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39)
그 모습에 도훈이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프린터 연결해 놨어요.”
“지금 내가 궁금해하는 게 그게 아니라는 걸 알지 않느냐? 도훈아.”
“아, 계약서 말씀이군요. 잠시만요, 할머니.”
도훈은 재빨리 뛰어가 인쇄된 계약서를 들고 왔다.
계약서는 정확히 두 부.
그중 하나를 장경자에게 넘긴 도훈은 자신의 몫으로 남은 계약서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런 도훈을 보는 장경자의 눈에는 주체 못 할 정도의 호기심이 피어났다.
장경자는 호기심을 억누르고 도훈이 건넨 계약서를 살펴봤다.
계약서를 살피던 장경자의 눈이 조금씩 커졌다.
이것은 완벽한 계약서였다.
갑이 을을 찍어 누르는 것이 아닌, 상호 존중이 기본적으로 깔린 계약서.
그 증거로 모든 계약의 내용은 쌍방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회장이라고 해서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고.
손자라고 해서 봐달라는 문구도 없었다.
오로지 상호 간의 신의를 확인하기 위한 계약서였다.
자신이 뽑은 계약서를 모두 확인한 도훈이 말했다.
“혹시 수정할 거라도…….”
“흠, 한 가지 있다.”
“뭔지 말씀해 주세요, 바로 수정할게요.”
“거기 위약금 조항 말이다.”
“그게 왜요? 오천만 원이 너무 적은가요?”
“내 오천만 원과 네 오천만 원이 같을까?”
“네?”
“전 재산의 오 퍼센트로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마는…….”
“앗.”
“싫으면 말고.”
“네, 수정하겠습니다.”
도훈이 활짝 웃으며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입가에 미소를 피워 냈다.
남들은 호랑이라 무서워하지만, 장경자는 이런 사람이었다.
남을 누르려 하지도 않고 자신도 눌리지 않는 평등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잠시 후, 도훈은 재빨리 장경자의 서명을 받았다.
계약서를 받아 든도훈은 장경자를 향해서 고개 숙였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할머니.”
“잠시만 기다려라.”
“하실 말씀이라도…….”
“다음부터는 새벽부터 줄 서지 말아라.”
“아, 그 말씀이었군요. 제가 그건 전해 드릴게요.”
“그게 무슨 말이냐? 네가 줄을 선 게 아니란 말이냐?”
“제가 아니라 영웅이 형이 줄 선 거예요.”
“강영웅이 줄을 섰다고?”
“네.”
도훈의 말에 장경자가 재빨리 엄 비서를 불렀다.
“엄 비서야.”
“네, 회장님.”
“이 떡은 냉동실에 보관해라.”
“지금 안 드시고요?”
“냉동실에 넣어 놓고 제일 세게 켜 놔라, 평생 보관하려니까.”
“대체 왜 이걸…….”
“그냥 시키는 대로 해라, 엄 비서야.”
장경자는 활짝 웃으며 주방을 가리켰다.
엄지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쇼핑백을 들었다.
그때 장경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쇼핑백도 넣어라. 지문 없어지지 않게 비닐로 꽁꽁 싸서 잘 넣어.”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엄지연은 떡이 든 쇼핑백을 가지고 주방으로 향했다.
도훈은 그런 모습을 보며 한참을 웃다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럼 그만 가 볼게요. 할머니.”
“그래, 조심해서 가고.”
장경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도훈이 사라지자 엄지연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왜 떡을 안 드시고요? 회장님 저 떡 좋아하시잖아요.”
“저건 그냥 떡이 아니다, 엄 비서.”
“회장님 저게 그냥 떡이 아니라니요? 혹시 저 안에 금이라도…….”
“에이 엉뚱한 생각은…… 저건 강영웅의 기다림이 묻은 떡이야, 엄 비서.”
“아!”
엄지연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놀란 표정을 숨기기 위해서 엄지연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 * *
한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승합차에 탄 도훈은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은 좀 쉬어야 할 것 같으니 집으로.”
