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114)
좀처럼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도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그냥 한 말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 좋은 얼굴로 손을 내젓는 도훈의 모습에 박창성은 협상의 상대가 만만치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하하.”
슬그머니 웃음으로 빠져나가려는 박창성.
일단 작전 타임이 필요했던 것.
하지만, 도훈은 그에게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물었다.
“우리 강 피디한테 들어보니 저를 찾으셨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할 말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그게…….”
박창성은 쉴 틈 없이 설명을 시작했다.
핵심은 간단했다.
도훈이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계속된 박창성의 설명에 옆에 있던 강시혁은 눈을 크게 떴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었다.
가장 정신이 없는 것은 신서희였다.
그녀는 다른 제작진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쪽에서는 다소 심각한 주제의 이야기들이 오가니 집중을 할 수 없었던 것.
물론 도훈은 박창성에게만 집중했다.
이럴 때일수록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도훈이 대충 이런 협상이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만약 이런 기회가 온다면 마다할 매니저가 어디 있을까?
무려 지상파에 고정 출연할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그것도 특별 심사위원으로 말이다.
박창성은 미안한 표정을 벗어던지고 자신 있게 제안하고 있었다.
박창성도 초반에는 다소 주춤했지만, 설명을 이어 나갈수록 도훈이 허락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제안하는 도훈의 역할은 다양했다.
그들은 일단은 도훈을 이 판에 끌어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힘드시다면 초반 분량만이라도 출연을 해 주시는 게 어떨까요? 그렇다고 저희가 초반만을 원하는 건 아닙니다. 고정 자리를 달라고 하면 고정을 줄 수도 있습니다.”
“지금 특별 심사위원이라고 하셨는데, 얘기 들어보니 투표권도 없잖아요. 그 흔한 슈퍼패스도 없고요.”
“그건…….”
박창성은 숨이 탁 막혔다.
특별 심사위원은 말 그대로 약방의 감초처럼 적절한 멘트를 쳐 주는 역할이었다.
연습생의 합격 여부에 대한 심사권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박창성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이유는 유레카의 연습생인 우시원과 서찬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에서 심사권을 준다면 형평성 문제가 불거질 것은 뻔한데 그건 아니지 않나요? 실장님.”
“네, 저도 이해하지만, 제가 얼굴만 비추기 위해서 스타플레이어에 출연하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허,”
박창성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것은 명백한 거절이었다.
그의 예상에서 이런 명백한 거절은 아예 없었다.
당연히 대비책도 없었다.
하지만 시청률을 1%라도 올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훈을 잡아야 했다.
박창성이 당황한 표정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도훈이 말을 이었다.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도훈은 양손을 깍지 낀 뒤 상체를 내밀었다.
그 모습에 박창성도 살짝 도훈에게 다가갔다.
도훈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그곳에서 역할을 맡는다면 매니저가 좋을 것 같습니다.”
“매니저요?”
박창성이 눈을 크게 뜨자 도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말하자면 일일 매니저 같은 개념이죠. 소속사는 다 달라도 제 연습생이라는 생각으로 돌보겠습니다.”
“헉.”
“싫습니까?”
“잠시만요, 그런 역할은 대본에 없어서 작가진들과 상의를…….”
“그리고 단발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제 역할이 인기가 있다면 계속 출연하는 거죠.”
“음.”
박창성은 침음을 흘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훈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합숙 훈련은 제작진들이 관리한다.
한두 명도 아니고 연습생들을 관리하는 제작진만 무려 50명이었다.
그런데 그 역할을 도훈이 나눠 가진다.
문제는 그럴 경우 도훈의 역할이 희미해진다는 점이었다.
도훈이 원하는 건 딱 한 가지였다.
탈락자 중 도훈이 원하는 친구를 뽑는 것이었다.
어차피 두 명 가지고는 신생 그룹을 데뷔시킬 수는 없었다.
스타플레이어의 포맷을 준 이유가 떨어지는 연습생을 줍는다는 의미가 강했다.
박창성은 당황한 표정으로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딱 일 분 만에 제자리로 돌아왔다.
“실장님, 가능하답니다. 대신에 시간이 없으니 작가진들하고 상의해 보죠.”
“지금요? 피디님?”
“네, 실장님.”
“지금은 면회 이벤트를 진행해야 하지 않나요?”
“아, 면회 이벤트…….”
말끝을 흐리던 박창성은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에 도훈이 놀라 물었다.
“왜 그러세요?”
“면회 시간을 좀 미루고 작가진들하고 상의를 한 다음 오늘부터 출연하시는 건 어떨까요?”
“오늘부터요?”
도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박창성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시청률이라면 집에 있는 가보도 팔아먹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대충 상황을 보니 면회 제도를 핑계로 자신을 불러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것은 도훈도 원하는 것이었다.
도훈이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도훈의 말에 박창성이 눈을 크게 떴다.
“진짜로요?”
“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또 있습니다.”
“앗.”
박창성이 낮게 신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모든 요구가 끝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치고 들어오자 박창성을 정신이 혼미해졌다.
당황한 그의 표정을 본 도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마지막이요?”
“너무 긴장하시는 건 아닌가요?”
“그게…….”
박창성이 말끝을 흐렸다, 긴장한 건 맞았다.
박창성은 지금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진 느낌이었다.
유레카의 이도훈 실장은 한마디로 총알이었다.
성능 좋은 총알로 초반 시청률이라는 과녁을 정조준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도훈이라는 총알을 쓰기 위해서는 총 자체를 바꿔야 했다.
거기에 더해 지금의 눈빛을 봐서는 총이 아닌 대포를 요구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긴장한 표정을 본 도훈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특별한 요구는 아닙니다. 대본에 나와 있는 내용 말고 조금 권한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애드리브의 자유를 달라는 거죠.”
