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63)
한참 동안 할머니를 보던 강다미가 말했다.
“우리 할머니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이강민이 그쪽을 힐끔 보더니 다미에게 말했다.
“다미야, 대본 들고 있잖아, 지금 연기 연습하는 거야.”
“오빠, 우리 할머니는 배우도 아닌데 왜 대본을 들고 있어?”
“우리 누나 도와주는 것 같은데…….”
“아, 누나를 도와주는 거구나. 오빠도 가끔 누나 연기하는 거 도와주고 그래?”
“나도 도와주긴 하는데…….”
이강민은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 이지유의 연기를 도와준 적이 있던가?
사실 자신이 없었다.
방해는 안 했지만, 도와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가족도 아닌 다미의 할머니가 저리 연기를 도와주는 것을 보니 이강민은 왠지 누나에게 미안해졌다.
다미의 할머니 임영희는 지금 이마에 땀방울까지 맺혀 있었다.
저렇게 집중해서 자신의 누나 이지유를 돕고 있다는 것이 이강민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강민이 말했다.
“다미야, 우리도 연기 연습해 볼까?”
“오빠, 그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우리는 그냥 책이나 봐.”
“아, 그럴까.”
이강민은 다미를 이길 수 없었다.
이강민은 힐끔 아직도 땀을 흘리고 있는 다미의 할머니 임영희를 슬쩍 보다가 시선이 마주치자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강민을 본 임영희가 이지유를 바라봤다.
“나 잘한 거 맞지?”
“네, 잘하셨어요.”
“이거 회장 역할이라는 게 굉장히 힘드네.”
“저도 비서님 역할을 하려고 하니 정말 힘들더라고요.”
“아니, 강민이 누나는 목소리까지 바꿔 가면서 잘하던데.”
“헤헤, 정말로요?”
“그래, 목소리에서 냉기가 도는 것이 옆에서 듣던 내가 오싹했어.”
“다미 할머님도 진짜 잘하셨어요. 누가 들어도 목소리에서 포스가 쫘악 느껴지던데요.”
그들은 서로를 칭찬하고 있었다.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일까?
사실, 도훈은 최대한이 어떻게 나올지를 뻔히 알고 있었다.
신분을 밝히고 안 밝히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를 이용해서 이도준을 견제했어야 했다.
그런데 그의 대화를 장경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라?
이도준이 깨지는 것은 불 보듯 훤했지만, 도훈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임영희와 이지유에게 장경자와 엄지연의 역할을 맡긴 것이었다.
도훈의 핸드폰을 통해서 오가는 전화라서 임영희나 이지유는 아무 의심 없이 이번 일을 돕게 되었다.
물론 속사정을 알아도 둘은 도훈을 돕는다고 했을 것이었다.
둘 다 도훈에게 생명을 빚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으니 말이다.
한참을 웃던 임영희가 말했다.
“아이고, 오랜만에 긴장했더니 옛날 생각나네.”
“옛날이라니요?”
“내가 이래 봬도 옛날에 연기자가 꿈이었거든.”
“아, 어쩐지…….”
“뭘 어쩐지야, 그렇게 놀리면 못써.”
“아니에요. 목소리에서 포스가 느껴지시는데요, 뭘.”
“호호, 그건 그렇지. 우리 영웅이가 날 닮아서 가수가 됐을 수도 있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 오늘처럼 긴장되긴 처음이었어요. 저도 옛날 생각이 막 나네요.”
“에이, 강민이 누나가 옛날이 어디 있어?”
“아니에요, 저도 데뷔한 게 십 년이 넘는데요.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긴장되고 그래요. 오늘이 그랬어요.”
“그래, 그렇게 긴장했으니 몸보신 좀 해야겠네, 내가 백숙 해 놨는데 먹을 거야?”
“네, 먹어야죠. 저 백숙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요.”
“에이, 거짓말도 잘한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백숙보다 치킨이지.”
“저는 둘 다 좋아해요, 헤헤.”
“그러고 보니 촬영 들어간다던데 체중 조절 같은 거 안 해도 되는 거야? 우리 영웅이도 광고 찍을 때는 며칠 동안 굶고 그러던데…….”
“안 해도 된대요, 지금이 딱 좋대요.”
이지유가 활짝 웃었다.
* * *
다음 날 아침 도훈은 강시혁의 사무실에 들렀다.
도훈이 지정해 준 연습실에는 우시원이 아침부터 나와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강시혁이 그에게 준 미션은 딱 한 가지였다.
그것은 안무 한 가지를 완벽하게 익히는 것이었다.
기간은 한 달.
그 안무라는 것은 전설적인 안무가인 페리스 클리머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축하 공연용으로 짠 안무인 원더풀 스테이션.
그게 그렇게 힘든 안무인가? 하며 의문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유명 곡 열 개의 안무가 녹아 있었다.
템포라든지 장르가 모두 다른 안무가 뒤섞이다 보니 전문적인 춤꾼도 따라 하려면 시간이 걸리는 안무였다.
도훈은 조용히 우시원을 바라봤다.
연습실 문틈 사이로 원더풀 스테이션이 흘러나온다.
딴다 다단!
그에 맞춰서 플로어에 울려 퍼지는 우시원의 스텝 밟는 소리.
탁, 탁, 타다닥!
그때였다.
휘청하고 우시원의 몸이 중심을 잃었다.
가벼운 스핀이었는데, 반 바퀴를 돌고 바닥에 뒹군 것이다.
춤에 대해서 젬병이라는 건 전생의 기억과 똑같았다.
도훈은 연습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것도 잠시, 고개를 흔들었다.
이건 우시원이 혼자 해야 할 싸움이었다.
이 싸움의 규칙은 간단했다.