“네, 실장님. 그런데 투자는 받기로 하셨어요?”
“뭐, 반은 성공이지.”
“반은 성공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도훈은 할머니와 있었던 일들을 한민국에게 비교적 자세히 설명했다.
다 듣고 난 한민국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실장님, 그게 어떻게 반은 성공이에요?”
“계약서 썼으면 반은 성공한 거지.”
“아니, 생각해 보세요. 실장님이 가진 것 중에 회장님께 물려받지 않은 게 어디 있어요?”
“내가 가진 재산 말고 인맥을 이용하면 되지.”
“누구요?”
“한 매니저.”
도훈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졌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한민국은 운전대를 쥔 손을 꽉 잡으며 답했다.
“왜 그러세요? 실장님.”
“혹시 모아 놓은 돈 있어?”
“제가 무슨 돈이 있다고 그래요?”
한민국은 얼굴까지 벌겋게 변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도훈이 피식 웃었다.
“한 매니저는 운전 조심해.”
“네, 조심할게요.”
“한 매니저는 한몫 잡을 걸 놓친 거야.”
“헉, 원래 보증 서는 거 아니랬어요.”
“괜찮아, 빌릴 데는 많으니까.”
말을 마친 도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핸드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화면에는 김다솜이라고 굵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었다.
통화 연결음이 들리자 도훈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창가의 경치와 함께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할머니 쪽은 잘된 것 같아, 반은 성공으로 봐도 돼.”
―정말이에요?
“그래,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잘 안 들려요, 그냥 말해 봐요, 오빠.
“이번에 우리 영화 제작하려고 모아 둔 돈 있다고 했지?”
―응, 그랬죠. 오빠한테는 다 얘기했잖아요.
“그래 얘기했지, 그때 오억이라고 했지?
―맞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영화 제작비는 왜 물어보세요? 지금은 어차피 엄마 때문에 그 돈 쓰지도 못해요.
“그럼 그냥 묶여 있느니, 그 돈 좀 잠깐 쓸 수 있을까?”
―그 돈은 왜요?
“할머니의 마음을 돌리는 데 잠깐 필요해서.”
―계좌 찍어 주세요.
“오케이, 고마워.”
도훈은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를 종료했다.
그때 뒤통수가 근질거릴 정도의 따가운 시선이 쏟아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한민국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힐끔 바라보고 있다.
“왜 그래 한 매니저?”
“오억을 빌리는 게 그렇게 쉬운 거였어요?”
“쉽지는 않지.”
“지금 쉽게 빌리셨잖아요.”
“그야 사람 나름이지, 나는 원래 믿음을 주는 사람이잖아.”
“음, 그건 조금…….”
“한 매니저는 날 의심하는구나.”
“그게 아니라, 너무 황당해서 그렇죠.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분이잖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알던 사이였다고 했잖아.”
“원래 보증은 초등학교 동창을 제일 조심하라고 우리 어머니가…….”
“아, 이거 보증 아니라니까 그래.”
“보증보다 더 무서운 거죠. 그대로 날릴 수도 있는 돈이잖아요.”
“뭐, 그야 그렇지.”
“앗, 인정하시는 거예요?”
“한 매니저, 운전 조심.”
도훈은 전방을 가리키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생각해 보면 김다솜이 조금 별난 곳이 있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오억을 선뜻 빌려준다는 사람이 김다솜 말고 또 어디에 있을까?
고민도 잠시 도훈은 재빨리 어디론가 메시지를 보냈다.
* * *
한편 JK유통의 본부장실.
한강이 훤히 보이는 전망 좋은 방에서 이도준은 볼펜을 딸깍거리며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그때 문이 덜컥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의자를 돌려 상대를 본 이도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와.”
“도준이 형, 오랜만이에요.”
“그래, 해외 출장은 잘됐고.”
“그럼요, 형 덕분에 잘 지내고 왔어요. 그런데 형은 잘 못 지낸 것 같은데…….”
“소식 들었구나.”
