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45화 (45/250)

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45)

김다솜은 자리에서 일어나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언제부터 와 있던 거예요?”

“한 십 분 됐나?”

“그런데 왜 가만히 있었어요?”

“하도 둘이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기에 방해될까 봐 가만히 있었지.”

“아, 미리 말 좀 해 주죠.”

“그런데 무슨 얘기를 그렇게 심각하게 하고 있어? 나도 공동 집필하기로 했으니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배역 문제 때문에요.”

“배역 문제라고? 배역 중에 엄마와 둘째는 정해진 거 아니었어?”

“당연히 엄마는 정여진 선생님으로 확정인데요…….”

김다솜이 살짝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에 도훈은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그런데? 혹시 이지유 배우 캐스팅하기로 한 거 마음 변한 거야?”

“그, 그건 아닌데요.”

김다솜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정재웅을 바라봤다.

마치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처럼 말이다.

김다솜의 시선을 받은 정재웅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지유 배우의 배역은 조금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때 실장님도 저희 의견을 존중해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당연하죠.”

이것은 진심이었다.

변수를 줄이려는 방법이었고 전생에 명작을 만들어 낸 정재웅과 김다솜 콤비에 대한 배려였다.

도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재웅의 눈치를 살폈다.

정재웅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서 둘째가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건 아시죠?”

“네,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의 발랄함과 현대 산업사회의 피곤함을 둘 다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이지유 배우는 밝아도 너무 밝아요. 뭔가 밝기 조절이 안 되는 전구 같다고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딸 역할로는 힘들 것 같습니다. 차라리 둘째 딸과 대척점에 있는 부잣집 친구 역할로 빼는 게 어떨까요?”

“감독님, 제가 한 말씀만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시죠.”

“제가 미리 말씀드렸다시피 캐스팅에 대한 최종 권한은 감독님과 작가님께 있습니다.”

“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지유 배우의 연기를 보신 적이 없으시잖아요.”

“연기는 못 봤지만…… 지난번에 그 이미지는 확실히 머릿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사실 그 만남 이후로 많이 고민했습니다. 실장님께 약속한 부분도 있고요.”

“저와의 약속이라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는 영화가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네, 그럼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지유 배우의 경우 기존의 이미지를 탈피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이돌 활동 시절 남아 있던 이미지가 강해도 너무 강해요.”

“음…….”

도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아이돌 업계에서 은퇴한 지 불과 일 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동안 들어오던 광고도 모두 아이돌 시절 쌓아 왔던 이미지 덕택이었다.

정재웅은 그 아이돌 시절 색이 그대로 작품에 묻어날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정여진도 국민 엄마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그녀는 색을 조절할 수 있는 배우였다.

거기에 더해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국민 엄마의 이미지를 가지고 간다고 해도 이 작품에서는 큰 무리가 없었다.

도훈의 표정을 본 정재웅이 다시 말을 이었다.

“물심양면으로 우리 작품을 도와주시는 것은 알겠지만, 저희가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

“자본의 영향을 받지 않고 우리만의 색을 입히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말끝을 흐린 정재웅 감독은 생수를 따서는 급하게 들이켰다.

생수를 반이나 들이켠 정재웅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정여진 선생님까지는 저희 영화의 힘이 되지만, 이지유 배우의 경우는 저희로서는 조금 부담스럽습니다. 저희 사정에 무작정 배우의 성장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요.”

“그럼 이렇게 하죠.”

도훈이 눈을 빛내자 정재웅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말씀해 보시죠.”

“이지유 배우가 여기로 오기로 했으니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이미지에 맞는지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확인은 해 보겠지만, 일주일 만에 이미지가 변했을 리가 없죠.”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말씀해 보시죠.”

“이지유 배우도 감독님의 생각과 똑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작품에서 자신의 이미지가 너무 튄다고 생각한 것이죠.”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인지…….”

“배우 혼자 대본을 분석하고 그 역할에 맞추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겁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노력 가지고는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없을 겁니다.”

“제가 부탁이라고 했잖습니까? 일단 확인부터 해 보시죠.”

“실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다시 한 번 고려해 보겠습니다.”

정재웅은 마른세수하고 옆쪽에 있는 김다솜을 바라봤다.

김다솜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정재웅의 의견은 자신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김다솜과 며칠을 토론한 것이었다.

도훈이 이 작품과 전혀 관계가 없다면 조금 편하게 말했겠지만, 김다솜으로부터 그동안의 사정을 들은 정재웅은 조금 가슴이 무거웠다.

그들이 작품에 대해서 이견을 조율하고 있을 때였다.

회의실의 문이 열렸다.

덜컹.

힘없이 닫히는 문.

그 앞에는 초췌한 얼굴의 이지유가 서 있었다.

턱을 괴고 있던 정재웅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누구신지요?”

정재웅은 진짜 누군지 몰라서 묻는 것이었다.

며칠 밤은 꼬박 새운 것처럼 얼굴이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으며 자세히 보면 핏기라고는 어디에도 없었다.

반면 이지유는 정재웅의 말을 오해했다.

자신이 늦게 왔다고 생각해서 구박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지유는 조금 억울했다.

늦기는커녕 30분이나 일찍 온 것이었다.

