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89)
진지한 박창성의 표정에 한지혜가 되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아, 뭐라고 할까. 누가 내 뇌 속으로 들어와서 싹 정리해 주고 간 것 같은 느낌이야, 하하.”
“…….”
한지혜는 말없이 박창성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오늘따라 박창성이 많이 이상해 보였기 때문이다.
* * *
일주일 후.
예능국 대회의실의 출입문.
오늘은 회의 중이라는 푯말 대신 다른 문구가 쓰여 있었다.
[스타플레이어 관계자 외 출입 금지.]
회의실의 안쪽은 어두컴컴했다.
앞쪽의 스크린에서는 예비 후보들에 대한 영상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임제호는 팔짱을 끼고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예비 후보 중 뽑아야 할 팀은 딱 세 팀이었다.
그들이 촬영해 온 영상에 등장하는 연습생은 무려 오십 명이었다.
상위 소속사에서 추천한 여든 명의 출연자는 국장급까지 보고가 된 상태.
지금은 예비 후보군에서 스무 명의 후보를 추리면 되었다.
그중 두 명은 이미 정해진 상태.
그 두 명이 바로 유레카의 연습생이었다.
영상이 멈추자 누군가가 회의실의 불을 켰다.
탁.
버튼 소리와 함께 불빛이 환하게 회의실을 비추자 마치 세계가 달라진 느낌마저 들었다.
방금까지 땀을 흘리는 연습생의 모습을 봤다면 지금부터는 그들끼리 피 튀기는 설전을 벌여야 했다.
치열한 전쟁터인 것은 똑같지만,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이 회의는 저들을 어떻게 요리하느냐가 논점이니 말이다.
임제호가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렸다.
덜컹.
모두는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
그것도 잠시 모두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옆에 있던 임제호도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국장님 오셨습니까?”
“그래, 수고 많아.”
지금 말한 이의 이름은 한재수.
MBS 예능국의 국장이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얼굴에 살짝 비치는 주름은 그의 연륜을 말해 줬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가 겪은 세월의 풍파에 비해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목소리뿐만 아니라 직원들에게 인성적인 측면에서도 인정받는 상관이었다.
임제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국장님.”
“그래, 이야기는 잘돼 가는 거지?”
한재수는 임제호가 뺀 의자에 앉았다.
임제호도 자리에 앉으며 답했다.
“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상위 소속사에서 추천받은 연습생 여든 명, 그리고 예비 후보군에서 스무 명을 뽑기로 했습니다. 총 백 명으로 예선을 시작해서 스무 명이 남는 순간부터 생방송으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임제호는 입에 모터를 단 것처럼 쉬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그의 설명이 끝나자 국장 한재수는 턱을 매만졌다.
그 모습에 임제호는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한재수의 지금과 같은 모습은 딴지를 걸 거라는 예고편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재수가 진지한 눈빛으로 임제호를 바라봤다.
“음, 조금 걸리는 게 있어.”
“걸리는 거라니요?”
“상위 소속사들이야 인재 풀이 워낙 탄탄하잖아.”
“네, 그렇죠.”
“뭐, 주간 평가에서부터 월말 평가까지…… 그리고 연습생에 대한 통제도 잘되는 편이고 말이야.”
“네, 맞습니다.”
“임 부장도 그렇게 생각하니 말하기가 편하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예 스무 명도 그냥 상위 기획사에서 추천받는 게 어떤가 해서.”
“아, 그건 조금…….”
“생각해 봐, 이런 대규모 오디션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항상 우리 예측에서 벗어나는 친구들이 있잖아.”
“…….”
“그럴 경우, 상위 기획사들이야, 백업 멤버라도 내놓겠지만, 중소 기획사는 대응이 힘들지 않겠어? 차라리 SW 같은 대형 기획사에서 인원을 조금 더 받는 게 좋은 생각 같은데, 임 부장 생각은 어때?”
말을 마친 국장은 쓱 주변을 살폈다.
다른 피디들에게 의향을 묻듯이 말이다.
임제호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봤다.
백 명이란 인원이 많다면 많겠지만, 오디션 프로그램치고는 소규모다.
이제까지 이루어진 오디션의 규모를 보면 예선만 해도 오만 명은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그런 이유로 다양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지금 이 오디션은 조금 방향이 달랐다.
연습생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이미 다듬어진 기성품과도 같았다.
게다가 기획사마다 색도 명확하고 말이다.
그런 이유로 최대한 기획사를 늘리고 예비 후보 중 스무 명을 추려서 다양성을 높이자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었다.
그런데 한재수 국장은 상위 기획사의 연습생을 더 받으라 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임제호가 낸 결론은 불가였다.
하지만 한재수의 눈치를 보니 SW나 스타플레인 등 상위 기획사의 부탁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고개를 내저었다가는 앞으로 한재수 국장이 계속 딴지를 걸 수도 있기에 조심스러웠다.
임제호는 다시 한재수를 바라봤다.
임제호가 평가하는 한재수는 다른 직원들이 보는 것과는 달랐다.
임제호도 한재수가 직원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후배들에게 유하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임제호는 다른 이들처럼 한재수를 바라봤다.
하지만 유레카의 실장인 도훈과 이야기를 나눈 뒤부터 상황은 달라졌다.
도훈과 얘기를 나눈 후 그간 상황을 하나하나 따져 보니 다른 방송국에 프로그램을 빼앗긴 것이 맞았다.
SW의 홍준수만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직속 상사인 한재수 국장도 분명히 관련되어 있었다.
다른 방송국에서 먼저 방영되어서 아쉽게 생각한 작품 중에는 조용히 한재수 국장에게 올린 기획안도 있으니 말이다.