“몸은 미국에 있어도 귀는 항상 여기에 놔두고 다니잖아요.”
그는 바닥을 가리키며 환하게 웃었다.
“그렇지, 우리 도민이의 정보력이 어디에서 빠지지 않지.”
이도준은 도민이라 부른 사내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마치 든든한 아군이라도 만난 것처럼 끈끈한 눈빛을 흘리는 이도준.
상대의 이름은 이도민.
장경자의 둘째 아들인 이세형의 첫째 아들이었다.
아직 후계 구도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기에 이도준의 처지에서는 가장 경계하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급한 일을 처리하는 데는 집안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촌 동생 이도민이었다.
물론 지금 이렇게 만난 것은 완벽한 아군의 입장에서의 만남이었다.
이도민은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그놈 때문인 것 맞죠?”
“그래, 얘기는 들었다고 하니 그놈을 어떻게 박살 내면 좋겠냐?”
“방법이야 여러 가지죠.”
“그 전에 네가 알아야 할 게 하나 있어, 도민아.”
“그게 뭡니까?”
“할머니가 우리를 감시하신단다.”
“감시요?”
“그러니까…….”
이도준은 그동안의 사정에 대해서 이도민에게 말해 주었다.
광고 교체 건에 대해서는 회사 내부에서 알려진 일이었지만, 팔순 잔치의 일은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이도민이 눈을 반짝였다.
다 듣고 난 이도민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정당한 싸움은 안 말리겠지만, 힘으로 누르려고 하면 제재가 들어올 것이 분명해.”
“그러면 우리가 더 유리하죠.”
“우리가 유리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형님은 꼭 힘으로 해결하시려고 해서 문제예요. 떡밥을 던지고 저희는 그냥 낚아 올리면 됩니다.”
“지금 낚시를 하자는 말이지?”
“네, 우리가 쓸 만한 미끼를 던지면 도훈이 그놈은 반드시 덥석 물 겁니다.”
“미끼라…….”
“그러니 주변을 잘 알아봐야죠.”
“음.”
이도준은 침음을 흘리며 이를 꽉 깨물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두 번의 다툼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팔순 잔치에서도 괜히 건드렸다가 본전도 못 건졌고.
모델 교체를 위한 임원 회의에서도 망신만 당했다.
그전까지 그룹 전체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이도준의 위신이 많이 내려간 상태.
이번만은 꼭 빚을 갚아 줘야 했다.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말이다.
그때였다.
이도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양해를 구하고 사무실 구석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이도준은 그의 행동을 빠지지 않고 바라봤다.
음침한 듯한 저 행동이 이도준은 마음에 들었다.
남을 함정에 빠뜨리는 기술 하나만큼은 도가 튼 놈이었다.
가장 조심해야 하면서도 이런 일에는 가장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인간이 바로 이도민이었다.
지금 누군가의 전화를 은밀히 받는 것으로 봐서 귀국 전에 미리 계획을 준비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전화를 마친 이도민이 다시 이도준에게 다가왔다.
“형님, 상, 중, 하 중 고르시죠.”
“뭘 고르란 말이지?”
“어느 정도로 손을 봐줄까 하는 레벨이죠.”
“그럼, 최고 수준밖에 더 있겠냐?”
“확실히 형님은 선택이 확실하시네요.”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놈을 손봐 주는 데 들어가는 비용은 반반씩으로 하죠.”
“그래, 비용은 다 내가 내도 된다.”
이도준이 손바닥을 보이자 이도민이 검지를 흔들었다.
“그건 아니죠, 이번에 놈이 원하는 걸 철저히 빼앗고…….”
“그다음에는?”
“놈에게 오물을 뒤집어씌워야죠, 그래야 할머니도 더는 그놈을 보지 않겠지요.”
“어째 나보다 도훈이를 더 싫어하는 느낌이구나.”
“저는 혼자서 그룹의 삼 분의 일을 가져갈지도 모르는 놈이 싫습니다. 좋은 건 적게 나누면 나눌수록 좋죠.”
이도민이 창밖을 가리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