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35)
말끝을 흐리며 도훈을 바라보는 정여진.
정작 놀란 것은 도훈이었다.
“선생님이 이 작품에 출연하신다고요?”
“……힘들까요?”
눈을 빛내는 정여진의 모습에 도훈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작품 자체만으로 본다면 정여진이 초원의 집에 출연한다는 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역사가 문제였다.
고민도 잠시 도훈은 재빨리 생각을 정리했다.
도훈에게는 남들처럼 시간이 넉넉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띄우고 보는 것이 맞았다.
“힘들긴요, 무조건 대환영입니다, 선생님.”
“아무리 독립영화라고는 하지만 감독과 작가하고 상의하는 게 맞지 않나요?”
“작가는 염려 안 하셔도 되고요.”
“그럼 감독하고만 상의하면 되는 거네요?”
“감독도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시나리오는 제가 공동 집필로 참여하게 되었고 감독도 저랑 친하니까 문제없습니다.”
“공동 집필이요?”
“제가 독립영화에 관심이 많아서요.”
“아, 몰랐네요. 한 팀장 말로는 초짜라고 뭐라고 하던데 역시 처음이 아니셨네요.”
“처음은 맞는데 초짜는 아닙니다, 선생님.”
도훈이 뜻 모를 말을 하며 활짝 웃자 정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선문답에 옆에 있던 이지유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 * *
다음 날 아침.
핸드폰 벨 소리에 눈을 뜬 도훈은 침대 맡에 손을 뻗었다.
디디딩, 디디딩.
연신 울려 대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핸드폰.
정작 손에 닿았을 때는 핸드폰이 슬쩍 밀려 침대와 벽 사이로 떨어졌다.
계속 울리는 벨 소리에 도훈은 재빨리 눈을 떴다.
이렇게 전화가 온다는 것은 급한 일이 생겼다는 것.
도훈은 재빨리 침대를 밀어내고 핸드폰을 찾았다.
핸드폰 화면에는 부재중 전화가 주르륵 떠 있었다.
대부분이 김다솜에게서 온 전화였다.
도훈은 재빨리 김다솜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가 한두 번 울리자 김다솜이 전화를 받았다.
“김다솜 작가님.”
―아니, 무슨 작가님이에요? 그냥 다솜이라고 불러요.
“그래, 호칭은 어쨌든 됐고 무슨 일이기에 아침부터 전화를 한 거야?”
―다른 게 아니라, 정재웅 감독한테 여기저기서 연락이 쏟아진대요. 나보고 어떻게 된 거냐고 묻는데, 저도 아는 게 없어서요. 혹시 오빠는 아나 하고 전화 드린 거예요.
“연락이 쏟아지다니?”
―캐스팅에서부터 시작해서 투자 얘기까지 빗발이 치나 봐요.
“이거 아는 사람도 없잖아.”
―그러니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죠.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수화기 너머 김다솜의 흥분한 표정이 눈앞에 선했다.
그만큼 김다솜은 흥분하고 있었다.
도훈은 재빨리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봤다.
초원의 집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아는 바 없었다.
원래도 이랬나?
고개를 갸웃하던 도훈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우리 할 일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솔직히 만들고 싶은 영상 만든다고 사비 털어서 하는 거잖아.”
―그건 그런데, 갑자기 관심이 쏟아지니 이상해서 그러죠. 자세한 내용을 말한 사람은 오빠밖에 없잖아요.
“흠, 그러니까…….”
도훈은 말끝을 흐렸다.
어제 정여진과의 일이 생각난 것이다.
―오빠, 왜 그래요?
“어제 정여진 선생님이 배역에 관심을 보이시더라고. 혹시나…….”
도훈은 어제의 일을 김다솜에게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스노우 볼을 굴린 것은 아닌지 곰곰이 고민했다.
결과만 긍정적으로 나온다면 관계는 없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까악, 진짜예요?
