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83)
그 속삭임에 다른 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그냥 가만히나 있으면 중간은 갈 것을…….”
“예능국이 놀고먹는 데인 줄 아나 봐.”
“쉿, 조용히 해, 이러다 우리까지 엮이겠어.”
그들이 이렇게 한지혜를 깔보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녀가 시사교양국에서 온 피디라는 점이었다.
그곳에서도 어찌 보면 막내.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에 그녀가 끼어들자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이곳에 합류한 것은 사실 사건 수첩 이지유 욕설 편의 시청률 때문이었다.
해당 편은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시청률을 기록했다.
연예인이 사건의 주인공이기에 관심을 받은 것도 있지만, 방송국의 임원들은 그 기획 자체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들의 웅성거림에도 임제호는 못 들은 척 한지혜를 바라봤다.
한참을 바라보던 임제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제호는 오른손을 위쪽으로 쳐들었다.
그 모습에 한지혜가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었다.
이게 맞을 짓인지가 이해가 안 되었다.
도훈이 준 자료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자신에게 설명할 기회를 준다면 이 기획안을 통과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분노하는 것을 보면 임제호와 이 기획안의 스타일이 맞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어깨에 가벼운 감촉이 느껴졌다.
툭, 툭.
한지혜가 눈을 떴다.
눈을 떠 보니 눈앞에 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녀의 앞에서 임제호는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는 한지혜의 어깨를 두드리며 흡족한 표정으로 입술을 씰룩이고 있었다.
분명히 화난 모습은 아니었다.
당황한 한지혜가 물었다.
“부장님, 왜 그러세요?”
“왜 이제야 나타났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아니,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냐고, 하하.”
“제가 숨어 있던 적이…….”
“한지혜 피디는 이제 내 자식이야, 예능국의 아들이라고 하하.”
“저는 딸…….”
“지금 성별이 문제야? 일단 창성이하고 자리부터 바꿔.”
임제호는 힐끔 박창성을 바라봤다.
박창성은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멍하니 임제호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허탈하게 웃었다.
“하하.”
그 웃음소리에 나머지 피디들도 정신을 차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지금 무슨 일이야, 아는 사람 있어?”
그들이 웅성거리자 임제호가 검지를 입술에 갖다 댔다.
“쉿!”
동시에 술렁임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임제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시 한지혜를 바라봤다.
“한지혜 피디, 이 기획안 지금 발표할 수 있겠어? 아니, 준비가 안 됐겠지, 내가 말한 게 어제니 자료 준비하는 데도 바빴을 거야. 내일이나 모레 어때?”
“발표라면 지금도 할 수 있어요.”
“그럼 모레 정도가…… 뭐, 지금 발표할 수 있다고?”
임제호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한지혜를 바라봤다.
하지만 한지혜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평소에 고민을 많이 한 주제거든요.”
“아, 그렇군. 시사교양국이 내가 생각한 곳이 아니었어.”
“네?”
“나는 시사교양국은 고리타분하고 무거운 얘기만 오갈 줄 알았어. 그런데 이렇게 빠르고 이렇게 탁 트인 시각으로 트렌드를 분석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이번 일이 끝나면 교양국장님 만나서 배울 건 배워야겠어, 하하.”
임제호의 웃음에 한지혜는 주변을 바라봤다.
모두가 임제호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선이 담고 있는 감정은 다양했다.
한지혜는 꼭 좋아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 * *
잠시 후.
회의실의 유리창을 암막이 덮고 있었다.
한지혜는 도훈에게 받은 자료가 담긴 USB를 노트북에 넣은 뒤 고개를 돌리며 심호흡했다.
지난번 사건 수첩에서 대박을 터뜨리긴 했지만, 아직은 초짜 피디의 딱지를 떼지 못한 그녀였다.
쟁쟁한 선배 피디를 모아 놓고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이 자리가 편할 수 없었다.
기획안의 발표가 끝나고 나면 수많은 질문이 쏟아질 것이었다.
그 질문의 대부분이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본다는 의도가 아닌 자신을 깎아내리기 위함일 것이었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의 눈빛이 그랬으니까.
한지혜는 헛기침하고 첫 번째 화면을 열었다.
이제 자신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도훈의 안목을 믿은 자신을 말이다.
한지혜가 입을 열었다.
“흠, 지금부터 제가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제가 생각한 차별화된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해…….”
한지혜의 설명에 임제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탄탄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기획서까지는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설명까지 저리 술술 이어 갈 줄은 몰랐다.
“……여기까지가 제 기획안에 대한 발표였습니다.”
한지혜의 설명이 끝나자 회의실은 정적에 쌓였다.
한지혜가 말한 것은 마지막까지 홀로 살아남는 오디션이 아니었다.
팀을 뽑는 오디션이었다.
시청자들의 입맛에 맞는 아이돌을 뽑기 위한 그런 오디션이었다.
한지혜는 이 오디션이 스포츠 경기의 올스타전과 같다고 설명했다.
아이돌도 팀이고 스포츠 경기도 팀이 중심이었다.
그중 스타플레이어가 있는 것은 당연한 것.
그 스타플레이어가 한 팀을 이룬다면?
그것이 바로 한지혜가 말하는 중심이었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은 많았지만, 이제까지 팀을 뽑은 오디션은 없었다.
한지혜가 초조한 눈빛으로 다른 피디들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질문 하나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지금 발표하신 기획의 의도에는 개개인의 능력이나 사연보다는 집단에 어울리는 비주얼을 어필하자는 것인데, 그게 지상파에서 가능할까요?”
“저는 지상파에 어울리는 콘셉트라고 봅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가장 객관적인 지표는 외모입니다.”
“외모라고요?”
