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46)
생각만 해도 치가 떨렸는지 이지유는 이를 부득 갈았다.
그 모습에 정재웅은 감탄했다.
이전에 없었던 독기마저 띠고 있었다.
지금 모습으로 봐서는 팔색조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었다.
그때 도훈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배역을 위해 준비하고 있었는데…….”
도훈은 목이 메었는지 생수를 다시 들이켰다.
벌컥벌컥 들이켜던 도훈이 정재웅을 바라봤다.
정재웅은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도훈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감독님께서는 뭐라고 하셨죠? 솔직히 마음이 아픕니다.”
“아, 그건 오해입니다.”
“아까 뭐라고 하셨죠?”
“…….”
정재웅은 조용히 고개를 돌려 김다솜을 바라봤다.
구해 달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김다솜은 조용히 천장을 올려다봤다.
사실 김다솜도 정재웅과 의견이 같았다.
다만, 감독인 정재웅이 대표로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배우의 이미지를 바꾼다는 말인가?
김다솜은 열변을 토하는 도훈과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지유를 번갈아 봤다.
김다솜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도훈이 조금 특별하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공동집필을 하자고 제안한 것은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던 것을 족집게처럼 쪽쪽 끄집어내고는 해결책까지 제시해 줬기 때문이다.
그저 천재적인 스토리텔링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미라클이라는 커다란 둥지에서 태어난 재벌 3세에게 그런 능력까지 있다고?
솔직히 도훈이 부러웠다.
진짜 천재는 자신이 아니라 도훈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거기에 또 하나의 의문이 든 것이었다.
연예기획사를 운영하고 거기에 신분을 숨기고 실장으로 몰래 일하는 것이 그저 유희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진심이었다.
말투와 표정에서 도훈의 진심이 묻어 나왔다.
지금 말을 들어 보면 이지유를 트레이닝 시킨 것도 도훈이 직접 나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김다솜은 지금 자신이 대한민국 연예계를 뒤집어 놓을 소용돌이 중심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다솜의 시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훈은 쉴 틈 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다시 생수통을 잡았다.
전에 마신 것이 아닌 새로운 생수통이었다.
도훈이 비운 생수는 벌써 세 통째였다.
멍하니 있던 정재웅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아까 드린 말씀은 사과드립니다.”
“네, 받아들이죠.”
“그런데, 제가 아까 한 말 중에 확인해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게 뭐죠?”
“밝기 조절이 안 되는 조명 같다고 했던 점인데요. 지금 이지유 배우가 보여 주는 분위기가 연기가 아닌 굳어진 이미지라면…….”
정재웅이 힐끔 이지유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이지유는 눈을 크게 떴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지금 자신이 보여 주는 분위기는 모두 층간 소음으로 인해 심신이 지쳐서였다.
자신이 이곳에 오기 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오고 나서 이상한 대화가 오갔다.
층간 소음으로 피해를 본 것은 불가항력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도훈은 그것을 마치 일부러 당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그도 모자라 매니저와 배우의 노력으로 승화시켰다.
대충 상황을 보니 도훈의 말이 먹힌 것은 같았다.
그런데 정재웅이 다시 확인하고 싶은 듯한 뉘앙스를 풍기자 이지유는 할 말이 없었다.
밝기 조절이란 말이 뭔지는 알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밝은 분위기의 연기를 보여 줄 상황은 아니었다.
사실 멘탈만 나간 것이 아니라 며칠간은 끼니도 제대로 때우지 못했다.
그나마 동생인 이강민은 학교 급식 덕분에 체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지유는 층간 소음 때문에 밥도 먹지 못했다.
지금은 얼굴의 근육과 성대조차도 조절할 수 없는 상황.
그때 도훈이 귓속말로 뭐라 속삭였다.
“이지유, 잘 들어…….”
순간 이지유의 눈이 커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정재웅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다.
조금 남아 있던 의심마저 한여름 떨어진 눈송이처럼 순식간에 녹아 버린 것이었다.
