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80)
지문의 내용은 약혼반지를 들고 방방 뛰는 모습이었다.
더운 날씨에 뛰다 보니 이지유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 모습에 조연출이 정재웅에게 속삭였다.
“감독님.”
그제야 정신을 차린 정재웅이 외쳤다.
“컷.”
그 소리에 돌아가던 카메라가 멈추고 붐 마이크를 든 막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 모두가 멈추었다.
방방 뛰며 연기에 몰입하던 이지유가 숨을 몰아쉬었다.
조연출이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스크립터에 적을 부분을 물어보는 것이다.
오케이냐, NG냐.
하지만 정재웅은 답하지 않았다.
고민에 빠진 듯 관자놀이를 눌렀다.
조연출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괜찮지 않았나요?”
“일단 킵하고 다시 한 번만 더 가 보자고.”
“네?”
“킵해 놔. 그리고 조금 오버해도 된다고 전해 줘.”
“네, 알겠습니다.”
조연출이 고개를 숙인 뒤 앵글 사이로 달려가며 고개를 갸웃했다.
정재웅이 이렇게 연기 스타일을 요청하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앞에 김현승 때도 그렇고 우시원과 서찬휘 모두 정확한 대사에만 중점을 두었다.
그에 비해 지금 한 말은 조금은 추상적인 요구였다.
일반인에게 추상적인 디렉팅으로 연기를 요구한다고?
도훈에게 달려간 조연출은 감독의 지시를 그대로 정했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처음이라서 제가 조금 미흡했나 보네요, 노력해 보죠.”
도훈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
그 모습에 조연출은 눈을 크게 떴다.
마치 정재웅이 요구하는 것이 뭔지 안다는 투가 아닌가?
거기에 조금 미흡했다는 저 말은 뭐란 말인가?
조연출이 보기에도 도훈은 앞서 연기를 펼쳤던 세 명과 비교하면 월등했다.
겸손인지, 아니면 진심인지 구분이 안 되었다.
조연출은 침을 꿀꺽 삼키고 정재웅의 사인을 기다렸다.
그도 도훈의 연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정재웅의 목소리가 촬영 현장에 울려 퍼졌다.
“레디!”
* * *
30분 후.
스태프들은 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조연출이 장비를 점검하려고 지나가자 붐 마이크를 든 막내가 슬쩍 옆으로 붙었다.
“조연출 형.”
“왜 그래?”
“아까 마지막에 연기한 배우님이요.”
“아, 이 실장님?”
“그분은 왜 배우 안 하고 매니저를 해요?”
“…….”
조연출은 조용히 막내를 바라봤다.
그것은 자신도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도훈을 위해 정재웅은 카메라를 세 번 돌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카메라 세 번이 도는 동안 도훈은 정재웅이 원한 연기를 그대로 펼쳤다.
조연출인 자신도 뭘 요구하는지 모를 정도의 난해한 디렉팅을 도훈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증거가 바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정재웅의 표정이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정재웅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쓸 만한 신인을 건지다니, 운이 좋으면 뒤로 넘어져도 금덩이가 보인다더니…….”
말끝을 흐린 정재웅은 모니터에 나와 있는 도훈과 이지유의 연기를 머릿속에 다시 한 번 정리했다.
편집의 방향까지 다시 짜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어 어디론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툭, 툭.
그때였다.
뒤쪽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곳에는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도훈이 활짝 웃고 있었다.
“더운데, 조금 쉬었다가 정리하세요.”
“아, 고맙습니다, 실장님.”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재웅은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에 도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이지유가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정재웅의 핸드폰에는 그새 알림음이 울렸다.
하지만 도훈은 그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첩을 꺼냈다.
수첩에는 새로운 문장이 적혀 있었다.
[가능의 한계를…… 에 성공하셨습니다.]
[보상으로 소정의 보상과…….]
도훈이 수첩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도훈의 양옆으로 우시원과 서찬휘가 붙었다.
마치 범인을 체포하듯 양쪽에서 도훈의 팔을 꽉 붙잡는 우시원과 서찬휘.
도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자 우시원이 슬그머니 손을 놓는다.
하지만 서찬휘는 끝까지 도훈의 팔을 놓지 않았다.
도리어 도훈의 팔을 더욱 바싹 끌어당기며 물었다.
“와, 정말 연기 처음 해 보시는 거 맞아요.”
“그럼, 내가 배우도 아니고 처음 해 보지 두 번 해 보겠어? 그리고 서찬휘.”
“네?”
“팔 그만 놔라, 그러지 않아도 더운데 왜 이렇게 붙는 건지…….”
“친해지고 싶어서요. 저는 능력 있는 사람만 보면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요, 하하.”
녀석은 넉살 좋게 웃었다.
옆에 있던 우시원도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뒤쪽에서 걸어오던 강시혁이 재빨리 따라붙었다.
이제 강시혁까지 도훈의 옆에 붙은 상태.
도훈이 한숨을 쉬었다.
“와, 더운데 왜 이렇게 몰려서 갑니까, 해산.”
그 외침에 서찬휘도 한 발짝 떨어졌다.
그 모습에 강시혁이 나지막이 외쳤다.
“이 실장, 우리 애들이랑 잘 어울리네.”
“어울리는 게 당연하지, 매니저니까.”
도훈이 씩 웃자 강시혁이 손을 내저었다.
“그게 아니라 외모가 제법 잘 어울린다고. 이 실장 아이돌 해도 되겠어.”
“푸웁.”
도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도훈의 웃음에 앞서가던 이지유도 웃었다.
순간 이유 없이 우시원과 서찬휘가 웃는다.
강시혁은 잠시 멈춰 서서 멍하니 그들을 바라봤다.
