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37)
그 시간은 도훈을 위한 시간도 되겠지만, 그들을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허허.”
김민석은 헛웃음을 지었다.
도훈이 빚을 갚는다는 의미를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보면 상대가 이를 악물고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이 빚은 훗날 꼭 갚겠다고 말이다.
김민석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조용히 넘어가길 바랐다.
도훈이 언론에 오르내린다면 유레카도 위태로울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는 일.
김민석은 안타까운 눈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도훈이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안타까워하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찾을 테니 말입니다.”
“아, 언젠가는 찾으시겠죠.”
탁자 아래로 내린 김민석의 손이 살짝 떨렸다.
그가 보기에 도훈의 집착은 상당했다.
어떤 상황인지는 몰라도 어떻게든 상대에게 빚을 갚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재벌 3세가 보이는 광기일 수도 있었다.
대화가 끝나자 김민석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커피숍을 나가기도 전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너 SW 쪽 잘 알지?”
그렇게 대화를 시작한 김민석은 커피숍을 나가기 전까지 핸드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을 본 도훈은 씩 미소를 지었다.
“사람 하나는 잘 봤어.”
이것은 진심이었다.
조용히 자리를 지켜 줄 사람으로 생각하고 부사장 자리에 올린 것인데 예상 밖으로 열정까지 가지고 있다.
대화 도중에 보인 표정을 보면 자신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었다.
반쯤 남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진동으로 바꿔 놓은 핸드폰이 울렸다.
지이잉.
확인해 보니 화면에 뜬 이름은 다름 아닌 김다솜이었다.
―큰일 났어, 오빠.
“큰일이라니?”
―나 이번 작품 진행 못 할 것 같아.
“그게 무슨 말인데? 네가 좋아하는 정여진 선생님까지 같이하기로 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나 걸렸어.
“뭐가 걸려?”
―고시 공부 안 하고 시나리오 쓰고 있는 거 말이야, 지금 모아 둔 돈도 다 압수당하게 생겼어.
“혹시 소문이 나서 걸린 거야?”
―오늘 우리 엄마가 만향정에 왔었대.
“아…….”
―거기서 정여진 배우와 내가 있는 걸 봤대, 그다음은 우리 삼촌을 박박 긁어서 자백을 받아 냈고. 나 어떻게 하지?
“그건 걱정하지 마, 돈은 내가 대면 되니까.”
―그게 아니라 초원의 집도 완성 못 하게 생겼다고.
“흠, 그것도 걱정하지 마, 지금 정도의 완성도면 충분해.”
도훈이 재빨리 그녀를 안심시켰다.
차라리 손을 안 대는 편이 좋을 수도 있었다.
더 이상의 변수는 철저히 차단한다.
이것이 이번 초원의 집에 대한 도훈의 원칙이었다.
변수는 정여진의 출연 하나로 족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김다솜이 울먹거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흑흑, 미안해, 오빠.
참 서럽게도 울었다.
이쯤 되니 도훈도 미안해졌다.
정여진이 참여하면서 생긴 변수였다.
김다솜을 제외하고 초원의 집을 지키는 수밖에는 없었다.
“아니야, 그 정도면 너도 할 만큼 했어.”
도훈이 그녀를 위로했다.
이것은 진심이었다.
김다솜이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오빠한테 미안해서.
“괜찮아.”
―괜찮다니까, 내 마음이 편하네.
김다솜이 울음을 멈췄다.
“그래, 울지 말고 나중에 시간 날 때 보자.”
―지금 봐야 할 것 같은데.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엄마가 오빠 오래.
“…….”
도훈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머리를 식히려는 듯 반쯤 남은 아이스커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한 말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였다.
잠시 심호흡하며 표정을 수습한 도훈이 다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데? 내가 왜 너희 집에 가야 하는지를 모르겠다.”
―내가 오빠 때문에 시나리오 쓰는 거라고…….
“그럼 나를 팔았다는 거네?”
―응.
“흠, 대답이 너무 쉬운데.”
―그래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아까 미안하다는 게 나를 팔아서 그랬던 거였구나, 그런 거였어…….”
―올 거지?
“나중에 봐서 들를게.”
―오늘 와야 해. 안 그러면 나 초원의 집, 그냥 엎을 거야.
“아, 이제는 협박까지 하는구나.”
도훈은 황당한 표정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것도 잠시 도훈은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각까지는 딱 1시간이 남았다.
이곳에서 김다솜의 집까지는 30분 거리.
도훈은 재빨리 밖으로 나가며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고는 바로 택시를 잡았다.
택시에 탄 도훈은 목적지를 말한 후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일단 상황을 분석하고 신속하게 해결한다.
소속 연예인을 달래고 어르던 30년 경력을 여기서 발휘해야 할 때였다.
도훈은 대충 김다솜의 집안 사정을 떠올려 봤다.
김다솜의 오빠는 김진표.
지금 한참 병원에서 구르고 있을 것이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결제 대행을 주업종으로 하는 IT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묘하게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없었다.
이 집에 놀러 왔을 때 항상 밥을 차려 주던 자상함만이 기억에 남았다.
그런데 김다솜의 어머니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변수가 계속 변수를 낳고 있었다.
정여진과 이지유가 초원의 집에 발을 담근 상태.
만약에 여기에서 작품이 시작도 못 한다면?
대충 1년 이상의 시간을 손해 봐야 했다.
가장 빠른 길로 가기 위해서는 변수를 완벽하게 틀어막아야 했다.
* * *
문 앞에 선 도훈은 주변을 둘러봤다.
집은 초등학교 때 놀러 왔던 그대로였다.