지금 정재웅이 확인한 이지유는 전자 제품의 버튼을 누르는 것처럼 힘들이지 않고 분위기를 바꾸었다.
도훈이 연기를 지시하자 카멜레온처럼 표정과 분위기를 바꾼 것이다.
조금 전까지 보여 줬던 것이 아포칼립스를 앞둔 것 같은 현대인의 절망이었다면 지금 보여 준 것은 희망이었다.
감정을 저리 자유자재로 통제할 수 있는 배우를 본 적이 없었다.
정재웅은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짝, 짝.
그는 본능적으로 손뼉을 쳤다.
그 옆에 있던 김다솜도 얼떨결에 일어나 손뼉을 쳤다.
갑자기 대회의실에 울려 퍼진 박수 소리에 복도를 지나가던 유레카 직원들이 힐끔거리며 회의실 안을 바라봤다.
얼떨결에 손뼉을 치고 있었지만, 김다솜도 가슴 한편에는 진심이 섞여 있었다.
저렇게 노력하는 배우와 매니저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방에서 가장 어정쩡한 표정으로 있던 사람은 한민국이였다.
그는 이미 모든 사정을 알고 있기에 도훈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약장수의 멘트처럼 들렸다.
그런데 저기에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모두가 각기 다른 시선으로 도훈을 바라볼 때였다.
도훈은 사람 좋은 얼굴로 정재웅을 바라봤다.
“감독님이 만족하신 것 같으니 결론은 난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럼요, 당연하죠, 실장님.”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제가 드릴 말씀이죠.”
그때 덜컹하고 회의실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한유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모두를 바라봤다.
그녀의 뒤를 이어 정여진이 들어왔다.
그들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본격적인 초원의 집 프리프로덕션에 들어갔다.
프리프로덕션이란 크랭크인 전 모든 단계를 뜻한다.
그들은 이제 막 첫 번째 걸음을 뗀 것이었다.
* * *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한민국이 도훈의 소매를 잡았다.
“실장님.”
“왜 그런 눈으로 나를 봐?”
“궁금한 게 있어서요.”
“그게 뭔데? 한 매니저.”
“아까 정 감독하고 김 작가님을 속인 건 알겠는데요. 이지유 씨 마지막 연기를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무슨 연기?”
“정 감독님한테 분명히 그러셨잖아요. 이지유 씨한테 희망을 연기해 보라고요. 그리고 이지유 씨는 그걸 감정 조절도 없이 바로 연기했고요.”
“아, 그거 말하는 거구나. 그거 연기 아니야.”
순간 한민국의 눈이 커졌다.
한민국은 호기심에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지유 배우한테 그냥 저녁에 밥이나 같이 먹자고 했어, 강민이도 데리고 나오라고.”
“네?”
“메뉴는 한우 투뿔로 쏘겠다고.”
“아!”
한민국이 탄성을 터뜨리며 도훈을 아래위로 훑어봤다.
“아, 그거 사기잖아요.”
“사기는 무슨 사기야?”
“…….”
“연기야 앞으로 배우면 되지만, 눈앞에 기회는 놓치면 영영 안 올 수도 있어. 기회는 왔을 때 잡는 거야.”
“그게 기회라고 보시는 것도 이상하고 이지유 씨를 높게 평가하는 것도 이상하고…….”
한민국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도훈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
“혹시 미래를 알고 계시는가 해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진짜 아니에요? 꼭 신들린 사람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전에 같으면 한참을 고민했을 법한 일들도 거침없이 결정하시는 거 보면…….”
한민국은 말끝을 흐리며 도훈을 아래위로 살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로또 번호가 꿈속에서 보이면 저도 알려 주실래요?”
“아, 로또, 그래 로또가 인생 역전에는 그만이지, 가는 길에 같이 로또나 사 볼까?”
“실장님은 인생을 역전시킬 필요가 없으시잖아요, 여기서 역전하면 뭐랄까…….”
