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고운미의 입술이 참새가 모이를 쪼듯 쉴 틈 없이 움직였다.
며칠 전에 정재원이 도훈에게 호통을 친 일.
오늘 길목을 지키고 있던 것까지 하나도 빼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설명을 이어 나가던 고운미는 울 것처럼 눈물까지 글썽였다.
“……진짜예요. 무슨 방송국이 놀이터도 아니고 정 피디님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알았어, 고 피디. 일단 진정하고 회의실로 가자고.”
“아마 안 올 수도 있어요.”
“설마…….”
“총괄님도 정 피디님 안하무인 성격 아시잖아요.”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보자고.”
임제호는 이를 꽉 물었다.
임제호는 머리를 감싸 쥐다가 쓱 뽑혀 나오는 머리털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또 빠졌네.”
“괜찮으신 거죠?”
박창성이 뒤따라가면서 묻자 임제호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이게 괜찮은 거로 보여?”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헉 많이 빠지셨네요.”
“야, 재수 없게 빠진 머리를 왜 세고 그래?”
“죄송합니다, 선배님.”
박창성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임제호가 장난처럼 말하기는 해도 머리카락 한 올에 그가 얼마큼 무기력해지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임제호가 씩씩 대면서 걸어가자 그 뒤로 박창성과 고운미가 따라갔다.
그는 회의실 문을 힘껏 열었다.
덜컹.
탕.
얼마나 세게 열었는지 문이 열렸다가 그 반동으로 다시 돌아온다.
임제호는 다시 문을 밀치고 나서 정재원을 바라봤다.
정재원은 시선이 마주치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임제호에게 달려왔다.
순식간에 임제호의 앞에 선 정재원이 다급하게 물었다.
“총괄님, 혹시 이도훈 실장은 언제 오나요?”
“왜?”
짧게 묻고는 쏘아보는 임제호의 모습에 정재원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할 말이 있어서 그렇죠.”
“할 말은 무슨 할 말? 너는 이도훈 실장 오면 한마디도 하지 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단 말입니다.”
“너 며칠 전에도 이도훈 실장한테 으름장 놨다면서?”
“제가 무슨…….”
정재원을 슬쩍 말끝을 흐렸다.
당시 자신이 한 말을,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일과 경제인의 밤에 이도훈 실장을 무시한 일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것이 아니던가?
그 표정을 본 임제호가 말했다.
“거봐, 표정을 보니 뭔가 사고를 쳤군.”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사과하려고 하는 겁니다.”
정재원은 버럭 성질을 냈다.
그 모습에 임제호가 주먹을 쥐어 보였다.
“너 지금 이도훈 실장이 왜 안 오는 줄 알아?”
“…….”
“네가 아까 입구에서 지키고 있었다면서?”
“그건 사과하려고 미리 나가 있던…….”
“네가 사과를 해? MBS가 KBC로 이름 바뀌는 게 빠르겠다.”
“조금의 거짓말도 없습니다. 저는 꼭 이도훈 실장한테 사과해야 합니다.”
“왜 네가 사과하는데?”
“그건…….”
정재원은 말을 맺지 못했다.
경제인의 밤, 행사 때 이도훈 실장이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정체에 대해 말하면 지구 끝까지 가서라도 복수하겠다고 했다.
복수란 단어를 썼는지 안 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눈빛이 그랬다.
정재원의 표정이 변화무쌍한 와중에 임제호의 표정을 점점 험악해졌다.
임제호의 얼굴을 점점 붉어져서 이제는 터지기 직전 화산처럼 보였다.
임제호의 입술이 실룩일 때였다.
덜컹.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천천히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이는 임제호가 기다리고 있던 이도훈 실장이었다.
도훈이 자리를 찾기 위해 주위를 훑어보자 갑자기 정재원이 벌떡 일어났다.
마치 고개를 발견한 하이에나가 돌진하는 모습이었다.
막내 스태프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났다.
정재원을 말리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도훈의 앞으로 다가간 정재원이 멈추더니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한 인스턴트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어색한 미소.
그러더니 의자 하나를 뺐다.
“여기 앉으시죠, 실장님.”
순간 회의실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도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 앉아 오늘 촬영분의 큐시트를 넘겼다.
마치 이곳에 오랫동안 있던 사람처럼.
도훈은 큐시트를 넘겼지만, 사실 보고 있는 것은 손바닥에서 빛나는 매니저의 비밀 수첩이었다.
도훈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다, 키우려면 빨리 미션을 끝내야 하는데…….”
그 목소리에 임제호가 물었다.
“이 실장, 무슨 얘기야?”
“아, 이 프로그램이 장수할 것 같아서요. 그러려면 모두가 건강해야 하잖아요.”
도훈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도훈은 그 누구보다 더 환하게 웃었다.
이 웃음은 진심이었다.
이제는 남은 인연들을 정상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받침대를 마련했으니까.
회의는 두 시간 동안 계속됐다.
회의가 끝나자 임제호는 푸근한 미소를 장착하고는 도훈을 바라봤다.
“이 실장,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
“그래도 어떻게…….”
“아니야. 잘 쉬어야지 내일 화면도 잘 받지.”
“그래도 될까요?”
“당연하지, 안 그래?”
임제호는 고개를 돌려 다른 피디들을 바라봤다.
박창성은 벌떡 일어나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럼요. 오늘은 쉬셔도 돼요. 오늘 촬영분은 거의 끝났거든요. 오늘은 개인 연습이라서 멘토가 끼어들 틈이 없어요.”
고운미도 환하게 웃으며 큐시트를 가리켰다.
그때 정재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슬그머니 도훈의 옆으로 다가왔다.
