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한참 동안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던 도훈의 눈이 커졌다.
드디어 도훈이 기다렸던 이야기가 나오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 징조로 양사단이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장경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들.”
“어이구, 양 회장님 오셨네. 준비하느라 고생 많으셨지요?”
황백석이 양사단을 반갑게 맞았다.
둘을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와인으로 입술을 적셨다.
하지만 양사단은 황백석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장경자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사실 전생의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거래가 오갔다는 사실과 그 거래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날름 받아먹었다는 사실밖에는 모른다.
그 거래의 첫 번째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양사단 회장이었다.
계속 시기를 가늠하던 양사단이 장경자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저기 장 회장…….”
“…….”
양사단의 외침에도 장경자는 대답이 없었다.
마치 사건을 마주한 탐정처럼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고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정리하고 있었다.
먼저 떠오른 의문은 자신의 최애인 강영웅의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는 점이었다.
초반부의 목소리와 중반부의 목소리가 완벽하게 달랐다.
거기에 처음 무대에 올랐던 젊은 친구의 모습은 분명히 어디선가 본 듯했다.
‘벌써 치매가 왔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장 회장, 지금 양 회장이 부르는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고개를 돌려 보니 황백석과 양사단이 그녀를 뚫어지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장경자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뭐, 늙으면 고민이 많아지잖아, 다른 회장님들은 안 그런가?”
“나도 마찬가지긴 한데, 그래도 양 회장이 그렇게 애타게 부르는데 아는 척은 해 줘야지.”
황백석이 양사단을 가리키자 장경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해요, 양 회장.”
“아이고, 아닙니다, 장 회장님.”
“그런데 왜 불렀죠?”
장경자는 양사단을 살폈다.
그 눈빛이 황백석을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달랐다.
지금은 완벽한 비즈니스 모드.
그 모습에 양사단이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네. 제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잠시 자리를 옮길 수 있으실는지요.”
장경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에 올 때부터 그가 접근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양사단의 산하그룹은 지금 자금난에 고생하고 있다고 들었다.
몇 번씩 연락이 왔지만, 장경자는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원래 거래라는 것은 최소 어느 한쪽이 간절해야 이루어지는 법이었다.
장경자는 그 간절함을 만들기 위해서 나름대로 포석을 깔아 둔 것.
“그냥 여기서 말씀하시죠.”
“그게…….”
“사업 이야기라면 따로 날 잡아서 하고,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하죠.”
장경자가 손을 휘휘 저었다.
사정은 알지만, 대화의 장소.
대화의 시간 등 모든 주도권을 갑이 쥐어야 하는 게 협상의 규칙이었다.
협상의 주인은 바로 장경자였다.
순간 양사단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것도 잠시 양사단은 재빨리 표정을 바꿨다.
“사업 얘기면서도 사업 얘기가 아니라서 그럽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혹시 물건 하나 안 사시렵니까? 진짜 거저인데.”
“거저라?”
“진짜 거저입니다. 혹시 알로라는 케이블 채널 아시죠?”
“산하그룹 애물단지 아닌가요?”
장경자의 말에 양사단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무슨 서운한 말씀을…….”
“혹시 가수가 나옵니까?”
“…….”
“혹시 물건을 파는 방송국입니까?”
“…….”
장경자가 말하는 요지는 간단했다.
케이블의 특성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질문에 양사단은 조용히 장경자를 바라봤다.
기분 나쁜 표정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아이디어를 쥐어짜 내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보고 있던 도훈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실 산하그룹이 운영하는 알로TV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육아 케이블 채널이었다.
문제는 알로TV 자체의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딱 일 년만 지나면 알로TV는 환골탈태하게 된다.
물론 그 와중에 합병이라는 중요한 과정이 있긴 했다.
그 과정을 거친 뒤 알로TV는 케이블 채널 중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방송국이 된다.
도훈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경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산하그룹의 곳간이 아직 넉넉한 거로 아는데, 왜 내놓으시는 거죠?”
“넉넉하지 않습니다, 장 회장.”
“이대로 가도 몇십 년은 충분하지 않습니까? 아닌가요?”
“제가 요즘 묘한 버릇이 생겨서 그럽니다, 장 회장.”
“무슨 버릇이죠?”
“편식하는 버릇입니다.”
“편식이요?”
“묘하게 입이 안 맞는 건 눈앞에서 치워 버리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치우려고 합니다.”
“그 김에 자금도 확보하고요? 그 자금으로 입에 맞는 것도 사 드시겠다는 건가요?”
“하하, 뭐, 그렇습니다.”
그때였다.
장경자가 슬쩍 도훈을 바라봤다.
황수영과 대화를 나누던 도훈은 장경자와 눈이 마주치자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 모습에 장경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도훈은 스프링처럼 장경자의 앞으로 달려갔다.
도훈이 오자 장경자가 말을 이었다.
“방송 쪽은 우리 손자가 전문이라서요. 이 애와 한번 이야기해 보시죠.”
장경자는 도훈을 가리켰다.
양사단이 입을 딱 벌리더니 조심스럽게 도훈을 살핀다.
도훈도 양사단의 눈치를 살폈다.
갑자기 링 위에 오를 선수가 바뀐 상황.
사실 도훈은 지금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 나서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장경자가 알아서 호출한 것이다.
양사단의 표정을 살피던 도훈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자네 얼굴은 처음 보는군.”
“앞으로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나도 체급을 맞춰 볼까나?”
“네?”