원더풀 스테이지의 안무를 한 달 안에 모두 암기해서 공연할 수 있다면 합격.
불가능하다면 불합격이었다.
통과하지 못하면 우시원은 서찬휘와 한 팀을 이루지 못한다.
그때 도훈은 솔로로 데뷔할 기회를 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한다면?
우시원이 원하는 대로 공무원 준비를 하라고 할 것이었다.
전생에 인연이 있다고는 해도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니까.
계속 넘어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하는 우시원을 보던 도훈은 눈매를 좁혔다.
우시원을 보고 있자니 수첩에서 봤던 문구가 떠올랐다.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잘하는 것을 위해 배정된 능력이 있다고 했다.
우시원이 잘하는 건 노래.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은 춤을 추며 친구와 한 무대에 서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훈의 경우는 달랐다.
잘하는 것도 아티스트를 키워 내는 것이고 하고 싶은 것도 그들을 정상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것은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잘하는 것이라…….”
도훈이 연습실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그 유리창에 누군가의 모습이 비쳤다.
도훈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야에 강시혁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이 실장.”
이제는 완전히 친구가 된 강시혁.
그의 눈빛에는 친구라고 하기보다는 은인에 대한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도훈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보기에 표정이 좀 심각한데…….”
말끝을 흐린 강시혁은 슬쩍 연습실 안을 바라봤다.
한참을 보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원이를 걱정하는군.”
“…….”
“표정에서 드러나니, 괜히 숨기지 마. 그런데 원래 시원이와 아는 사이였어?”
“전에 잠깐 본 적은 있었지.”
“그것만 보고 이렇게 투자하는 거야? 나야 전부터 알던 친구라서 애착이 있지만, 이 실장은 대체…….”
의문을 쏟아 내던 강시혁이 말을 멈췄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 때문이었다.
핸드폰을 꺼낸 강시혁은 다급하게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계단을 내려가며 도훈에게 외쳤다.
“신 선생님 오셨다니까, 내가 내려가 볼게.”
말을 마친 강시혁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강시혁이 신 선생님이라 말한 사람은 안무가 신서희였다.
신서희는 국내에서보다는 해외에서 알려진 인물이었다.
러시아 국립발레단에서 활동하던 신서희는 국내에 들어와서도 발레리나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다.
그야말로 승승장구.
하지만 갑자기 한국을 떠난다.
그녀가 다시 한국에 이름을 알린 것은 해외 유명 가수들의 안무를 담당하면서였다.
외국의 발라드 가수 중 하나인 로이스가 댄스 가수로 변신해서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면서 그의 변신을 주도했던 신서희가 알려진 것이다.
몸치였던 로이스에게, 아주 완벽하게 안무를 지도했으며, 또한 그 안무를 창작한 천재 안무가가 바로 신서희였다.
물론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연이어 들려오는 소식에 국내 관계자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현역 시절 활동한 것은 주로 표현의 영역이었고 은퇴 후에 안무가로서 활동한 분야는 창작의 분야이었기 때문이다.
강시혁은 잠시 국내에 들어온 그녀를 인맥을 통해서 연락할 수 있었다.
물론 돈은 생각하지 말고 데려오라는 도훈 덕분에 일을 앞당길 수 있었다.
* * *
잠시 후.
신서희와 도훈은 사무실이 아닌 연습실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강시혁이 사무실로 안내했으나 일단 연습실부터 보자며 이곳으로 온 것이다.
연습실에 그녀가 들어서자마자 도훈은 그녀가 신서희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온몸으로 풍기는 포스가 그 증거였다.
170센티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키에 현역 발레리나라고 해도 될 만큼 깡마른 몸매.
그 몸매가 그녀를 더 날카로워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거기에 눈빛은 면도날을 달아 놓은 것 같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습실부터 둘러봤다.
그러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환경은 합격이라는 뜻 같았다.
연습실을 다 둘러보자 강시혁은 그녀를 도훈에게 안내했다.
도훈의 앞에 그녀와 함께 온 강시혁은 살짝 눈짓을 했다.
빨리 인사하라는 신호인 것 같았다.
도훈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신 선생님.”
“하이, 생각보다 젊네요. 원더풀이에요, 이 실장님.”
외국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런지 한국말 반 외국어 반의 말투가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녀였다.
도훈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하하, 나이가 있는데, 젊게 보이는 게 당연하죠.”
“그게 아니라 뼈대가 젊다는 얘기였어요. 젊은 애들도 곯아서 비실대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그에 비해 이 실장님의 체격은 무대에 서기에 딱이에요. 그야말로 그레잇이에요.”
신서희는 도훈의 몸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표정은 웃고 있지만, 신서희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하하, 농담도 잘하시는군요.”
도훈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마주 웃었다.
처음 그녀에 대해서 들었을 때는 조금 까칠하다고 들었었다.
뭐, 그녀가 까칠하다는 것은 전생에도 들었었다.
하지만 전생에는 그녀와 마주할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의외인 것이 그녀는 도훈이 아는 누구보다도 털털했다.
그때 신서희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그런데 제가 레슨할 친구가 저 친구인가요?”
그녀가 가리킨 것은 구석에서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우시원이었다.
우시원은 살짝 떨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기행과 악명에 대해서는 온라인에 퍼진 소문을 통해서 들었던 우시원이었다.
새벽부터 나와서 쉬지 않고 땀을 흘린 이유 중 하나가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자신을 가르칠 수 없다는 순간 희망은 사라진다.
우시원은 어떻게든 마지막 희망인 그녀에게 매달려야 했다.
신서희가 시선을 보내자 우시원은 바람처럼 달려왔다.
그녀의 앞에 선 우시원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우시원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선생님.”
우시원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 모습이 마치 유치원생의 배꼽 인사와도 비슷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