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57)
인사를 하자마자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것으로 봐서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도훈이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
“남자답게 잘생기시고 직원들에게 잘해 주는 분이라고 많이 들었습니다.”
“음, 누가 그러던가? 혹시 곽 대리가?”
“설마 곽 대리뿐이겠어요? 다른 팀장님들에게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래, 인사성 하나는 밝군그래.”
최대한이 도훈의 어깨를 톡톡 친다.
대견하다는 듯 사람 좋은 듯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그 모습에 도훈은 헛숨을 삼켰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낼 수는 없는 일.
도훈도 마주 웃었다.
직급은 과장인데, 말투는 꼭 도훈의 할머니인 장경자보다 더 묵직하다.
아마도 몸에 배어 있는 권위주의 때문인 것 같았다.
과장이 권위주의에 물들어 있다면, 그가 임원이 되면 어떻게 될까?
도훈은 헛웃음을 겨우 참았다.
어깨를 툭툭 치던 그가 어깨동무하더니 도훈을 바라봤다.
“혹시 신입 사원 교육은 받았나?”
“네, 신입 사원 교육요?”
“내가 출장 간 사이에 흐지부지 넘어간 모양이네.”
“…….”
“일단 우리 회사에 입사하면 애사심을 키우기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이 있어.”
“그게 뭔데요? 과장님.”
“반년 동안은 아침에 가장 일찍 나와서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하고…….”
그는 입에 모터를 단 것처럼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유레카 엔터테인먼트에서의 규칙은 생각보다 많았다.
이 정도의 규칙을 지키면서 회사에 남아 있을 신입 사원이 얼마나 될까,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였다.
그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곽수정 대리가 미안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과장님, 말씀 중에 죄송한데요. 이 실장님은 매니지먼트 팀이라서 화장실 청소는 못 해요. 아티스트를 따라서 움직여야 하는데, 어떻게 회사로 나와요. 좀 이해해 주세요.”
“음, 매니지먼트 팀이라고 예외를 둔 적이 있나? 나도 인사팀이지만, 입사해서 반년은 혼자서 화장실 청소를 했어. 좀 일찍 나와서 화장실 청소를 하고 들어가면 되지 않나?”
“…….”
도훈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최대한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곽수정의 조언은 필요 없다는 듯 다시 도훈을 바라봤다.
“자네가 대표님 라인이라는 건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 그런데 나도 뒷배경은 있거든. 혹시 이도준 본부장님이라고 아나? 유레카의 대표님이 여기라면…….”
그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허리 부근을 그었다.
그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미라클 본사의 이도준 본부장님은 여기에 있지.”
최대한은 다시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 위를 그었다.
그 모습에 도훈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과장님. 혹시 말입니다.”
“편안히 말해 봐.”
“과장님도 하신 거 맞죠?”
“당연하지.”
“그럼, 저도 해야죠.”
“그렇게 한다니 더는 말 하지 않겠으니, 내일부터 실시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도훈이 살짝 고개를 숙이자 최대한이 도훈의 어깨를 다시 토닥인다.
그러고는 그는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한바탕 태풍이 몰아친 것 같은 분위기에 곽수정은 입을 딱 벌렸다.
그러고는 도훈에게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저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닌데요…….”
“왜, 곽 대리님이 미안해요?”
“그냥요, 사과할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데 항상 저런 식인가요?”
“신입 사원이 들어올 때마다 저런 식으로 괴롭혀요.”
“혹시 저 사람 때문에 퇴사한 사람도 있나요?”
“한두 명이…… 앗, 아무것도 아니에요.”
곽수정은 손을 휘휘 저었다.
아무래도 도훈에게 이렇게 털어놓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았다.
도훈이 씩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괜찮습니다, 저한테 말씀 안 해 주셔도 됩니다.”
도훈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실장으로 위장을 하고 업무를 보는 것이 어찌 보면 다행이었다.
만약에 위장을 안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유레카가 열매를 맺을 무렵이면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질 것이 분명했다.
영문도 모른 채…….
도훈은 몸을 돌린 채 수첩을 꺼냈다.
살생부라 불리는 바로 그 수첩이다.
수첩의 죽일 자의 칸에 도훈은 오늘 들었던 직원들의 이름들을 하나씩 적어 나아갔다.
그리고 살릴 자의 칸에 곽수정의 이름을 적었다.
전쟁에서 가장 기본은 무엇일까?
무기를 다루는 법?
아니면 적군의 상황을 아는 것?
도훈이 생각하기에 가장 기본은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정확히 겨냥.
이것은 진짜 전쟁에서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이란 이라크 전쟁 직후, 어느 미디어가 밝힌 자료에 의하면 사망한 미군 중 적군의 총탄에 맞은 사망자보다 아군의 총탄에 맞고 사망한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도훈은 잘못하면 이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도 모르고 조직에 칼을 들이댔다가 아군만 썰려 나가는 것은 도훈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곽수정의 이름을 막 수첩에 적었을 때였다.
그녀가 슬쩍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풀죽은 얼굴로 물었다.
“혹시 우세요?”
“아, 아닙니다.”
도훈은 사실 당황했다. 우느냐는 오해를 받을 줄은 몰랐었다.
도훈이 손을 흔들자 곽수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많이 울었어요.”
“네?”
“진짜 비밀이에요. 저 과장님 때문에 진짜 많이 울었어요. 관둘까도 생각했는데, 엄마 아빠 생각나서 꾹 참았어요. 그러니까. 어느 순간 괴롭힘도 없어지더라고요. 앗, 내가 뭐래…….”
곽수정은 자신의 입을 막은 후 허겁지겁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도훈은 다시 한 번 수첩을 확인했다.
* * *
일주일 뒤.