“진짜는 맞는데 귀청 떨어지겠다. 일단 오디션 대본 말고 완성본 좀 보고 싶다고 하시네. 그리고 작가하고 미팅도 잡아 달라고 하시고.”
―진짜죠?
“너무 흥분하지 말고 선생님 스케줄도 봐야 하니까. 일단 미팅 날짜부터 잡자고.”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그래, 선생님께 여쭤보고 나중에 약속 장소하고 일자 보낼게.”
전화를 끊은 도훈은 마른세수를 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태양이 이제야 서서히 떠오른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먹는다고 하지만, 당장은 잠이 필요했다.
도훈은 수수깡 쓰러지듯 침대 위에 털썩 누워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던 중 도훈은 눈을 번쩍 뜨고 핸드폰을 뒤지기 시작했다.
정재웅에게 계속 연락이 온다는 것은 분명 소문이 거하게 났을 거란 이야기.
그때 몇 가지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국민 엄마 정여진, 다음 작은 독립영화!
순간 도훈의 눈이 커졌다.
* * *
이틀 후.
전에 김다솜과 만났던 미슐랭 스타 세 개짜리 한정식 음식점인 만향정에 도착했다.
지난번과는 달리 정여진도 함께했다.
문제는 2팀장 한유라도 왔다는 것.
한유라는 오는 내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도훈과 정여진을 번갈아 봤다.
도훈은 그런 그녀를 보고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도훈은 한유라의 생각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정여진이 독립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못마땅한 것이다.
아마 도훈이라도 한유라와 똑같은 심정일 것이다.
사실 이번 독립영화는 위험 물질을 잔뜩 싣고서 출발하는 화물차와도 같았다.
정여진이 합류한다면 잘해야 본전이었다.
물론 그것은 미래의 일을 모를 때의 일이지만 말이다.
물론 도훈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변화.
정여진의 합류 외에 다른 변화가 있으면 절대 안 되었다.
스노우 볼을 굴려도 여기까지였다.
그것은 로또 1등을 위해 로또 2등 맞은 복권을 버리고 다시 복권을 구매하는 것과 똑같았다.
잠시 후.
도훈 일행은 미리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김다솜과 마주했다.
김다솜은 벌어진 입을 주체하지 못하며 정여진을 바라봤다.
“진짜 뵙고 싶었어요.”
“김다솜 작가님이라고 하셨죠?”
“네, 그런데 부득이하게 가명을 써야 해서요.”
“가명을 쓰는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그게 개인적인 사정이 좀 있어서…… 헤헤.”
말끝을 흐리며 실없이 웃는 김다솜을 보며 도훈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원래 저런 아이가 아니었다.
전생에는 조금 더 나이가 든 후 모습만 남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전생의 모습과 차이가 너무 컸다.
이야기는 물 흐르듯 그렇게 지나갔다.
다행히 김다솜은 도훈의 비밀에 대해서도 철저히 함구했다.
문제는 마지막에 생겼다.
김다솜이 진지한 눈빛으로 정여진을 바라봤다.
“선생님, 대본을 선생님에게 맞게 수정해도 될까요?”
“작가님이 원하는 방향과 틀어지지 않겠어요?”
“아니에요, 선생님을 뵙고 나니 작품의 방향성이 잡혀서요.”
“아, 그렇다면…….”
정여진은 도훈을 바라봤다.
도훈은 보이지 않게 고개를 살짝 저었다.
사실 도훈은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정여진에게 신신당부했었다.
도훈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변수.
그래서 정여진에게 조심스럽게 부탁했었다.
작가가 멘탈이 약하니, 처음 잡은 방향 그대로 달려가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철저하게 변수를 차단하려는 방법이었다.
자칫 김다솜이 엉뚱한 짓을 한다면 평론가들의 키보드를 불태웠던 초원의 집이란 명작이 날아가니 말이다.
김다솜이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듯 답했다.
“네, 그건 선생님 말씀이 맞아요.”
“참, 내가 요즘 가르치고 있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추천해도 되죠.”