임제호는 한재수를 바라봤다.
그는 임제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임제호의 판단에 맡긴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재수의 부드러움은 마치 뱀의 껍질과도 같았다.
부드러우면서도 미끌미끌해서 어디서든 잘 빠져나가는 뱀.
하지만 속에 독을 품고 있다는 뱀의 특징과 한재수는 많이 닮아 있었다.
임제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국장님의 혜안은 확실히 대단합니다.”
“흠, 그렇게 말해 주니 내 얼굴이 뜨거워지는군.”
“그런데 살짝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인가?”
“시청자들 측면에서 보는 신선함입니다. 조금 부족한 쪽에서 실수도 좀 하고 못난 면도 좀 보여 줘야 상위 캐릭터가 살아나지 않을까요?”
“음…….”
“뭐, 중요한 건 생방송에서 살아남은 스무 명을 얼마나 부각할 것이냐 하는 것이 포인트 아닐까 합니다.”
“그럼, 초반은 그대로 가자는 건가?”
“그게 저도 감이 안 잡힙니다.”
임제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슬쩍 어딘가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박창성과 한지혜가 있었다.
시선을 받은 박창성과 한지혜는 조용히 귓속말을 주고받는다.
그 모습에 한재수가 말했다.
“무슨 좋은 의견이라도 있나?”
“아까 한 피디와 박 피디가 말한 게 생각나서요.”
임제호는 슬쩍 운을 뗐다.
그 모습에 한재수가 말했다.
“나는 없다고 생각하고 편안히 말해 보라고.”
그 말에 임제호가 손짓했다.
신호를 받은 박창성은 재빨리 스크린 앞으로 튀어나왔다.
박창성이 눈짓하자 한지혜가 화면을 띄웠다.
그 화면에는 앞부분의 큐시트가 나와 있었다.
박창성은 큐시트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한 곳을 가리켰다.
“그러지 않아도 저는 국장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흠, 동의한다고? 그건 뜻밖이군.”
한재수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박창성이 말을 이었다.
“사실, 도입 부분이 너무 밋밋합니다. 케이블에서 인기를 끌었던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초반에 강조하는 점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
“바로 치열함입니다.”
“치열함이라…….”
“소속사의 추천을 받아서 출연하는 오디션이 아닙니까? 연습생으로 소속사에 발탁된 것부터 벌써 선택받은 게 아닌가요? 대형 소속사들 연습생의 경우 경쟁이 치열하다지만, 데뷔는 시간이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그럼, 자네 말은 대형 기획사의 연습생은 시간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데뷔한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그게 무슨 말인가?”
“이 프로그램에 추천할 정도면 데뷔는 확정된 아이들이라는 거죠.”
“흠.”
“그래서 그 치열함을 어떻게 넣을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계속해 보게.”
“80 대 20이 아니라 초반부터 경쟁 구도를 만드는 겁니다.”
“초반부터라고?”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연습생의 숫자를 늘리자는 겁니다.”
“흠.”
“대형 기획사든 중소 기획사든 관계없이 초반부터 경쟁해서 백 명을 뽑는 걸 화면에 담으면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그럼, 우리가 대형 기획사에서 약속한 어드벤티지는?”
“그건 설득해야죠.”
“어떤 식으로 설득할 텐가?”
“저는 말입니다…….”
박창성은 힐끔 한지혜의 눈치를 봤다.
시선을 받은 한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박창성은 용기를 얻은 듯 말을 이었다.
“자신 없으면 물러나는 게 맞죠. 솔직히 이 프로그램 자체가 데뷔에서 밀린 연습생을 모아서 기회를 준다는 콘셉트 아닌가요?”
“…….”
“그런데 초반부터 편하게 올라오면 어떤 시청자가 공감할까요? 그래서 저는 미리 정해 놓은 인원 없이 무한 경쟁을 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거기에 더해…….”
박창성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정리해서 쭉 늘어놨다.
한재수의 의견에 반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의하는 것도 아니었다.
어찌 보면 판을 뒤집자는 것이었다.
한재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기획사들이 그렇게 윽박지른다고 응할까?”
“물론 보상도 있어야겠죠, 보상은 다음 페이지에 있습니다.”
말을 마친 박창성은 한지혜에게 눈짓했다.
시선을 받은 한지혜가 재빨리 화면을 바꾼다.
화면을 보던 한재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화면에 떠 있는 내용은 아이돌 오디션과는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나와 있는 내용은 전혀 관계없는 거 같은데…… 안 그런가?”
“네, 맞습니다. 마지막에 데뷔할 인원이 정해지면 그건 누가 맡죠?”
“…….”
한재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네, 지금 논의 중이니 조만간 결정이 날 거야.”
“그러니까…….”
박창성은 다시 말을 이었다.
순간 다른 피디들도 웅성대기 시작했다.
박창성의 말은 간단했다.
데뷔할 보이 그룹을 맡을 기획사까지 시청자가 정하자는 이야기였다.
어찌 보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때 한재수가 눈을 번뜩였다.
그러고는 진득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제안 하나 하지, 제안이 아니라도 이건 지시라고 해야지 정확하겠지…….”
한재수의 말에 피디들의 눈이 다시 커졌다.
* * *
일주일 후.
잠실 학생 체육관.
중앙에는 무대가 있고 그 아래를 중심으로 철제 의자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그 의자에는 기획사의 이름들이 정갈하게 붙어 있었다.
피디를 비롯한 촬영 스태프들은 마지막 점검에 여념이 없었다.
큐시트를 매의 눈으로 살피던 박창성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툭 쳤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