다만 달라진 것이라고는 높이 솟은 담장.
이 근방이 재개발되기 전에는 담장 없이도 편히 살던 동네였다.
하지만 유동 인구가 많아졌기에 담장을 높이 올린 것 같았다.
도훈은 심호흡하고 조용히 벨을 눌렀다.
딩동!
안쪽에서는 확인도 없이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고 막 김다솜의 집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뒤쪽에 있던 한민국이 도훈을 불렀다.
“실장님 이거…….”
그가 건네는 것은 과일 바구니였다.
과일 바구니를 받은 도훈이 물었다.
“한 매니저는 같이 안 들어갈 거야?”
“저는 그냥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흠, 그럼 근처에서 커피라도 마시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실장님.”
한민국은 도훈을 향해 90도로 인사하고 뒤로 물러났다.
표정이 의미심장한 것이 꼭 상관을 사지로 보내는 부하의 모습이다.
푸른 잔디가 깔린 정원을 지나자 열 걸음 정도 떨어진 현관문이 열렸다.
순간 빼꼼 얼굴을 내미는 김다솜과 눈이 마주쳤다.
“오빠, 왔어?”
“그래, 어머니는 안에 계시지? 혹시 화가 많이 난 건 아니시지?”
“도훈 오빠 얘기를 하니, 이상하게 화를 내지 않으시네. 이유는 나도 모르겠지만…….”
살짝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모습에 도훈은 어깨를 으쓱했다.
“일단 이거 받아.”
“고마워.”
그때 안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가 멈추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네요.”
도훈이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서는 환하게 웃고 있는 김다솜의 어머니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덕분에요.”
“저, 말씀 좀 편하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전에는 도훈아 하고 불러 주셨잖아요.”
“그럼, 그럴까? 그런데 다 컸는데 그래도 될지…….”
“당연히 그래도 되죠.”
“그러면 지금부터는 편하게 할 테니, 이쪽으로 와서 앉아.”
“네, 어머님.”
도훈은 김다솜의 어머니 최수미가 가리키는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앞에 두고 도훈과 최수미 그리고 김다솜이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최수미였다.
“우리 다솜이한테 얘기는 다 들었어.”
“아, 네…….”
도훈은 슬쩍 김다솜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최수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다솜이가 거짓말한 건 미안해.”
“거짓말이라니요?”
“도훈이 네가 바람 불어넣어서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한 이야기 말이야.”
“알고 계셨나요?”
“착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착한 거 맞지, 이런 쉬운 방법에 넘어가는 걸 보면 말이야.”
최수미가 피식 웃으며 자신의 딸 김다솜을 바라봤다.
도훈도 힐끔 바라보니 김다솜이 얼굴에 손부채질 하고 있다.
시선은 도훈에게 고정한 채로 말이다.
물론 그 눈빛에는 왜 그렇게 쉽게 넘어갔냐는 원망의 감정이 가득하다.
도훈은 그녀를 향해서 어깨를 으쓱한 채 웃었다.
사실 넘어갔다기보다는 이렇게 떠보길 기다렸던 도훈이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공법만큼 잘 먹히는 전략은 없으니 말이다.
“어머니 눈빛을 보니 예전부터 알고 계셨던 것 같은데요.”
“표시가 났나 보네.”
“네, 표정에서 표시가 많이 나요.”
“흠, 그러니까……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 전에 노트에 깨작거리는 건 봤어. 그런데 본격적으로 이렇게 사고를 칠 줄은 몰랐지.”
“지금도 취미로 인정해 주시면 안 될까요?”
“돈이 이 정도로 들어가면 취미가 아니지.”
“작품에 대한 투자는 제가 하겠습니다.”
“빚을 그렇게 지는 것도 취미는 아니고.”
“그럼, 어떻게 해야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우리 다솜이보다 더 적극적이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제게 확신이 들었으니까요.”
“확신이라……. 구체적으로 어떤 확신인지 물어봐도 될까?”
질문을 던진 최수미는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그러고는 진중한 눈빛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도훈은 그 눈빛에 고개를 갸웃했다.
최수미의 얼굴은 마치 최종 면접장에 나온 면접관의 표정이었다.
과연 뽑아야 할까?
탈락시켜야 할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도훈은 지금만큼은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상대는 지금 단순하게 딸의 꿈을 평가해 보란 이야기가 아니었다.
단순하게 말하면 비즈니스적 측면에서 설명해 보란 이야기.
도훈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돈이 될 것 같아서입니다.”
“음, 돈이 될 것 같다는 건 너무 뜬구름 잡는 표현 같은데.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돈과 우리 다솜이의 꿈을 비교해 보면 어떨까?”
“음, 비교는 정확하게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다솜이의 꿈이 아니라, 어머니의 꿈이 아닌가요?”
“그럼 내 꿈이라고 치고 계속 설명해 줬으면 좋겠는데.”
“혹시, 아버님 회사만큼의 부가가치를 다솜이의 작품이 만들어 낸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흠…….”
“이십 년 전 만화 캐릭터 하나가 지금까지 얼마를 벌었는지 아십니까?”
“…….”
“그 당시 투자 대비 오백 배였죠. 그런데 지금은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아직도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으니까요.”
“그건 로또를 말하는 것 같은데.”
“정확하세요, 저는 로또를 말하고 있는 거죠.”
“로또라면 너무 설명이 부족한데.”
“그런데 제 눈에는 로또 번호가 보이는데 어떻게 합니까?”
“재미있네.”
“사실입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말씀해 보세요, 어머님.”
“그 제작비를 다른 곳에서 투자받으면 인정해 줄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