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의 연예계 공략법 (20)
그때였다.
이지유가 신음을 토해 냈다.
“끙…….”
“괜찮으세요?”
한지혜가 묻자 이지유가 눈을 크게 떴다.
“여긴 어디…….”
“어디긴요, 집이지요.”
“어떻게 오신 거죠.”
“그야 사촌 동생이 문을 열어 줘서 들어왔죠.”
“아, 그랬구나.”
고개를 끄덕인 이지유는 기지개를 켜며 자신의 주변에 모인 이들을 확인했다.
당황한 모습이 없자 한지혜가 물었다.
“괜찮으세요? 갑자기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 있는데 놀라지 않으시네요.”
“방송 프로그램보다 인원도 적은데요, 뭐.”
“아, 방송요.”
“네, 미리 연락받았잖아요.”
이지유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자 한지혜의 이마에는 주름이 잡혔다.
서로 시답지 않은 이야기가 오간 후 한지혜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욕설 논란 관련 인터뷰를 진행해도 될까요?”
“아, 욕설…… 깜빡하고 있었어요. 그 나쁜 놈들!”
다시 머리를 감싸 쥐는 이지유.
방 안에서 표정 관리가 되는 것은 도훈뿐이었다.
사실 도훈도 표정을 숨기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전생의 기억과 똑같은 이지유의 모습에 도훈은 웃음을 겨우 참고 있었다.
걸 그룹 출신으로 이번 욕설 사건 이후 꽤 오랜 시간 시청자들에게 잊힐 인물.
하지만 도훈과 손을 잡고 방송 복귀에 성공한 연예인.
털털한 성격에 재치 있는 입담으로 앞으로 도래할 케이블 TV 전성기에 여러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는 친구였다.
이것은 전생의 기억.
도훈은 그 공백기를 없앨 계획이었다.
* * *
소형 카메라에 간이 조명이 이지유의 방에 세팅되자 한지혜는 질문지를 들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혼자라면 음성 인터뷰만으로 만족했겠지만, 도훈과 한민국의 도움으로 영상 인터뷰를 진행 중이었다.
정신없던 상황과는 다르게 인터뷰는 진중하게 진행되었다.
사실 인터뷰 전에 도훈은 한지혜에게 맡겨도 좋을까, 하는 고민을 했었다.
한지혜가 이번 사건을 바로잡는 것은 십 년 후.
지금 한지혜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십 년치의 방송 내공이었다.
그런데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을 보니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지혜의 멘트를 끝으로 인터뷰는 끝났다.
이제 방 안을 정리하고 떠나면 되었다.
인터뷰를 마친 이들의 표정은 모두 비장했다.
취재한 내용으로는 이지유도 이번 사건의 피해자.
더 큰 피해자인 친구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던져 막았지만, 돌아온 것은 세상의 손가락질이었다.
한지혜는 이지유에게 다가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게 뭐예요?”
“음성을 분석한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땄거든요. 그리고 욕설 논란의 중심에 섰던 그 후배 아이돌의 인터뷰도 있어요. 방송에 내보내기 전에 보여 드리고 싶어서요.”
“그게 진짜예요…….”
“일단 보세요.”
한지혜는 핸드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낭랑한 사내의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이번 오해의 중심은 바로 왜곡입니다. 그러니까…….
인터뷰가 끝나자 이번에는 영어가 흘러나왔다.
―아이 엠…….
아래에는 자막까지 떠 있었다.
―저는 매사추세츠 공대 음성 공학과의 교수 샘이라고 합니다. 제가 학생들과 분석한 바에 의하면…….
이지유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렇게 일련의 인터뷰 과정이 끝나고 짐도 다 승합차에 옮겨 놓은 상태.
모두가 나가려고 할 때 이지유가 한지혜를 조심스럽게 불렀다.
“한 피디님.”
“네?”
“혹시 어떻게 아셨어요? 미리 MIT에 의뢰까지 하시고…….”
“저기 저 사람이 제보했어요.”
“저 사람이요?”
“저기 오른쪽 말이에요.”
“아…….”
이지유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도훈을 바라봤다.
때마침 도훈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친 도훈이 천천히 걸어왔다.
거침없이 다가오는 도훈의 모습에 이지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훈의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와도 같았다.
사냥감을 바라보는 사냥꾼의 눈.
하지만 이지유의 앞에 왔을 때 도훈의 분위기가 변했다.
그저 동네 아저씨같이 편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동안 힘들었죠?”
“지금도 힘든데요.”
“뭐, 지금 힘든 건 당연하고. 이제 앞으로 계획을 잘 세워야 하지 않을까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한지혜 기자님이 뒤에서 도와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살짝 경계하는 눈빛에 도훈이 씩 웃었다.
“당연히 도와야죠, 원래 빌런은 주인공을 이기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그렇지?”
말을 마친 도훈은 힐끔 이강민을 바라봤다.
이강민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원래 범인은 주인공한테 잡히기 마련이죠.”
“역시 우린 통하는 데가 있어.”
“맞아요, 아저씨…….”
도훈이 살짝 인상을 쓰자 이강민이 바로 태세 전환을 한다.
“이렇게 젊은 아저씨는 없죠. 형하고는 통하는 데가 많은 것 같아요.”
이강민이 씩 웃자 도훈이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분위기를 풀려는 듯 이강민과 대화를 나누던 도훈이 이번에는 이지유를 바라봤다.
“그냥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론이요?”
“이제 악몽은 떨쳐 버리고 미래를 준비하셔야 할 때입니다.”
“죄송해요.”
“네?”
“제가 보장성 보험은 다 채워 놓은 상태라…….”
그녀의 말에 도훈은 입을 떡 벌렸다.
