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97)
이제는 자신이 데려온 연습생들을 단속할 차례였다.
거래를 마친 홍준수가 먼저 안쪽으로 들어가자 안소신은 안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냈다.
그러고는 몇 번 딸깍딸깍 소리를 낸 뒤 다시 넣었다.
안소신은 이래도 될까 하면서도 홍준수의 유혹이 꽤 달콤하게 느껴졌다.
안소신은 오늘 SW의 연습생들이 춘 군무의 배경음악을 만든 작곡가였다.
그 때문에 그는 스타플레이어의 예선에 참석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이런 기회를 잡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렇게 귀에 쏙쏙 박히는 멜로디를 발견할 줄은 몰랐다.
홍준수의 계획대로라면 이건 자신의 노래가 될 수도 있었다.
원래 곡이라는 것이 백 퍼센트 창의적인 게 어디 있겠는가?
모든 클래식은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벗어날 수 없고 모든 대중음악은 비틀스를 벗어날 수 없다는 이 바닥 격언이 있다.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기본을 바탕으로 한 변주라는 말이었다.
대충 유레카의 상황을 보니 그 곡을 저작권 등록도 안 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로 유레카의 시스템은 허술해 보였다.
사실 그 곡이 강시혁의 곡이라면 탐내지 않았을 것이다.
강시혁이라면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친구니 말이다.
그런데 머니 윌이라고?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이었다.
이름만 본다면 아마추어 작곡가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시간 싸움이었다.
오늘 편곡을 끝내고 내일 저작권 등록을 신청하면?
이 곡은 자신의 것이 될 것이었다.
안소신은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이어폰에서는 유레카의 군무에 사용되었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안소신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였다.
진짜 중독성이 강한 곡이었다.
그는 머릿속에 편집 계획을 세웠다.
음악을 듣고 있자니 저절로 머릿속에 악보가 그려졌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인사를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안 선생님 맞으시죠?”
“누구…….”
고개를 갸웃하던 안소신은 눈을 크게 떴다.
앞에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무대 위에서 군무를 추던 바로 그 매니저였다.
도훈이라고 했던가?
안소신은 재빨리 귀에 있는 이어폰을 뺐다.
그는 이어폰을 핸드폰에 둘둘 말아 가방에 넣으려 했다.
그러다가 핸드폰을 열더니 아예 전원을 껐다.
그 모습에 도훈이 물었다.
“뭐, 좋은 거 듣고 계셨나 봐요.”
“아, 뭐 그렇죠.”
“저는 유레카의 이도훈이라고 합니다. 홍 팀장님하고 같이 계시는 것 보면 안소신 선생님 맞죠.”
“제 이름을 어떻게?”
“아까 이승찬 심사위원의 질문에 연습생들이 말했잖아요. 작곡가가 안소신 님이라고요.”
도훈은 안소신을 보며 씩 웃었다.
그 모습에 안소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상황이었다.
도둑질해서 주머니에 넣었는데 그 물건을 빤히 보고 있는데 찔리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안소신은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저는 화장실이 급해서 이만…….”
“아, 그러시구나. 저도 화장실 가는 중인데요. 같이 가시죠.”
“저는 혼자…….”
“업계 사람들끼리 얘기 나누면서 가면 좋잖아요.”
말을 마친 도훈은 씩 웃으며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고는 뒤를 힐끔 보고 말했다.
“안 오세요?”
“저는 연습생들 봐주러 가야 해서, 화장실은 나중에 가야겠네요.”
“SW에서 나온 두 팀은 다 끝났잖아요.”
“아, 그래도…….”
그는 손을 내저으며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는 육상선수라도 된 듯 전력 질주를 하며 사라졌다.
그 모습에 도훈이 씩 웃었다.
도훈은 천천히 화장실로 향하며 어딘가로 문자를 보냈다.
톡톡.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나서 몇 걸음 안 됐는데 바로 답장이 날아왔다.
디링.
도훈은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몰라 보험을 들어 놨었다.
그런데 지금 복도에서 안소신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미리 손을 써 두길 잘한 것 같았다.
도훈은 슬쩍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매니저의 비밀 수첩을 보기 위함이었다.
도훈이 떠올리는 것만으로 적으로 간주한 사람들의 명단이 주르륵 뜬다.
그중에 안소신이란 이름도 있었다.
안소신은 도훈이 미리 이름을 적어 놨을 정도로 전생에 뒤통수를 거하게 쳤던 친구였다.
도훈이 주먹을 꽉 쥐자 매니저의 비밀 수첩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 * *
이틀 후 저녁.
MBS의 예능국.
예능국은 그 어느 때보다 열띤 토론이 오가고 있었다.
주제는 당연히 유레카였다.
모두가 눈을 반짝이며 토론을 이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예능국장 한재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재수는 대화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명함에 적힌 직책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슬쩍 관자놀이를 눌렀다.
오늘따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기 때문이었다.
예능국장이란 직책은 과연 어떤 자리일까?
시청률 하나만을 보고 간다면 그도 편했을 것이다.
그런데 국장급 이상부터는 정치판과 똑같다고 보면 되었다.
광고주와의 관계도 관계지만, 권력 기관의 눈치도 봐야 하고 여러 심의위원회와의 관계까지 잘 유지해야 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광고주와의 관계였다.
그는 미라클 그룹의 대대적인 후원을 받는 대신 유레카의 연습생들을 처음부터 삭제하기로 약속했었다.
유레카라면 미라클의 계열사였다.
왜 계열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같은 의문은 애초에 떠올리지 않았다.
정치판에서 마주 볼 때는 실실 웃으며 아군인 척하지만 돌아서면 칼을 꽂아 넣는 모습이 흔하니 말이다.
