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87)
모든 피디가 고개를 끄덕인다.
박창선은 오랜만에 목에 힘이 들어갔다.
모두가 이렇게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 얼마 만인가.
그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임제호 피디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임제호 피디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에 박창성은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니, 그게…….”
그가 변명을 늘어놓으려 할 때 임제호가 손바닥을 보이며 그의 말을 막았다.
“박 피디가 맡아.”
“네?”
“유레카는 박 피디가 맡아, 한지혜 피디가 도와줄 거니까. 박 피디가 맡아.”
“헉.”
“왜 그래? 일하기 싫어?”
“아니, 왜 거기를 제가 맡습니까? 다른 사람도 많은데요.”
박창성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머지 피디들은 박창성의 시선을 피하기에 바쁘다.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임제호는 입맛을 다셨다.
“쩝, 다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이 왜 이러는지는 알고 있었다.
피디들은 보이 그룹이나 걸 그룹을 데뷔시킨다는 걸 마치 공장에서 공산품을 찍어 내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전문적으로 배출해 내는 시스템은 공장에서의 틀과 같다.
문제는 유레카가 그 틀이 없다는 것이다.
피디들은 유레카에서 연습생이 올라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스템이 없는 회사에 속한 연습생의 수준이 과연 어떨까?
안 봐도 그 수준은 뻔했다.
유레카에서 스타플레이어에 출연할 연습생을 뽑는다면 오로지 도훈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이 기획의 반은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스타플레이어의 총괄인 임제호도 사실 유레카에서 올 연습생에 대해서는 조금도 기대하고 있지 않았다.
예의상 예선 2차 라운드까지는 어떻게든 올려 줄 것이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것이 임제호가 도훈에게 보여 줄 성의였다.
* * *
삼 일 뒤.
강시혁이 자리 잡은 유레카의 별관.
연습실에서는 오늘따라 신서희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찬휘, 거기에서 왜 힘을 줘? 조금 더 부드럽게, 소프트 몰라?”
“네, 선생님.”
춤이라면 서울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힌다고 자부하는 서찬휘는 요즘 들어 죽을 맛이었다.
처음에는 우시원의 보조를 맞추면서 대충 시간을 보내려 했다.
서찬휘는 자신이 배울 것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높아지는 강도에 서찬휘는 넋이 나가 있었다.
문제는 신서희가 가르쳐 주는 동작에 흥미가 당긴다는 것이었다.
서찬휘가 이제까지 몸에 익혔던 춤이 스트리트 스타일이었다고 한다면 신서희가 중점적으로 주입하고 있는 춤은 대부분이 클래식한 분위기의 동작이었다.
서찬휘는 슬쩍 옆을 바라봤다.
우시원의 안경에는 온통 땀방울이 묻어 있었다.
에어컨을 틀었지만, 땀을 막을 수는 없는 법.
비 오듯 흘리는 땀방울 덕분에 우시원은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우시원은 멈추지 않았다.
서찬휘는 우시원에게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경쟁심이었다.
서찬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우시원에게 춤에서 경쟁심을 느낀다는 것이 신기했다.
서찬휘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뱉었다.
“아자!”
그 소리에 신서희가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와 동시에 음악이 멈췄다.
갑자기 고요해진 연습실.
서찬휘는 주변을 돌아봤다.
구석구석에 설치된 카메라가 모두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연습실의 가장자리에는 적당한 조명들이 중앙을 비추고 있었다.
서찬휘는 그제야 생각이 났다.
지금은 그냥 연습이 아니라 촬영 중이라는 것을 말이다.
멍하니 있는 서찬휘에게 신서희가 다가왔다.
“찬휘, 오늘 아주 파이팅이 넘치는데.”
“아, 선생님, 저도 모르게 그만…….”
“아니야, 지금처럼 아무것도 의식하지 말고 열심히 해 봐.”
