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소란은 점점 번져 갔다.
웅성대는 가운데 친구 중 하나가 어깨를 으쓱했다.
“확률이 없는데도?”
“확률이 낮으니 배당금은 커지지.”
“그럼 성공이냐 실패냐 배팅? 받아들이지 않으면 무효다.”
“콜.”
동시에 테이블 밑으로는 내기 돈이 오갔다.
도훈은 주변을 살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호기심을 모으는 것은 내기만 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모두가 웅성대고 있을 때 도훈이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대로 할게. 하나만 확인하자, 계산은 정확한 거지?”
“그래.”
“그럼 됐다, 내기는 성립된 거다.”
“좋아, 이 내기에 대해서 여기 있는 모두가 증인이다.”
이경민은 흥분했는지 주변 친구들을 돌아봤다.
그들은 다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너무한다 싶었는지 인상을 쓴 이도 있었고.
재미있다는 듯 턱을 괴는 친구도 있었다.
도훈이 말했다.
“이제 판을 깔아 줄 사람이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
“무슨 판?”
이경민의 물음에도 도훈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모두는 도훈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도훈은 조용히 어딘가를 바라봤다.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도훈에게 모였다.
그때 황수영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실장님 어딜 그렇게 보세요?”
“판 깔아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무슨 판요?”
“그건 두고 보면 알아요, 저기 오시네요.”
도훈이 가리키는 곳에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최 회장의 비서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비서가 걸어오자 황수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최 회장이 비서가 이곳에 올 일은 없었다.
그런데 왜?
단순한 의문이었지만, 그 물음표 하나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때 최 회장의 비서가 도훈의 앞에 멈췄다.
도훈은 반가운 얼굴로 말했다.
“송 비서님, 빨리 오셨네요. 회장님의 답장은요?”
“직접 보시죠.”
송 비서는 감정 없는 표정으로 자신의 정장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이 다시 나왔을 때는 냅킨 한 장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도훈에게 건넸다.
도훈이 냅킨을 가져가려고 하자 송 비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참, 회장님이 이 말은 꼭 전해 달라고 하시더군요.”
“무슨 말이요?”
“냅킨에다가 용건을 적어서 보낸 건 난생처음이랍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마땅히 적을 게 없어서요. 그렇다고 만나 주시지도 않을 거잖아요.”
“흠.”
송 비서는 입을 막고 헛기침을 했다.
도훈은 아무렇지 않게 냅킨을 펼쳤다.
그곳에는 최 회장의 답장이 적혀 있었다.
도훈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보다 빨리 답장이 왔기 때문이다.
도훈은 최 회장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 제안에 대한 답이 냅킨에 적혀 있었다.
도훈은 냅킨에 적힌 글을 중요한 서류라도 되는 듯 읽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던 황수영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몇 줄 읽어 나가던 황수영이 소리쳤다.
“헉, 이게 뭐예요? 도훈 씨.”
얼마나 놀랐는지 호칭이 아닌 이름을 부르는 그녀였다.
도훈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에게 냅킨을 건넸다.
“수영 씨가 좀 도와줄래요?”
“뭘 도와줘요?”
“여기 적힌 대로 하려면 누군가 진행을 봐 주셔야 할 것 같은데…….”
도훈은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는 도훈과 황수영만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황수영은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다급하게 도훈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구석진 곳으로 간 황수영은 따지듯 물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그냥 노래 한번 하고 가면 될걸…….”
“문제는 관객이죠.”
도훈은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웅성거리며 눈치를 살피는 재벌가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과 도훈은 번갈아 보던 황수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심호흡을 한번 한 뒤 입을 열었다.
“갑자기 여기에서 서바이벌 무대라니요?”
황수영은 도훈을 바라보다가 냅킨에 적힌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도훈이 최 회장에게 제안한 것은 간단했다.
그것은 자신의 공연을 보고 싶으면 다른 이들도 그 무대에 참여시키라는 것이었다.
도훈의 제안 덕분에 재벌가 친구들의 무대가 갑자기 생긴 것이다.
도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황수영을 바라봤다.
“최 회장님이 혼자 있다면 제가 얼마든지 무대에 설 수 있어요. 그런데 저 친구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싶지는 않네요. 이런 자리에서는 공평해야죠.”
“아무리 그래도 내기에다가 공연까지.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을 벌이시려고…….”
“즐거운 일이죠.”
말을 마친 도훈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냈다.
그러고는 냅킨의 뒷면에다가 뭔가를 적었다.
슥슥.
볼펜의 끝이 멈추고 도훈은 냅킨을 고이 접었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본 황수영이 물었다.
“이게 뭐예요?”
“큐시트요.”
“헉.”
냅킨을 잡고 있는 황수영의 손이 점점 떨렸다.
무대에 선 이를 동경하며 덕질에 몰두하기만 했던 그녀였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이 무대에 설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황수영은 조용히 무대가 있는 쪽을 바라봤다.
최 회장이 미리 만들어 놓은 무대 같았다.
황수영은 고개를 흔들어 고민을 털어 냈다.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장기 자랑과 비슷한 무대였다.
머리만 조금 컸을 뿐…….
무대 쪽에서는 벌써 직원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황수영은 냅킨을 들고 조용히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도훈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잠시만요.”
“네?”
“여기 냅킨 반장 떨어뜨렸네요, 이곳도…….”
“아.”
황수영이 입을 벌렸다.
그녀는 냅킨을 잘 챙기고 조용히 걸어갔다.