“혹시 누군데요?”
“이지유라고 아이돌 출신의 배우 지망생이 있어요.”
“저도 알아요,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배우라니 보고 싶어요.”
“싫다고 할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선생님이 추천하시는 배우분인데 당연하죠.”
“네, 고마워요.”
처음 볼 때부터 손녀와 같은 김다솜에게 아직 말을 놓지 않는 정여진은 아무리 봐도 신기했다.
그렇게 이야기가 훈훈하게 마무리될 때였다.
어디선가 핸드폰 진동음이 울렸다.
지이잉, 지이잉.
모두가 서로를 바라볼 때 김다솜이 미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크로스 백을 집어 들었다.
“죄송해요, 잠시만 전화 좀…….”
미안한 듯 김다솜이 나가자 이번에는 정재웅 감독에게 시선이 몰렸다.
도훈이 힐끔 옆을 보니 한유라 팀장은 아직도 이 작품의 출연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밖에 나갔던 김다솜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들어왔다.
그 모습에 도훈이 물었다.
“얼굴이 왜 그래?”
“작가님 얼굴이 좀 이상하네요. 혹시 어디 아프신 거 아니에요?”
정여진까지 김다솜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아, 아니에요. 아무 일도 아니에요.”
김다솜은 손을 휘휘 저으며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새파랗게 질린 얼굴색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공포 영화 한 편을 보고 온 것 같이 겁에 질린 얼굴.
계속해서 괜찮다고 하는데 더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미팅을 그대로 진행했다.
그렇게 이지유와 정여진의 출연은 확정되었다.
김다솜은 식사를 마친 후 정여진에게 양해를 구하고 번개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
도훈은 그런 김다솜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생에서 누구에게도 겁먹은 적 없던 당돌한 아이가 왜 저런단 말인가?
부모님에게 혼날 때 빼놓고는 저런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순간 도훈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부모님이라…….”
그때 옆에 있던 한유라가 고개를 갸웃한다.
“이 실장, 지금 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팀장님.”
“그런데 이 실장, 이따 회사에 들어가면 나랑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팀장님.”
“그럼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요, 이 실장.”
한유라는 마치 눈으로 도장을 찍을 기세로 도훈을 바라봤다.
* * *
그날 오후. 2팀 사무실.
도훈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숨도 쉬지 않고 자판을 두드리던 한유라 팀장이 재빨리 손을 멈췄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유라 팀장은 도훈에게 손짓했다.
“이 실장, 일단 자리에 앉아요. 녹차, 커피?”
“저는 커피요.”
“뭐, 디카페인 같은 거 찾는 건 아니죠?”
“저는 달달한 커피 믹스가 최고입니다.”
“이 실장도 달달한 거 좋아하나 봐요.”
내용은 부드럽지만, 말투는 톡톡 쏘는 느낌.
마치 전투태세에 돌입하려는 분위기다.
“물론이죠, 그래서 달콤한 마카롱도 준비했습니다.”
도훈은 미리 준비한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형형색색의 마카롱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순간 한유라의 눈이 살짝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세 싸움을 하려던 모습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한유라가 물었다.
“아니, 제가 마카롱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고…….”
“홍보팀 곽수정 대리에게 들었습니다.”
“아, 곽 대리가 정보를 줬군요.”
“뭐, 정보라기보다는 힌트에 가깝지 않을까요?”
도훈이 사람 좋게 웃을 때 한유라가 커피 믹스를 내밀었다.
“뜨거우니 조심해요.”
“네, 잘 마시겠습니다, 팀장님.”
“제가 이렇게 보자고 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하긴 한데, 그것보다 미안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미안하다니요?”
“팀장님들께 제가 먼저 인사드려야 했는데, 계속 정신없는 일이 터지다 보니…….”
“하하, 다 이해해요. 솔직히 강영웅 가수 계약 건이 보통 일인가요?”
한유라가 살짝 눈을 빛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