 것 같군.”
“솔직히 궁금합니다.”
“흠, 이런 얘기를 해도 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네의 외할아버지뻘일세.”
“네?”
도훈의 눈이 한없이 커졌다.
이런 외할아버지가 있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거기에 ‘뻘’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정확한 친족 관계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도훈의 표정을 본 최 회장이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 기저귀를 한 네다섯 번은 갈아 줬을걸.”
“…….”
도훈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딱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