신서희가 서찬휘를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카메라를 향한 접대용 미소가 아니었다.
이 미소에는 그녀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신서희는 서찬휘가 자신의 재능만 믿고 뺀질대는 스타일의 친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천재성의 기본에는 그의 무단한 노력이 깔려 있음을 알았다.
그만큼 서찬휘는 열심이었다.
신서희는 고개를 돌려 우시원을 바라봤다.
그를 바라보는 신서희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피어났다.
온통 땀에 젖어 외모가 가려져 있었지만, 우시원은 지금이 더 매력적이라 생각했다.
신서희가 우시원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십 분 쉬었다가 시작할 테니 일단 땀 좀 닦아.”
“네, 선생님.”
우시원은 안경을 벗었다.
그때 큐시트를 말아 쥐고 있던 박창성의 눈이 커졌다.
그것도 잠시, 그는 우시원을 잡은 VJ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저 친구 좀 클로즈업해 봐요.”
“…….”
VJ는 어깨에 카메라를 메고 우시원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순간 VJ의 눈이 커졌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비친 우시원의 모습은 광고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눈이 부셨다.
안경을 썼을 때는 몰랐던 매력 포인트가, 고래가 물을 뿜듯 터져 나왔다.
고개를 흔들며 땀방울을 털어 내는 장면은 마치 연출된 것만 같았다.
VJ만이 느낀 것은 아니었다.
서찬휘를 잡고 있던 카메라맨도 힐끔 우시원을 바라봤다.
이것은 본능이었다.
그들은 초보가 아니었다.
적어도 이 바닥에서 몇 년을 구른 전문가들이었다.
당연히 박창성도 그 분위기를 읽었다.
아니, 그냥 읽은 것이 아니라 100% 공감하고 있었다.
박창성은 황급히 볼펜을 들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큐시트에 메모를 시작했다.
쓰슥. 쓰슥.
볼펜이 종이 위를 누볐다.
일필휘지로 내용을 적어 나가던 그의 손끝이 멈췄다.
가장 마지막 줄에 나와 있는 단어는 간단했다.
반전 매력.
이 단어는 그가 이제까지 적은 내용을 요약한 것이었다.
반전 매력은 박창성이 평가한 우시원의 무기였다.
박창성은 왜 저런 친구가 아직도 연습생으로 남아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박창성은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르고 있는 우시원을 향해 걸어갔다.
사사삭.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는 다르게 그의 심장은 묵직하게 뛰고 있었다.
박창성의 가슴이 뛰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것은 이것이 기회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MBS에 입사하고 나서 처음에는 싹수가 보인다는 주변의 소리를 들었지만, 묘하게 입사 다음 해부터는 일이 꼬였다.
자신이 제안해서 임제호가 오케이 한 기획안이 뜬금없이 다른 방송국에서 비슷한 콘셉트로 먼저 방영된 적도 있었다.
거기에 10회차 이내에 조기 종영한 프로그램만 세 번을 맡았다.
박창성은 자신이 잘못한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점은 임제호도 인정하고 있었다.
메인 출연진 중 하나가 음주 운전을 해서 프로그램이 뒤집힌다든지.
촬영 도중 잠적한 출연진이 있다든지.
피디의 관리 소홀이라 한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이건 운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그렇게 진급에서 탈락하고 예능국의 지박령이 된 것이 벌써 삼 년째.
총괄을 맡은 부장급 CP들도 이제는 박창성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이번 스타플레이어도 많은 인원이 필요하기에 이렇게 끼어서 일할 수 있었다.
예능국의 피디들도 이번 프로그램의 리스크를 박창성이라고 말할 정도니, 방송국에서 그의 위상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 때문에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은 유레카를 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위기가 기회를 낳는 법.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유레카의 촬영에서 완벽한 아이돌 후보를 건진 것이다.
박창성은 유레카의 분량이 상당량 방송될 것으로 생각했다.