몇 걸음 가던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묘하게 마음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무대에 서서 진행을 해야 하는데 묘하게 긴장이 안 되었다.
이상한 것은 바로 몇 분 전 만 해도 긴장이 되어서 큐시트에 적힌 글도 안 보일 정도였다.
황수영은 슬쩍 큐시트를 펴 봤다.
그곳에는 무대에 올라 해야 할 멘트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거기에 진행 순서까지 일목요연하게 눈에 정확히 들어왔다.
그녀가 무대 뒤쪽으로 사라지자 도훈은 자신의 손을 펴봤다.
[보상 인벤토리 1: C, A, Y]
그곳에는 정확히 ‘M’이란 알파벳이 사라져 있었다.
도훈이 한 것은 하나의 시험이었다.
수첩에 적힌 사람에게만 능력을 옮길 수 있나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첩에 없는 사람에게도 능력을 줄 수 있었다.
알파벳 ‘M’이 MC로서 갖춰야 할 능력이었으면 좋겠다고 도훈은 생각했다.
* * *
도훈이 황수영과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자 웅성거림은 점점 커져 갔다.
그 웅성거림이 절정에 달했을 때 도훈이 자리로 돌아왔다.
도훈을 위아래로 살핀 이경민이 피식 웃었다.
“도망치려면 도망쳐도 돼.”
“쉿.”
도훈이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그때였다.
갑자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멈췄다.
음악 대신 흘러나오는 잡음.
지이잉.
파티를 즐기던 외국인과 재벌가의 친구들의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무대에서 불이 켜졌다.
활짝 밝아진 무대로 모두의 시선이 모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조명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 낮보다도 더 환해진 무대 위로 누군가가 올라왔다.
마이크가 미리 켜졌는지 무대 위를 울리는 구두 굽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서 흘러나왔다.
또각또각.
순간 모두의 눈이 커졌다.
그곳에는 황수영이 있었다.
황수영은 냅킨으로 만든 간이 큐시트를 힐끔 보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오늘 제가 여기에 선 것은 한 가지 게임을 제안하기 위해서입니다.”
잠깐 말을 끊은 그녀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의 시선에 주변은 온통 호기심으로 가득한 눈빛으로 가득 찼다.
수많은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황수영은 자신에게 살짝 헛숨을 흘렸다.
“휴.”
하지만 마이크를 통해서 나가지는 않았다.
급히 표정을 수습한 황수영은 다시 말을 이었다.
“게임은 간단합니다. 지금부터 한 명씩 무대에 올라 자신의 재능을 뽐내는 겁니다. 그중 1등이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 최크루지, 아니 최 회장님과 만날 기회를 갖습니다.”
순간 여기저기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크루지라는 것은 그들끼리 있을 때의 이야기고 어디선가 듣고 있는 최 회장이 있는데 그리 말할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수영의 말은 거침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마이크를 잡은 사람 같았다.
오죽하면 멘트를 이어 나가고 있는 자신이 놀랄까.
속으로는 놀라면서도 그녀는 입술에 버터를 바른 것처럼 멘트를 술술 쏟아 냈다.
“그리고 회장님이 약속 하나를 하셨습니다. 1등을 한 사람에게는 부탁 하나를 들어주기로 하셨습니다. 아까 내기를 진행하기로 했던 이도훈 님과 이경민 님의 내기도 이 무대에서 결정이 되겠지요……. 그럼 첫 번째 무대를 장식해 주실 분 계시면 무대 아래 진행 요원에게 달려오세요. 참, 1등은 박수 소리로 정합니다. 저 아래 보이죠?”
황수영이 아래를 가리키자 진행 요원 중 하나가 소음 측정기를 들어 올린다.
“네, 맞습니다. 저게 소음 측정기에요. 이번 게임은 정확히 측정할 거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마이크를 스탠드에 끼워 놓고는 옆쪽으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도훈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숨겨진 기능 보기로 찾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 남들에게도 수첩 속 능력을 전할 수 있는 것이 맞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도훈의 어깨를 툭 쳤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경민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간다.
뒷모습만 봐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이경민이 사교계의 황태자라 불리는 이유는 얼굴만 잘생겨서는 아니었다.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매너면 매너.
모든 것이 독보적이었다.
물론 필요할 때만 발동되는 이경민의 특기였다.
자신에게 필요 없는 사람에게까지 매너 있게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말이었다.
무대 아래로 간 이경민은 진행 요원에게 속삭였다.
자신이 부를 곡을 설명하는 것 같았다.
진행 요원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봐서 이경민이 선정한 곡이 준비되었다는 말인 것 같았다.
진행요원은 건네받은 곡을 정리해서 무대 위로 뛰어갔다.
무대 위에서는 황수영이 그 곡을 받고는 아래에 있는 진행 요원들과 눈빛을 주고받는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경민은 고개를 갸웃했다.
황수정과 그리 친하지는 않아도 대충 그녀의 성격과 평상시 행동 패턴 정도는 알고 있었다.
눈에 띄는 이들에 대한 모든 자료를 머리에 넣어 놓기 때문에 사교계의 황태자란 별명도 유지할 수가 있었던 것.
그런데 지금 황수영의 모습은 너무 생소했다.
마치 프로처럼 무대 위에서 진행을 하고 있는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생소였다.
그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진행 요원이 무대를 가리켰다.
“준비되셨으면 올라가시죠.”
무대에 오른 그는 조용히 마이크를 잡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음악이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