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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발도 마당발이지만, 그녀의 성격은 그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재벌가의 상속녀.
눈치 안 보고 덕질하는 후계자.
그게 황수영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이었다.
도훈은 그녀를 보며 필사적으로 눈짓했다.
그녀가 잘못 입을 열면 애써 놓은 덫이 무용지물 된다.
눈짓하는데도 달싹이는 황수영의 입술.
도훈은 재빨리 답했다.
“뭐, 내기 하나 하고 있었어요.”
“무슨 내기요?”
“여기 친구들이 최 회장님에게 누가 먼저 돈을 빌릴 수 있나 내기 중이라고 해서 저도 잠깐 끼어들었죠.”
“최 회장님한테 돈을 빌린다고요?”
황수영이 눈을 크게 떴다.
그도 그럴 것이 최크루지라 불리는 최수집은 섣불리 돈을 빌려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은 만나지만, 돈은 안 빌려준다.
안면을 튼 지 삼 년이 지나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
이것이 최크루지의 법칙이었다.
그러니, 최크루지에게 돈을 빌리는 자체가 내기가 되어 버린 것.
이들도 오늘 승자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수영은 관자놀이를 톡톡 치며 도훈과 이경민을 번갈아 바라봤다.
“제가 장담하건대, 오늘 최 회장님께 돈을 빌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아마 얼굴 보기도 힘들걸요. 난이도를 조금 낮춰 보는 게 어때요?”
황수영이 말을 마치자 이경민이 급하게 끼어들었다.
“무슨 난이도를 말하는 건가요?”
말을 마친 이경민이 귀를 쫑긋 세운다.
표정으로 봐서는 황수영과 안면이 있는 듯 보인다.
도훈은 이미 한발 물러나 둘의 대화를 보고 있다.
황수영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회장님 비서분을 만나고 왔거든요.”
“그런데요.”
“오늘은 상담을 안 하신대요.”
황수영이 빙긋 웃자 이경민이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에 도훈이 속으로 웃었다.
이경민은 아무래도 최 회장에게 용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뭐, 돈을 빌리는 일이 아니라도 최 회장과 안면을 트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들에게는 재산이 될 터였다.
대기업이라도 유동성 문제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법.
큰 규모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딱 둘뿐이었다.
그것은 최 회장과 도훈의 할머니인 장경자.
주변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경민이 물었다.
“대체 인사도 안 하실 거면 왜 여기에 우리를…….”
“오늘은 딱 한 명만 보겠다고 하시네요.”
“그게 무슨…….”
“그건 비서분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니 내기는 최 회장님과 만나는 사람이 이기는 것으로 하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흠, 그거 좋군요.”
이경민이 입꼬리를 올리며 힐끔 도훈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차라리 둘이서만 승부를 보는 게 어때? 콜?”
“콜.”
도훈이 말했다.
이번 승부를 전체가 아닌 둘의 승부로 가져가자는 것이다.
도훈은 사실 기가 찼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이렇게 일을 키우다니.
이경민이 방화범처럼 느껴졌다.
재미있는 것은 이경민, 자신에게 불을 지른다는 것이었다.
순간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둘의 내기에서 누가 이길지 예측하고 있었다.
그것도 잠시 그들은 안타깝다는 듯 도훈을 바라봤다.
그것은 내기의 승부는 이미 정해졌다는 듯 친구들은 모두 이경민 쪽에 한발 다가선다.
도훈은 그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참, 재미있게 논다.’
그들을 마주하고 보니…….
내가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대충 기억이 날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참교육.
최대한 녀석의 콧대를 꺾어 준다.
녀석을 교육시키는 데 한계는 없었다.
일이 벌어지면 조용히 수습하면 그만이었다.
도훈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인 듯 팔짱을 끼고 구경했다.
이경민이 옆으로 오더니 이도훈의 팔을 꽉 잡았다.
제법 강한 완력이 느껴졌지만, 이도훈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그 모습에 박경민이 말했다.
