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34)
이지유가 생수와 손수건을 건넨다.
“고마워, 생각해 보니 처지가 바뀌었네.”
“헤헤, 괜찮아요.”
이지유가 해맑게 웃는다.
그때였다.
연습실의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 문소리에 도훈과 이지유가 고개를 돌렸다.
새치가 희끗희끗하지만 단아하게 머리를 묶은 여자가 연습실을 둘러봤다.
여자와 눈이 마주친 도훈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앗, 선생님!”
이지유도 따라 허리를 숙였다.
여자가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왜 그래요? 사람 쑥스럽게.”
“여긴 무슨 일이세요? 정 선생님.”
도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정여진이었다.
유레카에서 터진 첫 번째 사건의 주인공이자 도훈의 깔끔한 마무리로 유레카에 계속 남게 된 중년 연기자.
물론 그냥 중년 연기자가 아닌 미래의 월드 스타였다.
연기만으로는 지금도 스타란 칭호를 들어도 되지만, 지금 부족한 것은 세대를 아우르는 인지도였다.
그 인지도가 앞으로 십 년 후면 세계의 어떤 배우에게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폭발한다.
늦은 나이에 포텐을 폭발시키는 대배우.
도훈이 관리할 배우는 아니지만, 유레카에서 오랫동안 있어 줬으면 하는 사람이었다.
정여진은 대답 대신 먼저 시선을 슬쩍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대본이었다.
정여진은 이지유의 손에 들려 있던 대본을 확인한 후 말을 이었다.
“무슨 작품인지 물어봐도 될까?”
“아, 초원의 집이라는 작품이에요, 선생님.”
“흠, 혹시 누구 작품인지 알 수 있을까?”
계속 조심스럽게 파고드는 정여진의 질문에 이지유가 머뭇거렸다. 숨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그런 것이었다.
도훈이 재빨리 나서 말했다.
“케이라는 작가의 작품이에요.”
“혹시 드라마예요?”
“아닙니다, 독립영화예요. 그리고 말씀 낮추세요.”
“그럼, 편하게 불러도 되죠?”
“네, 편하게 이 실장이라고 해 주세요. 더 친해지시면 조카라고 생각하시고 그냥 이름을 불러 주시면 더 영광이고요.”
“호호, 이쪽 업계가 처음이라고 해서 걱정했는데 넉살은 백 단이네요.”
“아, 말씀 낮추시라니까요.”
“알았어요.”
“선생님, 혹시 대본에 관심 있으세요?”
“대사가 왠지 입에 착착 감기는 것 같아서 들어와 봤어요. 꼭 김지현 작가 톤하고 비슷하네요.”
“아,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요, 처음에는 몰랐는데 말씀 듣고 보니 톤이 김지현 작가님 작품들하고 비슷해요. 특유의 중산층 감성 있잖아요.”
“흠, 혹시 방송국에 있다가 여기 온 거 아니에요? 딱 보니까 이 업계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저 초보 맞습니다, 낙하산도 맞고요.”
“푸.”
“왜 웃으세요?”
“그렇게 스스로 낙하산이라고 떠벌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뭐, 제가 성격이 좀 솔직한 편이라서요.”
“그럼, 대표님 낙하산 맞겠네요?”
“네, 일단 그렇죠.”
“그럼, 지난번 광고 고맙다고 전해 줘요. 직접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얼마나 보기 힘든지…….”
정여진이 살짝 말끝을 흐렸다.
도훈은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보기 힘든 게 아니라 대표 자격으로 얼굴을 비친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참, 들어온 김에 내가 좀 도와줘도 될까요?”
“도와주시다니요?”
“이 작품요.”
정여진이 슬쩍 대본을 가리켰다.
도훈은 그제야 그 뜻을 알고 두 손으로 대본을 건넸다.
“도와주신다면 영광이죠. 그런데 시간 괜찮으시겠어요?”
“나도 심심하던 차에 잘됐어요.”
정여진이 대본을 펼쳤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대본을 펼쳐 든 이지유와 정여진.
도훈이 마치 감독이 된 듯 자리에서 일어나 나지막이 외쳤다.
“레디, 큐.”
그 목소리에 이지유의 대사가 시작됐다.
대사는 도훈과 연습하던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엄마!”
“왜 그래?”
“딸이 선물 사 왔으면 그냥 고맙다, 수고했다. 이 한 마디면 되잖아. 그런데 왜 적립금 타령이야, 엄마.”
“아니, 아껴야 집을 살 거 아니야. 돈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 푼 두 푼 모아서 집을 사야지.”
“그럼 선물도 사면 안 되겠네.”
“선물마저 없으면 가족 간의 정이 없잖아. 내가 다시 가서 적립해 올 테니 영수증하고 카드 줘.”
“엄마!”
둘의 목소리는 부뚜막에 넣어 놓은 부지깽이처럼 서서히 달아올랐다.
정여진이 대사를 받았다.
“그래 왜 불렀어?”
“솔직히 난 창피해!”
이지유가 삐진 듯 도리질 친다.
둘은 계속 대사를 주고받았다.
중간중간에 마시멜로처럼 달콤한 대사 그리고 이어지는 선인장의 가시처럼 따가운 느낌의 대사.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대사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가족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가족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분위기.
도훈은 그들의 대본 리딩에 눈매를 좁혔다.
정여진은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배역에 몰입해 있었다.
그때였다.
모든 대사가 끝났다.
정여진은 기분 좋게 이지유를 바라봤다.
그녀의 입가에 맺히는 희미한 미소.
누가 봐도 흐뭇해하는 엄마의 미소였다.