그룹 내부의 전쟁까지 자신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문제는 들어온 오더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였다.
처음에는 누워서 떡 먹기로 착각을 했었다.
하지만 유레카의 연습생 둘과 매니저가 보여 준 퍼포먼스는 예능국의 기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때였다.
예능국장 한재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디리링.
제법 큰 소리로 울렸는데도 누구 하나 돌아보지 않았다.
모두가 회의에 완전히 몰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핸드폰 번호를 확인한 한재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소리 없이 회의실을 나갔다.
그가 다시 회의실로 들어온 것은 오 분이 지나서였다.
그의 표정은 나갈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나갈 때는 냉탕에서 달달 떨고 있었다면 지금은 파프리카를 씹은 듯한 멋쩍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아 피디들의 회의를 지켜봤다.
스크린에서는 사 등분 된 화면이 재생되고 있다.
예선이니만큼 그리 많은 카메라가 동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크린에 네 개의 화면을 동시에 띄워 놓은 후 피디들이 편집 방향에 대한 아이디어를 교환 중이었다.
지금 영상에는 유레카의 무대가 재생되고 있었다.
그때 박창성이 외쳤다.
“잠시만요, 저 부분이요.”
“저 부분이 왜?”
임제호가 고개를 갸웃하자, 박창성이 도훈이 나오는 장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살려야 해요.”
“아씨, 어떻게 저걸 살려? 매니저가 활약하는 건 좋은데, 프로그램에 계속 갈 수는 없잖아.”
“저거 빼면 오늘 촬영분은 단팥 없는 찐빵이에요. 이승찬하고 한리나 대화 장면은 쳐 내고 이 실장 대화 장면 살리는 게 좋아요.”
“음.”
임제호는 뒤를 힐끔 돌아봤다.
임제호는 이미 한재수 국장에게 언질을 받은 지 오래였다.
그 때문에 유레카의 분량을 최대한 줄이고자 노력을 한 것.
여차하면 통편집으로 모조리 들어내고 탈락으로 처리할 수도 있었다.
유레카의 이도훈 실장에게 진 빚은 별도로 갚으면 되니 말이다.
일단 문제는 한재수 국장이었다.
한재수 국장이 오케이만 해 준다면 임제호는 피디들에게 자율적으로 편집해도 좋다는 오케이 사인을 내려 줄 것이었다.
한재수를 바라보던 임제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묘하리만치 한재수의 표정이 밝아져 있었다.
누가 본다면 해탈한 고승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드디어 시선이 마주쳤다.
임제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한재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천천히 스크린 앞으로 다가갔다.
어둠 속에 스크린 쪽만 환한 상태.
그가 스크린 앞에 서자 한재수의 몸에 영상이 비쳤다.
한재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피디들에게 말했다.
“오늘 편집 회의는 빠질 테니 알아서들 해. 아까 박 피디였지?”
“네, 박창성입니다.”
“그래, 박 피디 아이디어 좋아. 매니저가 저렇게 안달이 나서 날뛰는 장면 중심으로 분량 할애해도 좋을 것 같아.”
“네?”
박창성이 눈을 크게 떴다.
옆에 있던 임제호도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한재수가 말한 것이 모두 반어법이라 생각했다.
임제호는 총괄의 관점에서 국장의 속뜻을 다시 확인해야 했다.
“국장님, 지금 하신 말씀…….”
“진심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네들끼리 알아서 해. 그리고 임 총괄은 내 방으로 좀 와.”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나는 그만 가 볼 테니 잘 마무리 짓고.”
한재수 국장은 손을 한번 흔들더니 아무렇지 않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에 피디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것도 잠시 박창성이 일어나서 화면을 하나하나 짚으며 아이디어를 밝히자 다른 피디들도 목소리를 높였다.
목소리의 방향은 모두가 비슷했다.
특이한 매니저인 도훈을 부각하자는 것이었다.
‘문제는 어떻게?’라는 것이 토론의 핵심이었다.
그들은 방법을 놓고 쉬지 않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시청자들에게 따뜻함이 먹힐까요? 조금은 야망 있는 매니저로 캐릭터를 잡아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뒤에 무대를 보면 넘어지려는 연습생을 잡아 주잖아요. 그 모습이 어떻게 자기의 야망 때문에 물불 안 가리는 캐릭터로 보여요? 그냥 연습생이라면 죽고 못 사는 매니저 캐릭터로 가 보죠.”
지금 말한 이는 박창성이였다.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가 보기에 도훈은 마음이 따뜻한 이였다.
흔히 방송에서의 캐릭터는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도훈의 출연은 단발성.
그냥 원래 보이는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정석이라 생각했다.
박창성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찬성합니다, 눈이 애틋하잖아요.”
“오케이, 그러고 보니 박창성 피디 보는 눈이 많이 늘었네.”
여기저기서 박창성을 칭찬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들의 표정에 박창성의 눈이 빛났다.
그것도 잠시 박창성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다들 왜 그러십니까?”
박창성은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고 있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조금은 부족하게 보이는 것이 차라리 자신의 캐릭터에 어울린다 생각했다.
캐릭터가 방송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캐릭터를 어떻게 잡는가는 중요했다.
이제까지보다는 조금 더 업.
하지만 딱 거기서 멈춰야 했다.
그것이 회사에서 장수하는 지름길이라 생각했다.
* * *
잠시 후 박창성은 국장실 앞을 서성였다.
임제호에게 국장이 뭐라 하는지가 궁금해서였다.
박창성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국장실 앞을 왔다 갔다 했다.
박창성이 이러는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