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81)
이도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종편에서 대박 쳤던 슈퍼k스타하고 비슷한 거 아닌가요?”
“음, 지상파가 하는데, 케이블하고는 규모가 다르지.”
“그것도 그렇겠네요.”
이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슈퍼k스타는 케이블에서 론칭했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방송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했을 정도로 대박을 친 프로그램.
올해 시즌2가 성황리에 끝난 상태였다.
그런데 지상파에서 비슷한 포맷으로 론칭한다는 것이다.
검증된 포맷을 지상파에 대입시킨다?
그것은 누가 봐도 땅 짚고 헤엄치기다.
그렇다면 스폰서로 들어갈 명분은 충분히 있다.
차명석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JK유통으로서는 광고를 예약할 충분한 명분이 있다.
이도준의 표정을 본 차명석이 서류 가방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탁.
그 소리에 이도준이 고개를 갸웃하자 차명석이 그곳에서 서류를 꺼냈다.
투명한 L자 파일에 SBC의 방송국 로고가 선명하다.
투명한 파일의 안쪽에는 협찬 계약서로 보이는 서류가 들어 있었다.
차명석은 씩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이왕이면 말 나온 김에 빨리 끝맺는 게 좋지.”
“이건 본부장 권한이 아닙니다, 선배.”
진도가 너무 빨리 나가자 이도준은 당황한 기척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본부장한테 이걸 내민 게 아니잖아.”
“네?”
“미라클의 후계자한테 도와 달라는 거지. 누가 JK유통이란 조그만 구멍가게의 본부장한테 부탁하는 건가?”
씩 웃는 차명석의 모습에 이도준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도준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제 서명은 효과가 없습니다. 오늘 안으로 허락 맡아서 팩스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기다릴게.”
“아.”
이도준은 입을 떡 벌렸다.
차명석이 끈질기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거머리라는 학창 시절 차명석의 별명대로 유레카를 쪽쪽 빨아먹기를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이도준이 모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거머리란 별명은 상대의 피를 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차명석은 같은 편의 피까지도 빠는 자였다.
* * *
일주일 후, 유레카의 대회의실.
김민석 부사장과 팀장급 인사가 모인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번 회의의 안건은 한 가지였다.
요즘 기획사 사이에서 도는 이상한 소문 때문이었다.
그것은 유레카가 지상파 방송국 하나에 찍혔다는 것이었다.
유레카에서는 모르는 일인데 이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비록 소문일지라도 그 소문의 영향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였다.
광고주들이 유레카의 연예인들을 색안경 끼고 바라보기 시작한 것.
지상파에서 저 정도로 나올 정도면 뭔가 있다는 것이 대부분 마케팅 담당자들의 생각이었다.
도훈도 팀장 대행의 역할이기에 이 회의에 참석했다.
7팀은 팀장이 없기에 도훈이 회의에 나온 것.
유레카의 가장 큰 매출을 일으키는 강영웅이 속한 팀이 7팀이기에 도훈이 빠지려야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모든 팀장이 모여 있는 자리.
원인도 모르는 소문과 싸우는 자리인 만큼 매니지팀뿐 아니라 경영지원팀의 팀장들도 회의에 참석했다.
어슬렁어슬렁 들어오던 인사팀의 최대한 과장이 도훈과 시선이 마주쳤다.
동시에 최대한의 고개가 기계처럼 돌아갔다.
한번 돌아간 시선은 다시 도훈 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최대한은 최선을 다해서 도훈의 눈길을 피하는 중이었다.
도훈의 눈길을 피하다 보면 그의 기억에서 잊힐 것이라는 희망 회로를 돌리는 중이었다.
물론 이도준 쪽에서 넘어오는 정보는 도훈에게 빠짐없이 보고하고 있었다.
최대한은 헛기침을 하며 도훈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의 모습에 홍보팀의 곽수정 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과장님 어디 불편하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곽 대리.”
“불편하시면 부사장님께 말씀드리고 병원이라도 가 보세요.”
“아, 아니래도.”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내젓는 최대한의 행동에 곽수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최대한이 너무 변했기 때문이었다.
김민석 부사장도 깔보던 그가 온순한 양으로 변한 것은 얼마 전부터였다.
갑자기 사람이 변하자 조금 안쓰럽게 보이기도 했다.
자신이 최대한에 대해 오해한 것은 아닐지, 하는 의심마저 드는 것이 이상하게 사람과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곽수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벽을 보며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던 최대한이 어딘가를 보고 입을 벌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최대한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매니지 3팀의 팀장이 누군가의 어깨를 톡톡 치고 있었다.
3팀의 팀장 황조한은 지금 도훈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어떻게 일은 할 만하고?”
“네, 팀장님.”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자 황조한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신입 때는 힘든 거야. 참, 내가 잊고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말씀하시지요, 팀장님.”
“이렇게 팀장급 이상 간부 회의가 있을 때는 미리 커피라도 내오는 게 좋아. 뭐, 커피 타기 싫으면 음료수라도 하나씩 올려놓으면 얼마나 보기 좋아?”
“음료수요?”
“그게 간부들 눈에 드는 비결이고…….”
황조한은 회의실의 거대한 테이블을 가리키며 웃었다.
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니지팀이 할 일은 아니었다.