“떨고 있냐?”
드라마에서나 들어 봤을 대사에 이도훈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웁.”
“허, 황당하네, 지금 웃음이 나와?”
이경민의 이마에 줄이 갈 그때였다.
검은 정장의 사내가 천천히 걸어왔다.
이경민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의 앞으로 간 이경민이 물었다.
“뭐야? 왜 혼자 왔어?”
“그게 저…….”
사내는 말끝을 흐리며 봉투 하나를 꺼냈다.
재미있는 것은 그냥 봉투가 아니라 사극에서나 보는 누런색 서찰이라는 점이었다.
“뭐야?”
“그게 아니라, 회장님이 이게 답장이라 하셔서…….”
“허, 미치겠네.”
이경민의 타박에 사내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답했다.
“그냥 직접 보시는 게…….”
사내는 봉투를 탁자에 올려놓고 재빨리 도망치듯 사라졌다.
난데없는 상황에 웨이터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던 이경민이 재빨리 봉투를 잡았다.
그는 바로 봉투를 열어 확인했다.
그곳에는 편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순간 이경민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고는 바로 편지를 그 자리에 놓았다.
그때 바람이 쓱 불어왔다.
그 편지가 바람에 날려 바닥에 떨어지기 전 친구 하나가 잽싸게 낚아챘다.
그의 이름은 황혁수.
아버지는 문체부 장관이며 그는 국가대표 수영 선수 출신의 방송인이었다.
서글서글하게 생긴 외모에 다부진 체격의 그가 편지를 펼쳤다.
그러고는 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도 보자.”
여기저기서 친구들이 몰려들었다.
편지에 적힌 메모를 본 친구들은 조용히 이경민을 바라봤다.
편지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백으로 인맥을 만들지 말고 실력으로 만들도록. 네 할아버지 편지 한 장으로 나를 만나려고 하다니. 참 어리석구나, 중생이여…….
편지에서는 사극 톤이 묻어난다.
이것은 분명 최수집 회장의 장난이었다.
편지의 내용에 나와 있듯 이경민은 뒷배를 이용해서 친구들과 내기에서 이기려고 한 것이다.
이 자리는 최수집 회장이 만들어준 경제인 3세들의 소통 장소였지만, 여기에서 군림하기 위해 이경민이 판을 짠 것.
그런데 그 밀담이 여기에서 공개된 것이다.
모두 킥킥대고 웃었다.
도훈도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들을 만나 이렇게 웃을 줄은 여기 오기 전까지는 생각도 못 했었다.
이렇게 재미있게 여가를 즐기는 것은 전생에는 상상도 못 했다.
웃음소리가 멈추자 황혁수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
사과하는 황혁수의 앞에 박경민이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놨다.
“황혁수, 너는 내가 만만하게 보여?”
이경민의 주먹은 핸드폰의 진동이 울리듯 부르르 떨렸다.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할아버지의 뒷배로 만나지 못할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난공불락의 최수집이라고 해도 한 번에 까였다고?
“…….”
확 돌아간 이경민의 눈빛에 체격이 좋은 황혁수도 움찔하며 입을 닫았다.
물러나는 황혁수의 모습에 이경민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해 보든가.”
“네가 안 됐는데, 내가 되겠냐?”
황혁수가 슬쩍 한 발 뺐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훈은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손에서 진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훈은 슬쩍 자리를 피해 옆으로 가서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아무도 없자 도훈은 매니저의 비밀 수첩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손바닥에는 새로운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돌발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전생의 적을 만났습니다. ‘적은 쥐어짜야 제맛!’ 수락하시겠습니까?]
[제한 시간: 오늘 자정. 보상: 알 수 없음.]
전생의 적이라?
이경민이 조금 괴롭히기는 했어도 적까지는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생각을 이어 나가던 도훈은 전생에 마지막까지 몰렸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이었다.