“이왕에 쉬시려면 오늘 저녁은 제가 대접하도록 하죠. 어떠세요?”
정재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공손히 가운데로 모았다.
그 모습에 임제호가 말했다.
“정 피디는 빠져, 왜 거기서 주먹을 쥐고 그래.”
“저 주먹을 쥔 게 아니라 공손하게…….”
“헛소리하지 말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해.”
임제호가 회의실 밖을 가리키자 정재원은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떠났다.
정재원이 자리를 떠나자 박창성이 도훈의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친구가 조금 싸가지가 없긴 해도 일은 잘해요. 혹시라도 이 실장님께 실수한 게 있다면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하하, 안 그러셔도 되는데…….”
“아니네요. 제가 이곳에 남아서 저 친구를 관리할 테니, 이 실장님은 마음 푹 놓으세요.”
박창성은 환하게 웃었다.
도훈은 프로그램에서 당장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자신과 임제호는 그에게 실수를 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자신들이 아군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 줘야 하는 상황이었다.
도훈은 그들의 과잉 친절에 고개를 갸웃하며 일어났다.
뭔가 과하게 친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묘하게 정재원과 자신을 철저히 떼 놓으려는 느낌도 받았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가고.”
임제호가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본 도훈은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회의실 밖에는 황수영이 얼굴을 찌푸린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도훈이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그 정재원 말이에요. 걔가 MBS에서 근무하고 있었어요?”
“어? 수영 씨도 그 친구 알아요?”
“그럼요, 그 싸가지를 모르는 초등학교 동창은 없었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화가 나신 겁니까?”
“아니, 갑자기 저한테 청탁을 해 오잖아요.”
“청탁이요?”
“이 실장님한테 잘 좀 말해 달라나 뭐라나?”
“저한테요?”
“네, 실수한 게 많다면서요.”
“그럼, 아까…… 음모를 꾸민 게 아니라 혹시 사과하려고 기다린 건가? ”
도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복도를 바라봤다.
하지만 지금은 정재원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도훈은 슬쩍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방송국을 장악하라 연계 퀘스트: 시청률을 장악하라 2단계가 실행됩니다.]
[시청률 10,000% 달성 시 성공. 기간: 무제한]
미션의 기간은 무제한이지만, 사람의 수명마저 무제한은 아니지 않은가?
우시원과 서찬휘 그리고 이지유 같은 자신의 연예인을 조금 더 빨리 정상에 올려놓으려면 퀘스트의 완료는 필수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훈은 게이머의 마음과 조금 비슷했다.
누구라도 게임 엔딩을 조금 더 앞당겨서 보고 싶은 마음은 비슷할 터.
도훈도 퀘스트의 마지막을 빨리 확인하고 싶었다.
문제는 퀘스트를 완료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바로 자금 때문이었다.
자금만 마련되면 케이블 채널의 소유권을 조금 일찍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저것 도훈이 가지고 있는 걸 다 정리해도 시간까지 앞당길 수는 없었다.
도훈은 힐끔 황수영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황수영이 재빨리 답했다.
“한 매니저님은 잠깐 화장실 갔어요? 참, 어디로 가실 건가요?”
“그게 아니라, 혹시 돈 가진 것 좀 있나요?”
“음, 잠시만요.”
황수영은 재빨리 자신의 크로스 백에서 지갑을 확인했다.
그 모습에 도훈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런 돈 말고요.”
“지갑에 있는 돈이 아니라면 어떤 돈이요?”
“케이블 채널 인수할 돈이요.”
“헉.”
황수영은 슬그머니 입을 벌리더니 주변을 살폈다.
마치 숨을 곳을 찾는 한 마리 토끼와도 같았다.
주변을 살피던 황수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요.”
황급히 자리를 떠난 황수영을 본 도훈이 피식 웃었다.
* * *
그날 저녁.
도훈은 장경자의 저택을 방문했다.
한민국은 졸지에 집안까지 따라 들어오게 되었다.
황수영은 장경자가 무섭다고 하면서 일찌감치 튄 상태였다.
마지막에 남은 것이 한민국이기에 할 수 없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도훈은 그런 한민국을 보며 피식 웃었다.
신입 사원과 회장과의 식사 자리가 과연 즐거울까?
조금 더 쉬운 상황을 예로 든다면.
이등병과 사단장과의 식사 자리가 과연 즐거울까?
백이면 백 고개를 휘휘 저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 한민국의 표정이 그랬다.
한민국은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장경자도 피식 웃었다.
“에고, 비라도 맞았나? 왜 사시나무 떨듯이 떨어?”
“아, 아닙니다.”
“누가 보면 내가 괴롭히는 줄 알겠네. 이거 한 점 먹어.”
장경자가 불고기를 집더니 한민국의 밥그릇 위에 올려놨다.
순간 한민국이 고개를 푹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회장님.”
한민국의 복받친 목소리가 떨리는 입술을 뚫고 나오자 장경자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장경자는 한민국이 왜 이렇게 감격하는지 알고 있었다.
이 불고기 한 점을 먹으려고 첫째와 둘째 아들이 얼마나 노력하는가?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저렇게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모습에 도훈이 한민국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평상시하고 다른 불고기니까, 그렇게 감격하지 마.”
“네? 뭐가 다른데요?”
“원산지가 달라.”
“네?”
“이건 한우고 평상시에 드시는 건 수입 육이야.”
“헉, 정말로요?”
한민국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도훈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농담이니까, 긴장 풀어.”
둘은 누가 봐도 친형제와도 같았다.
어찌 보면 피가 섞인 친형제보다도 더 끈끈해 보이는 둘.
둘을 바라보던 장경자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허허, 둘이 재미있어 보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