아침 일찍 유레카에 들렀다 나오는 도훈의 뒤로 한민국이 허겁지겁 따라왔다.
“실장님.”
“왜, 그래? 한 매니저?”
“아니, 언제까지 숨기고 계실 겁니까?”
“뭘 숨겨?”
“신분 말이에요? 신분.”
“그게 뭐가 문젠데, 그렇게 눈을 똑바로 뜨고 사람을 겁줘?”
도훈이 한민국의 눈을 가리켰다.
누가 봐도 화가 많이 난 표정이었다.
한민국은 못 참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니, 생각해 보세요. 손 하나 까닥하면 정리될 일인데……. 왜, 일주일 동안이나 화장실 청소를 하세요?”
“나름 도움이 많이 되던데.”
도훈이 씩 웃었다.
도움이 된다는 것은 진심이었다.
도훈이 화장실 청소를 시작하자마자 직원들과의 거리가 완벽하게 없어졌다.
전에는 대표 라인이라는 부담감 때문에 다가오지 못했던 직원들이 도훈에게 친근하게 대한 것이었다.
거기에 회사의 사정을 속속들이 털어놨다.
최대한 과장에 대한 욕은 덤이고 말이다.
도훈의 수첩에는 제법 많은 직원의 이름이 추가되었다.
도훈의 표정을 본 한민국이 못마땅한 듯 말을 이었다.
“도움은 무슨 도움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아,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 자존심이 상해서요.”
“자존심이 밥 먹여 주는 건 아니잖아.”
도훈은 씩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결전을 앞둔 검투사의 표정으로.
도훈은 오늘 진짜 결전을 앞두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왕건우와 결판을 짓는 날이었다.
* * *
강시혁의 사무실.
강시혁은 왕건우와 함께 도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건우는 미리 찾아와서 강시혁에게 계속 사죄를 했다.
강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사기를 당한 것은 맞는데, 왕건우가 설명하자 그것이 진실인 것만 같았다.
조용히 시간을 확인하는 강시혁과는 달리 왕건우는 초조한 눈빛으로 마른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 정도로 절실하게 미라클의 투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덜컹.
문이 열리고 도훈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쪽에는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한민국과 함께 말이다.
도훈이 모습을 드러내자 왕건우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훈은 슬쩍 시간을 보더니 왕건우에게 말했다.
“제가 늦었습니다.”
“늦긴요, 제가 빨리 온 거지요. 약속 시각이 아직 30분이나 남았습니다. 서류는 검토해 보셨는지요.”
“네, 우리 변호사를 통해서 검토해 봤습니다. 아주 깔끔하더군요.”
“그럼, 약속한 투자금 집행은 언제…….”
왕건우가 슬쩍 말끝을 흐리자 도훈이 말을 이었다.
“미라클 쪽은 준비해 뒀습니다. 미리 설명해 드렸듯 계좌는 자본금 납입을 위해서 준비한 계좌로 이체하겠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왕건우가 슬쩍 말끝을 흐린다.
아마도 자신이 을의 위치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어서인 듯싶었다.
도훈은 한민국에게 눈짓했다.
한민국이 준비한 태블릿을 꺼내 도훈에게 건넸다.
도훈은 태블릿을 꺼내더니 은행 앱의 화면을 켰다.
태블릿을 터치하자 은행 앱의 화면이 나오고 미라클이 입금한 금액이 나왔다.
금액이 뜬 화면을 왕건우에게 보여 줬다.
“헉, 오십억이 맞네요.”
“그럼, 그쪽도 자금을 이동시키시죠.”
“저는 현금으로 준비했습니다.”
왕건우는 뒤쪽에 있던 비서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비서는 하드케이스로 된 서류 가방을 왕건우에게 건넸다.
서류 가방을 받은 왕건우는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려놨다.
그러고는 버튼을 눌렀다.
찰칵.
서류 가방이 기분 좋게 열렸다.
순간 옆에 있던 강시혁의 눈이 커졌다.
오만 원권 다발이 서류 가방에 가득 차 있던 것이었다.
도훈은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현금으로 가져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걸 입금한다고 해도 자금의 출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도훈의 입에서 장황한 설명이 튀어나왔다.
왕건우는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이제까지 거래에서 현금을 마다하는 상대는 없었다.
당황한 왕건우가 물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투명한 회계 처리를 위해서 지정된 계좌로 입금해 주십시오. 딱 한 시간 드리겠습니다.”
“음.”
신음을 토한 왕건우가 비서에게 눈짓했다.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빨리 핸드폰을 든다.
스마트폰이 아닌 폴더폰을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 보안에 꽤나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비서는 사무실 밖으로 나가 어딘가로 급하게 통화를 한다.
그 모습에 도훈은 웃음을 겨우 참았다.
저들의 계획은 간단했다.
투자금이 회사에 묶이면 그 권한을 자신이 가져와서 중국으로 다시 튈 생각이었다.
웃긴 건 미리 은행 직원까지 다 매수를 해 놨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난놈은 난놈이었다.
하지만 도훈은 오늘 왕건우 일행을 그대로 보내 줄 생각이 없었다.
도훈은 조용히 벽시계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왕건우가 다급하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실장님. 곧 준비됩니다.”
“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도훈은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곧 이 연극의 클라이맥스가 다가올 시간이 되었다.
도훈이 입가에 진득한 미소를 맺고 있을 때였다.
왕건우가 주먹을 불끈 쥐며 시시각각 변하는 도훈의 표정을 확인했다.
도훈이 미소 짓자 왕건우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때였다.
왕건우의 비서가 달려왔다.
숨에 찬 듯 그는 바로 입을 열지 않고 먼저 핸드폰을 가리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