같이 마주 보고 있다가 이지유가 번뜩 정신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니야. 생각보다 잘하는데, 혹시 연기는 누구한테 배웠어?”
“그러니까, 배웠다기보다는 연기에 소질이 없다고 꾸중만 들어서…….”
“흠, 잠시만!”
정여진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러고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혹시 박 교수 아니야?”
“그분 성이 박 씨는 맞는데…….”
다시 어물거리는 이지유를 본 도훈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동현대학의 박 교수면 맞습니다.”
“아, 그래요?”
“그런데, 왜 물어보신 겁니까?”
“제가 보기에는 이쪽도 선무당이 사람 잡을 때가 많아서요. 선무당이라고 하기보다는 개 버릇이라고 해야죠.”
정여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런 정여진의 눈빛은 전생의 기억에도 없었다.
도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선무당이라고 하기보다는 정치질한다고 봐야겠죠.”
“흠, 그렇다면…….”
도훈이 슬쩍 말끝을 흐렸다.
이지유가 있던 SW엔터 자체가 그렇게 투명한 회사는 아니었다.
외형적으로는 계속 성장하지만, 연예계의 스캔들 제조기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평이 안 좋은 회사였다.
정여진이 말하는 정치질이란, 단순하게 연기 레슨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박 교수란 작자가 SW엔터에서 특정인의 라인을 탔다는 이야기였다.
다시 말해 그 때문에 이지유가 SW엔터의 특정 라인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
어찌 보면 바로 계약 해지하고 헌신짝처럼 버린 SW엔터의 행동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회사 전체가 아닌 누군가의 미움을 받았다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누군지는 몰라도 시간이 나는 대로 갚아 주리라 결심하고 머릿속에 새겼다.
도훈이 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정여진이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그 작자에게 연락을 해 봐야겠어요. 아무리 멍청해도 똥오줌을 가려야지 말이 되죠.”
자신의 일처럼 흥분하는 정여진을 본 도훈이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괜히 지금 긁어서 부스럼만 만들 수도 있고요. 이건 제가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정여진이 나선다는 건 그만큼 이지유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
하지만 도움은 거기까지였다.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도 없지만, 단순하게 말로 갈음될 죄는 아니었으니까.
도훈의 표정을 본 정여진이 말했다.
“그래요? 그럼 그건 이 실장이 알아서 하고요.”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내가 부탁할 게 몇 가지 있는데…….”
“하하,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지유 배우를 내게 맡기면 안 될까요?”
“선생님이 지유를요?”
“제가 볼 때는 이 친구 연기는 잡초 속에 핀 국화 같아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연기자가 갖춰야 할 건 다 갖췄다는 거죠. 연기자야 잡초일 때도 있고 한 송이 꽃일 때도 있고…… 모든 걸 다 보여 줘야 하는데, 선무당은 잡초를 뽑아내려고 하죠.”
“음.”
도훈은 턱을 어루만졌다.
정여진만의 철학이 묻어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말뜻을 곱씹을 필요는 없었다. 정여진이 이지유의 연기를 봐준다고 하면 그녀의 포텐이 터지는 시기를 더 앞당길 수 있을지 몰랐다.
“제가 깊은 뜻은 잘 모르지만, 선생님이 봐주신다고 하면 저는 감사하죠.”
도훈은 힐끔 이지유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이지유는 그제야 눈을 크게 뜨고 테이블에 머리가 닿도록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너무 그러지 마. 그리고 선생님이란 호칭이 좀…….”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할지…….”
“그냥 선배님이라고 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생님을 어떻게 선배님이라고…….”
“어머, 얘 좀 봐, 내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여?”
“아, 그건 절대 아니에요, 선생님.”
“어머, 계속 선생님이라고 하네.”
“그게 아니라, 선배님, 선생님…….”
혀가 마구 꼬이는 이지유의 모습을 보던 도훈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이지유, 하나만 해라, 하나만.”
도훈의 말에 이지유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정여진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내가 선배님이라고 부르라고 하는 건 이유가 있어서야. 나중에는 불편하면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되지만, 내가 너를 지도할 때는 선배님이라고 해야 편할 거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진짜 선생님 혹은 스승은 내가 아니니까.”
“선생님,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인지.”
“그러니까…….”
정여진은 인자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 설명을 듣던 도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여진의 말은 간단했다.
스승은 자신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것이 배우에게는 공부라는 것.
현대 연기 이론의 기초를 만든 스타니슬랍스키의 이론과 일치하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메소드 연기.
어떻게 보면 거창한 연기 이론은 아니었다.
관찰과 몰입이 중심이 된 가장 기본적인 연기를 말하는 것이니까.
도훈은 앞으로 그녀가 이룩해 나갈 성과가 아닌 정여진의 인품에 놀랐다.
생각해 보니 이번 생은 혼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는 인연이 없었던 강영웅의 도움도 받았고 지금은 정여진이 돕고 있으니 말이다.
도훈이 눈을 빛내고 있을 때 정여진의 말이 끝났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앗, 이게 수업이었어요? 선생, 아니 선배님.”
“옳지, 잘했어, 후배.”
정여진이 상큼한 미소로 마무리하자 이지유가 다시 한 번 절하듯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에 말없이 웃던 정여진이 이번에는 살짝 도훈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부탁 하나 더 있는데…….”
소녀처럼 해맑은 모습으로 눈을 빛내는 정여진.
도훈이 고개를 기울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그냥 편히 말씀하시라니까요.”
“이 작품에 관심이 가서요.”
“관심이 가신다는 건 혹시…….”
“네, 가능하면 나도 이 작품에 참여하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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