아마 녀석도 도훈의 등에 칼을 꽂는 데 일조했을 것이 분명했다.
매니저의 비밀 수첩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까.
비밀 수첩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는데.
그때 도훈의 눈에 멀리 있는 최수집 회장의 비서가 들어왔다.
순간 도훈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도훈은 천천히 최수집 회장의 비서를 향해 걸어갔다.
사실 자신이 여기에서 공연하는 것과 최수집 회장을 만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도훈은 최수집 회장의 비서 옆에 섰다.
그러고는 조용히 그에게 속삭였다.
* * *
비서를 만나고 온 도훈이 자리에 앉자 이경민이 물었다.
“이도훈, 너도 실패했냐?”
“실패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방금 보니 저기 계신 분의 표정이 심각하던데, 까인 거냐?”
“…….”
“그러기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아야지.”
“오르지 못할 나무라…….”
도훈이 나지막이 중얼거리자 이경민이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이도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새는 법이지. 네가 집에서 받는 대우는 대충 알고 있다. 괜히 기어오르려고 하면 확 터뜨려 버릴 테니 잘 처신해. 그럼 이 모임에도 못 나올 테니까.”
말을 마친 이경민은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를 이어 갔다.
그 모습에 이도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경민이 이렇게 자신을 위협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도훈의 소문이 아직 그들에게 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도훈은 아직까지 가문의 순둥이.
혹은 가문의 수치로 남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장난이 반복되면 그건 장난이 아닌 테러였다.
뒤통수는 전생의 기억만 해도 충분했다.
도훈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탁자를 박자에 맞춰 톡톡 쳤다.
그러던 도훈이 손가락을 멈추고 이경민을 바라봤다.
“내가 돈까지 빌리면 어떻게 되는 거냐?”
“크크, 정말 시도해 보게?”
“뭐, 밑져야 본전이니까.”
“그럼 놀림감이 돼 보든가.”
“대신 하나만 더 걸자.”
“뭘 걸자는 거지? 네 회사라도 걸게? 아니다, 아니야. 네가 걸 회사라도 있냐?”
“내가 걸 마땅한 업체가 없으니까 하는 이야긴데…….”
“그럼 뭘 걸게?”
“50억에 벌칙 하나만 추가하자.”
“아까 50억 이야기 진짜였어? 네가 지면? 문제는 네가 돈이 없다는 거잖아.”
“그땐 내 미라클 지분을 주지.”
“네가 미라클의 지분이 있다고?”
“정확히 말하면 얼마 전 JK유통의 지분을 받았지.”
“흠.”
이경민이 의심스러운 듯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놈의 눈이 반짝였다.
“내가 널 못 믿어서 그러는데…….”
“말해 봐.”
도훈이 묻자 이경민이 말을 이었다.
“너는 돈을 빌려야 이기는 거고. 나는 만나기만 해도 이기는 걸로 하는 게 어때? 네가 이기면 내가 벌칙도 받고 돈도 주지. 내가 이기면 너는 벌칙만 받고. 대신 벌칙이 두 개야!”
이경민은 손가락 두 개를 폈다.
그때 도훈이 말을 이었다.
“그럼, 너는 만나고 나는 돈을 빌리면 누가 이기는 거지?”
“그런 네가 이기는 거로 하지.”
이경민이 선심 쓰듯 말했다.
그들의 내기에 친구들이 귓속말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야, 저거 완전 불리한 거 아니야?”
“그렇지, 저기에 넘어가면 호구지.”
“우리 내기할까? 이도훈이 넘어가는지 안 넘어가는지.”
“이제까지 행동만 보면 넘어가겠지, 실속보다는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녀석이니까.”
“에이, 나도 넘어간다인데, 그럼 내기가 안 되는데…….”
그때 구석에서 조용히 술잔을 들고 있는 친구가 작게 속삭였다.
“나도 걸까? 나는 조금 다른데, 넘어가긴 넘어가는데 이도훈이 이긴다에 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