“외모는 누구에게나 보이잖아요. 물론 노래 못하는 가수를 좋아할 시청자는 없겠지만요. 그래서 선택을 시청자에게 맡기자는 겁니다. 그리고 노래만 잘하는 가수를 뽑자면 그냥 라디오 방송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한지혜는 도리어 반문했다.
“흠.”
질문을 한 피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혜의 말이 맞았다.
외모보다 객관적인 지표가 어디 있겠는가?
오감 중에 시각이 으뜸 아니던가.
질문과 답변은 계속 이어졌다.
그 질문에 한지혜는 막힘 없이 답변을 이어 갔다.
임제호는 조용히 벽시계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짝짝.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목요일 이 시간에 보자고.”
임제호의 말에 피디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지혜가 막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임제호가 그녀를 불렀다.
“한 피디.”
“네, 부장님.”
“잠시만 자리에 앉아 봐.”
임제호는 자신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한지혜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로 봐서 자신을 질책하려는 건 아니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임제호의 말을 기다렸다.
임제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닐 파우치에 든 음료 하나를 가져왔다.
그러고는 모서리를 가위로 자른다.
싹뚝.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한지혜는 살짝 의자를 뒤로 뺐다.
그 모습에도 임제호는 아무렇지 않게 음료를 내밀었다.
“이거, 우리 어머니가 강릉에서 손수 짠 녹즙이야.”
“네? 이걸 왜 제게?”
“오늘 수고했다고 주는 거야. 나 이 녹즙 아무한테나 주는 사람 아니야. 내가 그만큼 한 피디한테 기대가 크다는 거지.”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내가 깜빡 잊고 못 한 질문이 있는데…… 지금 물어봐도 되지?”
임제호는 슬쩍 한지혜의 눈치를 봤다.
그 모습에 한지혜가 웃었다.
“말씀하세요.”
“그래, 일단 녹즙 먹으면서 들어.”
“네.”
“다름이 아니라 기획안을 보면 시청자 투표의 비율과 심사위원 평가의 비율 같은 것도 모두 채워 넣었던데, 그건 어떤 근거에서 나온 거야?”
“…….”
한지혜는 녹즙을 빨다가 멍하니 임제호를 바라봤다.
임제호는 자신이 잘못한 것이 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내가 실수라도 한 거야?”
“그런 건 아닌데요, 솔직히 그거 제가 혼자 작성한 건 아니라서요.”
“혼자 한 게 아니라고…… 그래, 기획안의 퀄리티를 보니 혼자서 한 건 아니더라고.”
“네, 업계 관계자가 도와줬어요.”
“업계 관계자라…….”
“시장조사를 하자면 어차피 도움이 필요하니까요.”
“사건 수첩에서 파고들던 기질이 여기서도 통하는군, 좋아.”
임제호는 기분 좋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혜가 녹즙을 다 마실 때쯤 임제호가 손뼉을 쳤다.
짝.
그 소리에 깜짝 놀란 한지혜는 재빨리 입을 막았다.
“앗.”
“왜 그렇게 놀라?”
“갑자기 손뼉을 치시니까 그렇죠. 무슨 일이에요? 부장님.”
한지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건 수첩에서 이슈를 파고들던 본능이 임제호의 분위기를 읽은 것이다.
임제호가 사람 좋은 얼굴로 말했다.
“그럼 그 친구 좀 볼 수 있을까? 그 친구의 자료 조사와 한 피디의 기획력이 합쳐지면 퍼펙트한 기획안이 나올 것 같은데…….”
임제호는 옆에서 녹즙 하나를 더 들었다.
그 모습에 한지혜가 손사래를 쳤다.
“인제 그만 먹겠습니다. 빈속이라서 속이 좀…….”
“그럼 밥 사 줄까?”
임제호가 씩 웃으며 창밖을 가리켰다.
구내식당이 아닌 밖에서 쏜다는 이야기였다.
필이 단단히 꽂힌 듯한 임제호의 모습에 한지혜가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아요.”
“생각해 보니 감자즙도 있는데 말이야.”
“아, 저는 그만 일어나 볼게요. 업계 관계자는 나가자마자 연락해 볼 거고요.”
“그래, 그 친구 데려와 봐, 내가 헛걸음 안 하게 할 테니…….”
임제호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한지혜의 태블릿을 가리켰다.
한지혜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이 기획안으로 결정하신 거예요?”
“난 결정했어.”
“헉.”
한지혜가 비명을 터뜨렸다.
이건 상상도 못 한 결과였다.
아이디어나 모아 보자고 진행한 회의였다.
“왜 그렇게 놀라?”
“아니, 벌써 결정하셨다기에…….”
“예능국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그야…… 혹시 감각이요?”
“뭐, 비슷하긴 하네, 딱 한 단어로 촉이야, 촉.”
“촉이요?”
“예능국 피디들은 대부분 더듬이 한 쌍은 달고 다니거든, 가끔 더듬이가 바싹 설 때가 있어. 그럼 찌릿한 전류가 흐르지. 그때가 딱 촉이 온 거야.”
임제호의 설명에 한지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올렸다.
마치 더듬이를 찾으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한지혜의 모습에 임제호가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봐. 진짜 더듬이가 있다는 얘기는 아니잖아. 내가 외계인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도 혹시나 하고 봤어요.”
“하하, 한지혜 피디는 개그감도 있네. 예능국에 왜 이제야 왔어?”
임제호는 한지혜를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에 한지혜가 시선을 피했다.
칭찬도 한두 번이지 너무 과하면 사람을 오글거리게 만드는 법이었다.
한지혜가 시선을 피하자 임제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책임지고 국장님을 설득해 볼 테니 여기에 붙일 거 있으면 미리 준비하고 그 친구도 준비시켜.”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