다른 피디들이 촬영한 분량을 제치고 말이다.
우시원에게 다가간 박창성은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아무렇지 않게 옆에 앉았다.
하지만 우시원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박창성은 우시원을 멍하니 바라봤다.
저 도도함은 연습생의 포스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는 법.
그는 입에 손을 대며 헛기침으로 시선을 끌었다.
“흠…….”
효과가 있었는지 우시원이 고개를 돌렸다.
박창성 피디를 본 우시원은 고개를 갸웃한다.
그 모습에 박창성이 재빨리 물었다.
“연습하는 거 힘들지 않아요?”
“힘들긴 한데…….”
말끝을 흐리며 우시원의 쭈뼛쭈뼛하는 모습에 박창성이 희미하게 웃었다.
말을 안 할 때는 도도해 보였는데 입을 열자 분위기가 확 달라진 것이다.
“잠깐 인터뷰 좀 해도 되죠?”
“네, 피디님. 그런데…….”
“말해 봐요.”
“피디님이 존댓말 쓰니 부담스러워서요.”
“하하, 카메라가 돌잖아요. 방송에 제가 반말하는 거 나가면, 팬들한테 돌 맞아요.”
“팬이요?”
“방송에 나가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죠, 그 규모가 문제지.”
“팬이라고 하시니까…… 실감이 안 나네요. 연습생 생활을 하도 오래해서요.”
“연습생 생활을 오래해요? 유레카에서 이쪽에 발 들여 놓은 지 얼마 안 됐잖아요.”
박창성은 연습실을 가리켰다.
“아, 저 다른 곳에 연습생으로 있었어요.”
“에? 뭔가 이상한데…….”
“왜 그러세요?”
“데뷔가 아니라 연습생이라니 조금 이해가 안 되는데요?”
“그게 그러니까…….”
우시원은 망설이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말문이 열린 우시원은 꽤 진지했다.
그는 SW에서 있었던 연습생 시절의 일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박창성은 핸드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요점만 적기에도 내용이 너무 방대했기 때문이었다.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기는 했지만, 박창성은 녹음 파일을 집에서 개인적으로 정리할 생각이었다.
그만큼 우시원에게 빠져든 것이다.
우시원의 얘기를 들으면서 박창성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잠시만요.”
“네, 피디님.”
“내가 아까부터 이해가 안 가는 게요. SW의 레벨이 좀 높은 건 알고 있는데, 시원 군이 데뷔를 못 했다는 건 좀 충격이라서요.”
그때였다.
휴게실에서 음료수를 뽑아서 온 서찬휘가 불쑥 끼어들었다.
서찬휘는 손을 들며 우시원과 박창성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가 말해도 될까요? 피디님.”
“앗, 깜짝이야.”
“시원이가 좀 느려서요. 제가 대신 얘기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제가 시원이 대변인이거든요.”
“아, 찬휘 군에 대한 인터뷰는 따로 딸 텐데.”
“그래서 제가 나서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시원이랑 얘기하다 보면 아마 끝이 안 날 거예요.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선생님이 연습하자고 할 거 아니에요?”
“그야 그렇지만…….”
“연습 끝나고 인터뷰를 해도 속도가 나지 않을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밤을 새울 수는 없으니까 일단 퇴근하시겠죠.”
“뭐, 그렇지요.”
“그럼 제 인터뷰는 언제 하나요?”
“푸웁.”
박창성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우시원이 인상을 찌푸리며 서찬휘를 밀었다.
“너는 끼어들지 좀 말고 차례를 지켜.”
“우시원, 그러니까 말 좀 빨리하라고. 네가 말하는 속도에 1.5배속 정도 하면 내 대사 속도가 되거든.”
“뭐, 이런 유언비어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하다니…….”
우시원과 서찬휘가 아옹다옹하자 박창성이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엄지와 검지로 손짓을 했다.
클로즈업을 하라는 신호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