다만 도훈과 정 감독 그리고 김다솜 작가가 일찍 와서 자신이 늦은 것처럼 보인 것뿐이었다.

하지만 위계질서를 어길 수 없는 이지유는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늦었네요, 감독님.”

“그런데 누구신지요?”

정재웅은 다시 물었다.

그 말에 이지유는 울상이 되었다.

순간 정재웅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정재웅이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간단했다.

그가 생각하는 초원의 집 둘째 딸의 퇴근 후 모습과 지금 눈앞에 있는 여성의 모습이 정확하게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누가 자신의 뇌 속으로 들어와 스케치한 것처럼 분위기가 완벽하게 똑같았다.

정재웅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은 대체 뭐란 말인가?

정재웅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도훈이 끼어들었다.

“감독님 왜 그러세요? 지난번에 인사 나누셨잖아요.”

“저는 이분과 인사를 나눈 적이…….”

정재웅이 말끝을 흐리며 이지유를 가리켰다.

그 모습에 도훈은 김다솜의 눈치를 살폈다.

김다솜도 눈을 끔뻑이며 어찌 된 상황인지를 파악하는 중이었다.

도훈은 웃음을 겨우 참았다.

자신도 이지유를 처음 봤을 때 누군지 몰랐으니 그들이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층간 소음이 사람을 이렇게 철저히 망가뜨릴 수 있다는 것을 도훈도 이번 생에 처음 알았다.

전생에 뉴스에서는 봤어도 실제로 당해 본 적이 없으니 이토록 감정이입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고통을 이용해야 할 때였다.

도훈이 재빨리 이지유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지유 배우입니다. 전에 인사 나누셨잖아요.”

“헉! 대체…….”

정재웅의 동공이 진도 4의 지진을 만난 것처럼 마구 흔들렸다.

옆에 있던 김다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그때 이지유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제가…….”

그때 도훈이 재빨리 이지유의 말을 끊었다.

“이지유 배우님은 그냥 앉아 있어. 지금 물 마실 힘도 없잖아. 나머지는 내가 설명해 드릴 테니, 조금 쉬고 있어.”

“네, 실장님.”

이지유는 힘없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마치 허수아비가 바람에 쓰러지는 모습이다.

사실 이지유는 어찌 된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을 몰라보고 도훈은 심각한 일이 생긴 것처럼 미간을 좁히고 있으니 말이다.

도훈은 생수병을 따서 한 모금 들이켰다.

모두가 도훈의 입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도훈이 생수를 넘길 때 그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모두의 시선을 모은 도훈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감독님.”

“하신 말씀 너무 많아서.”

“이지유 배우가 배역을 위해서 준비하고 있었다고요.”

“아, 그런 말씀은 하셨죠. 그렇다고 이렇게 변신해서 올 줄이야…….”

정재웅은 다시 이지유를 바라봤다.

이지유는 정재웅의 눈빛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찌 보면 지쳐 보이기도 했고 다른 눈으로 보면 도도해 보이기까지 했다.

이전에는 볼 수 없는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어떤 트레이닝을 받았기에 저렇게 변신을 해서 왔단 말인가?

정재웅이 눈매를 좁힐 때 도훈이 생수병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탁.

“사실 이지유 배우와 저는 지난번에 대본을 받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

“과연 기존의 이미지 그대로 이 배역을 소화할 수 있겠냐? 하는 점이었죠. 결론은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바꾸느냐였죠.”

“아…….”

“저와 이지유 배우의 결론은 간단했습니다. 초원의 집에서 나온 평범한 현대인의 모습에 필요한 것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그게 대체 뭐죠?”

“극심한 스트레스와 과도한 업무죠.”

말을 마친 도훈은 손가락으로 이지유를 가리켰다.

정재웅의 시선이 다시 이지유를 향했다.

도훈의 말은 사실이었다.

아마에 스트레스라고 새겨 놓은 것처럼 이지유의 넋이 나가 있었다.

아마 뒷머리에는 피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을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이지유의 분위기는 대표적인 회사원의 이미지로 변해 있었다.

그때 도훈이 말을 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이지유 배우는 무엇을 했을까요?”

“…….”

“딱 봐도 며칠 밤은 뜬눈으로 새운 것 같죠.”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실재 며칠 밤을 뜬눈으로 새웠습니다.”

도훈의 말에 정재웅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재빨리 이지유에게 물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그게 사실이긴 한데…….”

“헉.”

정재웅이 입을 벌리자 도훈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 몸을 던졌습니다.”

“대체 어떤 환경에서 트레이닝했기에 이런 변신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감독님 같으면 캐비닛에 들어가서 온종일 갇혀 있을 수 있습니까?”

“…….”

“그런데 그 캐비닛을 누군가 계속 두드립니다, 쾅쾅하고요. 그것도 불규칙적으로요.”

“음.”

“그것이 현대인의 삶입니다.”

도훈은 다시 이지유를 가리켰다.

정재웅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이돌 출신의 배우가 독립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다고?

정재웅은 이지유가 어둠 속에서 겪었을 스트레스를 생각하고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맞은편에 앉은 이지유도 어깨를 떨었다.

며칠간의 층간 소음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