“나도 역전이 필요하다, 인마.”
“정말로요?”
“그래, 진심으로 역전하고 싶다.”
도훈은 파이팅 포즈를 취하며 빙긋 웃었다.
이것은 도훈의 진심이었다.
남은 기간을 후회 없이 살려면 지금 가지고 있는 기반 아래에서 뜻을 펼쳐야 했다.
인생 역전은 도훈에게는 현재 진행형이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띤 도훈은 힘차게 앞으로 걸어갔다.
한민국은 점점이 사라지는 도훈의 뒷모습을 보며 외쳤다.
“실장님, 같이 가요.”
* * *
유레카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있는 먹자골목의 초입.
활짝 웃고 있는 한우가 음식점 앞에서 훈훈한 미소를 뽐내고 있다.
도훈은 이지유와 약속한 대로 한우를 쏘기 위해 음식점을 잡았다.
음식점 앞에 선 한민국은 간판과 도훈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 모습에 도훈이 물었다.
“왜 자꾸 범인 보듯이 그렇게 봐? 여기 맛있다고 소문난 집이야.”
이것은 사실이었다.
앞으로도 이곳은 체인점까지 내며 계속 점포 수를 늘려 나갈 가게였다.
도훈의 말에 한민국이 못 참겠다는 듯 말했다.
“그러니까 더 이상하죠. 생각해 보세요. 제가 실장님하고 같이 지낸 게 언제부터예요?”
“한 몇 년 됐나?”
“정확히 이 년하고도 이백칠십오 일이에요.”
“너 나랑 사귀냐? 소름 돋게 왜 그렇게 날짜를 정확히 따져?”
“퇴직금 정산 정확히 받으려면 따져야죠.”
“음, 그렇다면 그냥 넘어가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제가 실장님이 어디 가실 때 빠진 적 있나요?”
“그러고 보니 없는 것 같네.”
“그러니까요, 동창회 모임까지 전부 제가 동행했는데 여긴 처음이에요.”
“한 매니저가 오기 전에 먹었겠지, 분명히 내 기억에는 맛있는 집이었어.”
“블로그 봐도 맛있어 보이더라고요.”
한민국은 가게의 간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우아한 미소라는 이름이 궁서체로 적혀 있었다.
한민국은 손가락으로 그 옆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영어로 ‘since’라는 글자와 그 옆에 숫자가 적혀 있었다.
도훈은 그제야 녀석의 의도를 알았다.
이 가게가 생긴 것은 녀석이 입사한 이후.
도훈이 어이가 없다는 듯 답했다.
“한 매니저, 내가 먹어 봤든 블로그에서 봤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그럼 뭔데요?”
“오늘의 메뉴가 중요한 거지. 혹시 한 매니저만 한우 말고 삼겹살 먹을래? 요 옆 가게에서.”
도훈이 우아한 미소의 옆에 있는 가게를 가리켰다.
순간 한민국이 사색이 되어 손을 내저었다.
“아, 제가 입이 방정이네요, 실장님! 충성하겠습니다.”
그때 뒤쪽에서 이강민이 다가왔다.
“삼촌, 우리 왔어요.”
“누나는 어딨어?”
“피로해소제 사서 온대요. 아무래도 정신 좀 차려야겠다고요.”
“집에서 안 쉬고 온 거야?”
“집에서 어떻게 쉬어요? 아시면서…….”
“흠, 그렇지.”
“누나랑 나랑 공원에 갔는데, 벤치에 앉아서 계속 표정 연습을 하던데요? 삼촌한테 배운 거라고 하면서요.”
“나한테 배운 거라고…….”
“네, 분명히 그렇게 말했어요. 삼촌이 누구보다 뛰어난 선생님이라고 하더라고요.”
“오해가 있던 것 같네, 하하.”
도훈이 어색하게 웃자 이지유가 도착해서 도훈에게 약봉지를 내밀었다.
“이거 피로해소제예요, 실장님. 그리고 이건 한 매니저님 거.”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