업무 분담이라는 게 엄연히 있었다.
회의 준비는 총무팀에서 할 일이었다.
지금 황조한은 사람 좋은 척하며 신입인 도훈의 기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도훈은 일단 그의 장단에 맞춰 줄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황조한이 슬쩍 입꼬리를 올린다.
황조한은 사실 7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리 대표의 라인이라고는 하지만, 새로 계약한 건수를 모두 7팀에 몰아주는 것은 말도 안 되었다.
거기에 7팀을 맡은 애송이는 업계에서 본 적도 없는 뜨내기 같은 존재였다.
황조한이 미소를 짓고 있을 때였다.
그의 귓가에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타다닥.
황조한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이 콧김을 내뿜고 있었다.
“팀장님.”
“어, 최 과장,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
황조한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최대한을 바라봤다.
얼마 전부터 정신을 차린 것 같아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발작 버튼이 눌린 듯한 얼굴로 자신에게 뛰어오자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
“팀장님, 지금 신입 사원에게 커피 심부름시킨 겁니까?”
“심부름은 아니고…… 아무래도 이 실장이 여기 막내다 보니 음료수나 커피를 준비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을 말했어. 그런데 그게 문제라도 있어?”
황조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자신이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선을 넘지 않은 길들이기.
뭐, 누가 듣는다고 해도 그러려니 할 내용이었다.
“회사 내규에 매니저에게 음료수 심부름시켜도 된다고 어디 되어 있습니까. 그리고 생수는 전부 총무팀에서 미리 준비하지 않았습니까?”
최대한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그의 말대로 생수 한 병과 회의 자료가 놓여 있었다.
황조한은 눈을 크게 떴다.
“헉.”
맞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갑질이란 갑질은 다 하고 다니던 최대한이 할 말은 아니었다.
황조한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대한이 말을 이었다.
“적군이 우리 목을 베려고 노리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
황조한은 답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적의 칼날에 살아남기 위해 모인 것이었다.
황조한의 당황한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최대한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회의를 하는 거고요.”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뭔데?”
“그런데, 팀장님의 지금 행동은 우리 편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대체…….”
“그러니까, 사과하십시오.”
최대한이 눈을 부릅뜨자 황조한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단순히 노려보는 것이 아니었다.
눈을 희번덕거리며 죽일 듯 보고 있었다.
사실 이것은 최대한의 진심이 담긴 눈빛이었다.
최대한은 회사에서 시한부 인생이었다.
도훈의 말 한마디면 이도준에게도 버림받고 회사에서도 끝날 인생이었다.
최대한은 하루하루 생명을 연장한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유레카라는 빙판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황조한 팀장이 도훈의 성질을 긁자 자신도 모르게 달려온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도 유레카의 미친개라 불리던 최대한이 흥분하자 황조한이 마지못해 답했다.
“알았으니까, 그렇게 보지 말라고.”
“저한테 사과할 일이 아니죠.”
“그래, 알았다니까.”
황조한은 도훈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도훈이 손을 내저었다.
“저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팀장님.”
말을 마친 도훈은 힐끔 최대한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는 시키지도 않은 일을 왜 했냐는 책망의 뜻이 담겨 있었다.
최대한은 그 눈빛에 재빨리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회의실에 있던 팀장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지금 뭐야?”
“최 과장이 바뀐 게 맞네.”
“허허,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어.”
그때 김민석 부사장이 들어왔다.
김민석은 구석에 있는 도훈을 바라본 후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간단하네. 모두 알고 모였겠지만……. 설명해 줄 사람은 손을 들어 보도록.”
“…….”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먼저 입을 열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었다.
김민석 부사장은 슬쩍 시선을 돌려 한유라를 바라봤다.
“아마 소문에 가장 민감한 사람은 바로 현장에서 뛰는 매니저들이겠지. 2팀장이 한번 말해 보지.”
“네, 알겠습니다. 흠.”
한유라는 헛기침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한유라는 자신이 들었던 소문을 정리했다.
“제가 접촉한 사람들이 들었던 소문은 간단합니다. 지금, SBC 쪽에서 유레카의 연예인을 블랙리스트에 올려놨다고 합니다. 블랙리스트라는 게 실체는 없지만…….”
한유라는 입에 모터를 단 것처럼 쉬지 않고 설명을 이었다.
“……제 설명은 여기까지입니다.”
중간에 목이 말랐는지 물을 한 모금 들이켠 한유라는 설명을 끝내고 주위를 둘러봤다.
한유라를 시작으로 현장에서 뛰는 매니지 파트의 팀장들이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저도 들은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말은 모두 같았다.
SBC에서 유레카를 쳐 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토론의 주제는 이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중에는 없었다.
김민석 부사장이 만년필로 테이블을 톡톡 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시청률이 자신의 생명 줄과도 같은 방송국에서 기획사를 배척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지. 무조건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방송사가 묘한 행동을 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
이번에도 팀장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때 팀장은 아니지만, 경영지원팀 중 마케팅 부서의 책임자로 참석한 곽수정 대리가 손을 들었다.
“저, 말씀드려도 될까요?”
“말해 봐, 곽 대리.”
“이쪽 업계에서 방송국이 기획사에 척지는 이유는 하나죠.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거나 아니면 정치적인 이유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