도훈이 고개를 갸웃하자 양사단이 전화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누군가를 불렀다.
양사단이 전화를 끊자 방송실에서부터 누군가 빛의 속도로 달려왔다.
그는 다름 아닌 양규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도훈과 날을 세웠던 사람이었다.
체급에 맞게 선수가 바뀌었다.
도훈은 양사단을 힐끔 바라봤다.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급해도 체급에 맞지 않는 싸움은 안 하겠다는 굳은 의지가 보인다.
아니면 자신의 손자를 믿는 것을 수도 있었다.
갑자기 불려 나온 양규현은 도훈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아닙니다.”
도훈이 손을 내저었다.
지금의 아까와는 전혀 다른 종목이었다.
이전의 감정을 이 판에 끌고 올 필요는 없었다.
장경자를 비롯한 회장들이 도훈과 양규현을 둘러쌌다.
마치 싸움 구경을 하러 나온 동네 아저씨들 같은 느낌.
도훈은 그 모습에 혀를 찼다.
도훈은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말을 이었다.
“지금 매물로 알로가 나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저는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유레카의 대표이긴 해도 케이블 방송국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서요.”
“어디부터 원하시죠?”
“바닥부터 부탁드립니다.”
“그러니까…….”
양규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모든 행사가 끝났지만, 그들의 대화는 아직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여기까지 하고 오늘은 마치시죠.”
도훈이 씩 웃으며 양규현을 바라봤다.
양규현도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렇게 하죠.”
둘은 서로 손을 내밀었다.
양규현과 인사를 나눈 도훈은 고개를 갸웃했다.
모든 일은 술술 잘 풀렸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오늘 넘어가는 케이블 TV 방송국은 모두 두 개.
전생의 기억에 의하면 모두 정노해 회장이 가져간다.
그런데 정노해 회장은 이곳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훈은 이제 두 번째 목표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황수영의 할아버지인 황백석 회장이었다.
알로TV 하나 가지고는 안 된다.
황백석 회장이 가지고 있는 TV까지 모두 손에 넣어야 그림이 완성되었다.
도훈이 두리번거리자 장경자가 물었다.
“도훈아.”
“네, 할머니.”
“눈에서 불나겠다, 누굴 그리 찾아?”
“혹시 황백석 회장님 어디 가셨나요?”
“아까 정노해 회장이 와서 같이 내려갔는데.”
“정노해 회장이요?”
“그래, 정노해.”
“잠시만요, 할머니.”
“왜 그러니, 도훈아.”
“저 먼저 들어가 볼게요.”
도훈은 장경자에게 고개를 숙인 뒤 재빨리 자리를 빠져나왔다.
어쩐지 느낌이 싸했다.
오늘 한 번에 두 개의 채널을 삼켜야 골치를 썩이지 않는다.
두 개의 채널은 양쪽으로 나누어진 보물 지도와도 같았다.
하나만 가지고 있다면 성장에 한계가 있는 채널.
반드시 두 개가 모두 필요했다.
연회장을 빠져나온 도훈은 머리를 굴렸다.
이곳은 호텔.
여기보다 대화를 나누기 좋은 장소는 없었다.
둘이 협상을 한다면?
분명히 이 호텔 내에 있을 것이다.
호텔의 바 또는 레스토랑.
아니면 커피숍.
도훈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호텔 로비 쪽으로 달려가는 도훈은 걸음을 멈췄다.
낯이 익은 얼굴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황백석 회장의 손녀 황수영.
도훈은 재빨리 그녀에게 달려갔다.
“수영 씨.”
갑자기 뛰어오는 도훈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황수영이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혹시 수영 씨 할아버지 어디 계시는지 알아요?”
“저쪽에서 정 회장님하고 말씀 나누고 있는데요.”
“혹시…….”
“말씀하세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있을까요?”
“무슨 거래라고 하던데…….”
“거래요?”
“네, 분명히 무슨 거래라고 했어요. 저한테 나가 있으래서…….”
황수영은 옆쪽을 힐끔 본다.
그녀가 바라보는 곳은 이 호텔의 레스토랑이 있는 곳이었다.
도훈은 황수영을 보며 말했다.
“어디 계신지 안내 좀 부탁드려요, 수영 씨.”
“자, 잠시만요. 대체 무슨 일이에요?”
“조금 급한 일이라서 그래요.”
“그럼, 저한테 빚 한 번 진 걸로 해요.”
“네, 좋아요.”
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만약에 여기서 거래가 진척된다면?
앞에서 양규현과 오갔던 대화도 모두 백지로 돌려야 했다.
황수영은 씩 웃더니 씩씩하게 앞서 나갔다.
그녀가 멈춘 곳이 VIP룸 바로 앞이었다.
“여기에요.”
말을 마친 황수영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덜컹.
황수영은 범죄 현장을 기습하는 형사처럼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훈도 재빨리 황수영을 따라 들어갔다.
술잔을 들고 있던 두 명의 회장이 황수영과 도훈을 바라봤다.
그중 황백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수영아.”
질책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그때 도훈이 한발 나서며 말했다.
“회장님, 담소를 나누는데 죄송하지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해 보게.”
황백석이 턱짓하자 도훈이 외쳤다.
“이왕이면…….”
도훈의 말에 황백석의 눈이 커졌다.
도훈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제게 주십시오.”
순간 황백석 회장은 입가에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지금, 무슨 거래인 줄 알고 있나?”
“케이블…….”
도훈이 살짝 말끝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