“아…… 그야 당연히 출연자 마음이죠.”
“그럼 약속하시는 거죠.”
“네, 그 정도의 권한은 제게 있습니다. 걱정하시고…… 여기.”
박창성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스타플레이어의 출연 계약서와 비밀 유지 서약서였다.
“미리 준비하셨네요.”
“그럼, 준비성 하면 저 아닙니까?”
박창성이 가슴을 탁탁 쳤다.
그 모습에 도훈이 서류를 가지고 가서 읽어 봤다.
서류를 읽던 도훈은 모든 계약서의 조항에 단어를 추가했다.
서류를 수정하던 도훈이 힐끔 박창성을 바라봤다.
박창성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도훈은 서류를 정리한 뒤 다시 박창성에게 내밀었다.
“이것만 추가해 주시면 됩니다. 저는 이게 공평하다고 봅니다.”
“이건 MBS의 표준…….”
“부탁하러 오신 거잖아요. 제가 유레카의 표준 계약서를 내밀면 받아들이실 건가요?”
“…….”
박창성은 한숨을 삭이며 서류를 바라봤다.
모든 항목에 추가된 단어는 하나였다.
그것은 ‘쌍방’이란 단어였다.
과연 이렇게 넣어도 될까?
고민하던 박창성이 핸드폰으로 서류를 찍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어디론가 전화했다.
도훈은 그 모습에 피식 웃었다.
운이 좋게 칼자루를 쥐었으면 흔드는 시늉이라도 해 봐야 하는 것이 이치다.
칼자루를 쥐고도 가만히 있으면?
상대방이 내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줄도 모른다.
과연 어떤 쪽이 유리할까?
상대방을 찌르지 않을 거면 일단 칼자루가 자신에게 있음을 보여 주는 게 정답이었다.
거기에 회사 대 개인이 아니었다.
상대방은 모른다고 하지만 도훈은 유레카의 대표.
절대 손해 보는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모든 조항에 쌍방이란 단어를 넣은 것이다.
물론 이 단어는 다른 소속 연예인들과의 계약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단어였다.
이것은 공정한 거래로 넘어가기 위한 수단이었다.
잠시 뒤.
박창성은 땀을 뻘뻘 흘리고 달려왔다.
임제호와 통화하는 박창성은 새로 계약서와 서약서를 뽑아 왔다.
재미있는 것은 서약서도 두 장이라는 것이다.
도훈이 서약서의 모든 조항에도 쌍방이라 표시한 것이다.
그 뒤 출연에 관련된 계약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 * *
이제는 대망의 면회 시간.
면회 장소는 촬영 장소로 쓰이는 구석에 마련되어 있었다.
체육관의 구석에는 체육대회 때나 보던 대형 천막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여섯 대의 카메라가 그들이 만날 테이블을 중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잠시 후.
도훈과 강시혁 그리고 신서희는 테이블 한쪽에 있는 의자에 쪼르르 앉았다.
도훈은 슬쩍 강시혁을 바라봤다.
“어찌 훈련소 분위기인데.”
“그러게, 땀 냄새까지 완벽하게 똑같아. 이거 오디션 프로그램이 아니라 진짜 서바이벌 프로그램 아니야?”
강시혁이 농담을 던지자 도훈이 웃으며 답했다.
“뭐, 떨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은 똑같잖아. 그러니 진짜 전쟁터지.”
“그런데 진짜 괜찮겠어?”
“출연 계약 말이야?”
“그래. 지금 엄청 바쁘잖아.”
“내가 뭘 바빠?”
“신승섭 선생님하고 진행하는 일도 있잖아.”
“뭐, 그거야…….”
도훈이 말끝을 흐릴 때 신서희가 끼어들었다.
“마이클하고 약속도 잊지 않았죠? 이 실장님.”
“앗, 그러고 보니 바쁘긴 바쁘네요, 신 선생님.”
도훈이 미안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때였다.
천막 문이 열리고 우시원과 서찬휘가 들어왔다.
도훈은 그들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눈이 퀭한 데다가 살도 제법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신서희는 깜짝 놀라서 둘을 자리에 앉히고는 준비한 간식을 내밀었다.
“둘 다 이거 먹고 힘내. 그런데 얼마나 굴리기에 얼굴이 그 모양이야?”
“뭐, 그렇게 힘든 건 아닌데…….”
우시원이 우물거리자 옆에 있던 서찬휘가 나섰다.
“말은 똑바로 해야지, 우리 진짜 힘들어요.”
서찬휘의 말에 강시혁이 눈매를 좁혔다.
“자세하게 말해 봐.”
“이건 완전히 왕따 취급이에요.”
“왕따라니?”
“다른 곳은 적어도 넷은 들어왔잖아요.”
강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소 기획사라고 해도 적어도 셋.
보통은 넷 이상의 연습생이 뭉텅이로 들어와 있는 상태.
강시혁도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
낯선 사람끼리 모여도 시일이 지나면 파벌이라는 것이 생기기 마련.
원래 알고 지내던 연습생이 같이 들어왔으니 같은 소속사끼리 뭉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아무래도 파벌이…….”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이건 조직적으로 우리를 방해하는 느낌이라니까요.”
“그래도 잘 참았지.”
“네, 얘 덕분에요.”
서찬휘는 우시원을 가리켰다.
안경을 낀 우시원은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웃는다.
하지만 그것도 우시원마저도 인상을 찌푸렸다.
“실력으로 꺾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런데?”
“뭔가 밀리는 느낌도 들어요.”
“뭐가 밀리는데?”
“보컬도 그렇고 안무는 더 그렇고요.”
우시원은 침울한 듯 강시혁을 바라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