괜스레 샘이 나는 것은 왜일까?
강시혁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마치 오래된 동료처럼 도훈은 우시원과 서찬휘 그리고 이 현장에 잘 어울렸다.
매니저가 아닌 마치 무대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그것도 잠시 강시혁은 고개를 저었다.
매니저가 노래하고 연기를 한다?
그것은 말이 안 되었다.
뭐, 다른 매니저라면 연기자나 아티스트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면 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도훈은 달랐다.
명색이 재벌가의 사람이 아니던가?
강시혁은 앞서가던 도훈을 보며 혼자 피식하고 웃었다.
* * *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초가을.
천고마비라 불리는 가을이 왔지만, JK유통 본부장 이도준은 마치 지글지글 끓는 아스팔트 위에 있는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인상뿐이 아니라 그는 더운지 셔츠의 넥타이를 풀어 헤친 채 생수를 들이켜고 있었다.
벌컥벌컥 들이켜던 생수를 책상 위에 신경질적으로 팽개치자 물이 분수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하지만 이도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치울 것은 아니니까.
신경 쓰이는 것은 오로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도훈밖에 없었다.
그 덕분에 그의 책상에는 밀린 결재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물론 한두 가지 이유가 아니었다.
그의 비자금은 할머니 장경자에게 모조리 압수당한 상태.
거기에 도훈이 JK엔터테인먼트를 인수하고 사명을 바꾼 뒤부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기존에 자리 잡고 있던 정여진 같은 원로 배우에서부터 시작해서 새로 합류한 이지유 그리고 강영웅 같은 탑티어급 연예인이 있었다.
JK유통의 실적은 문제가 없지만, 유레카가 더는 커서는 안 되었다.
유레카가 크면 클수록 그것은 칼날이 되어 자신의 목을 겨냥할 터였다.
이도준은 한 달 전부터 유레카의 싹을 자를 방법을 고민했다.
오늘은 첫 번째 단추를 끼우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 단추가 아직 소식이 없었다.
“에이, 쓰…….”
욕을 한 바가지 퍼부으려던 이도준은 말을 멈췄다.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똑똑.
자신의 비서에게는 분명히 방해하지 말라고 했는데 누군가가 찾아왔다고?
이도준이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
“밖에 누구지?”
그 외침에 살짝 문이 열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그러고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전에 말씀해 주셨던 선배님이 찾아오셨는데요.”
“선배?”
이도준이 고개를 갸웃할 때 비서의 뒤쪽에서 머리를 시원스럽게 올백으로 넘긴 사내가 천천히 나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소파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비서에게 말했다.
“나는 시원한 매실차.”
그 모습에 이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빛이 반짝이는 것으로 보아 사내는 이도준이 기다리던 사람이 분명했다.
그 사내의 주문에 비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도준의 지시가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에 이도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는 뒷걸음치듯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제는 둘만 남은 상태.
사내는 소파에 등을 맡겼다.
그러고는 팔짱을 끼고 이도준을 바라봤다.
“사람을 불러 놓고 대우가 이게 뭐야?”
“미리 연락이라도 하고 오시지, 그러지 않아도 기다렸습니다, 차 선배.”
말을 마친 이도준은 활짝 웃으며 사내를 바라봤다.
사내의 이름은 차명석.
지상파 방송국 중 하나인 SBC의 음악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피디였다.
그는 다른 피디들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그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피디라는 점이었다.
SBC를 소유한 한민건설 차정광 대표의 둘째 아들이 바로 그였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SBC의 누구도 그의 입김을 피할 수 없었다.
웬만한 신인 연예인들은 그의 장난감이고 말이다.
그는 절대 이도준이 불렀다고 달려올 인물이 아니었다.
이도준은 그가 이렇게 급히 온 이유가 궁금했다.
“이도준, 일단 일 얘기부터 하지. 괜히 빙 돌아가는 건 우리 스타일에 맞지 않잖아.”
“그럼, 일 얘기부터 할까요?”
“할까가 아니라, 벌써 끝냈어야지. 난 조용히 듣고 있을 테니 브리핑해 봐.”
“흠,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이도준은 그동안의 일들을 살짝 각색해서 차명석에게 전달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들은 차명석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도준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그런 애송이한테 당해 놓고 나한테 복수해 달라는 거지?”
“뭐, 제가 당한 건 아니고…….”
“당한 게 아니면, 그 애송이한테 떠먹여 준 거야? 아마추어같이 왜 그래? 그래서 얼마 줄 건데?”
차명석은 피식 웃으며 이도준을 바라봤다.
그 눈빛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니 괜히 돌려 말하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얼마면 됩니까?”
“돈은 됐고 이번에 프로그램 하나 하는데, 스폰서나 해.”
“네?”
“우리 프로그램은 아니고 내가 찍어 둔 친구가 하는 프로그램이거든, 할래? 말래?”
차명석은 뱀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입맛을 다셨다.
돈은 됐다고 해 놓고 돈 얘기를 꺼내는 차명석의 모습에 이도준은 기가 찼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차명석은 이제까지 어설프게 일을 처리한 적이 없었다.
지상파의 힘으로 한두 명 정도 지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것이 지상파의 힘이었다.
차명석의 힘을 빌린다면, 아직 완벽하게 자리를 잡지 못한 유레카를 말려 죽일 수 있었다.
조금 비겁한 방법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하겠습니다. 혹시 어떤 프로그램인가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야.”
“서바이벌이라? 그건 종편 포맷 아닌가요?”
“에이, 종편에서 좋은 건 지상파로 가져와야지.”
차명석이 악당처럼 슬쩍 입꼬리를 올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