생각해 보니 이 장면.
전생에 그녀와 처음 만났던 때와 똑같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이강민이 누나 이지유의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누나, 이 형아, 기획사 분이셔.”
“앗,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이지유의 모습에 도훈은 한숨을 내쉬며 명함을 건넸다.
“생각해 보니 정신이 없어, 제 소개도 안 했네요.”
명함을 본 이지유가 고개를 갸웃했다.
“유레카요? 처음 들어 보는데요.”
“뭐, 다 그렇게 말씀하시죠. 유레카의 전신이 미라클의 계열사인 JK엔터거든요.”
“아, JK엔터요?”
이지유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명함을…….”
“저 지금 스카웃 제안 드리는 겁니다.”
“스카웃이요? 지금 상황이 정리도 안 된 상태인데…….”
“원래 정상에 있을 때는 모든 사람이 손을 내밀죠. 그런데 말이죠. 이렇게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손을 내미는 사람이 있을까요?”
도훈이 눈을 빛내자 이지유가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제갈공명을 모시고 싶은 유비라고 생각하시죠. 그런데 기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준비됐다고 생각하면 제 전화를 받으세요.”
“준비되면요?”
“네, 준비됐다고 생각하면 꼭 전화를 받으세요. 정확히 세 번을 안 받으시면 거절의 의미로 알겠습니다. 삼고초려입니다.”
“대체 왜 제게 이렇게까지…….”
“제 눈에는 가능성이 보이거든요.”
말을 마친 도훈은 자리에서 떠났다.
* * *
검은색 승합차 안.
한지혜는 고개를 기울이며 도훈을 바라봤다.
“저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네, 뭐든지요.”
“이지유 씨와 원래 알던 사이예요?”
“오늘 처음 보는데요.”
도훈이 어깨를 으쓱했다.
동시에 한지혜의 고개가 한 단계 더 기울어졌다.
“그럼 이지유 씨의 조카는 어떻게 알았으며 말씀 나누시는 걸 보니 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굉장히 편하게 얘기하시던데요.”
그녀의 눈에는 호기심이 잔뜩 묻어 있다.
도훈은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제가 붙임성이 있는 편입니다. 한 기자님과 만났을 때도 전부터 아는 사이 같지 않았나요?”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좀 외향적인 성격이라서요.”
그때 운전대만 잡고 아무 말 없던 한민국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실장님이 외향적이셨어요?”
“몰랐어?”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좀 아리송하네요.”
룸 미러로 비친 한민국의 표정에 한지혜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웁.”
“괜찮으세요?”
“네, 민국 씨 표정이 너무 웃겨서요. 그건 그렇고…….”
한지혜가 미간을 좁혔다.
그 모습에 도훈이 물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제가 조금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서요. 대체 왜 그런 제안을 하신 거죠?”
“뭐가요?”
“계약 제안하셨잖아요. 제가 이지유 씨 팬이긴 해도 좀 걱정이 되네요.”
“무슨 걱정요?”
“지금 계약 제안하시는 건 좀 무리 아닌가 해서요? 들어가셔서 상사분한테 까이실 텐데…….”
한지혜는 슬쩍 도훈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도훈은 최대한 포근한 미소를 장착하고 말했다.
“저는 믿거든요.”
“이지유 씨를요?”
“아니, 한 기자님을요.”
“네? 저를 믿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한지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눈빛을 마주한 도훈이 사람 좋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는 한 기자님이 사건 수첩에서 이지유 씨에 대한 사건을 보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보도한다고 해도 일이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저는 해결해 주시리라 믿어요. 그래서 한 기자님께 제보 드린 거고요. 한 기자님도 확신이 있기에 취재하신다고 한 거 아닌가요?”
“…….”
한지혜는 아무 말 없이 도훈을 바라봤다.
잠시 후, 방송국 사옥 앞에서 내린 한지혜는 멀어지는 승합차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장비를 실은 카트를 끄는 그녀의 걸음은 오늘따라 힘차 보였다.
누군가가 자신을 이렇게 굳건하게 믿은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지금 그녀는 내리기 전 도훈이 한 말 때문에 심장이 뛰고 있었다.
도훈은 한지혜가 이 보도를 내보내는 것에 자신의 자리를 건다고 했다.
한지혜도 이번 일에 자신의 자리를 걸어 보기로 했다.
* * *
유레카로 돌아가는 검은색 승합차 안.
한민국이 입맛을 다시며 옆을 힐끔 봤다.
“실장님 왜 그러셨어요?”
“뭘 왜 그래?”
“아니, 왜 마지막에 자리를 걸고 이 일을 추진한다고 하셔서 한 기자님 가슴에 불을 지피셨잖아요. 방금 차에서 내리실 때 잠깐 보니 눈에서 불꽃이 일던데요.”
“세상에 자기 자리 안 걸고 일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실장님이요.”
“나?”
“실장직에서 해임되면 대표로 복귀하실 거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거봐요.”
“어쨌든 자리를 걸잖아. 그리고 너도 이번 일 잘못되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으니 그렇게 알아.”
“저는 또 왜 걸고 넘어가십니까?”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의 자리를 거는데 너는 안 걸 거야? 안 걸면 반칙이지.”
“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지유 님은 과연 올까요? 솔직히 저는 와도 걱정입니다. 회장님이 가만히 있겠어요? 이미지를 얼마나 중시하시는 분인데……. 기업 이미지 아작 냈다고 실장님 바로 불려 들어가실 수도 있어요.”
“뭐, 거기까지는 예상한 거고. 지금은 이지유가 우리 회사로 오는 게 중요한 거야.”
“설마 이렇게 손을 내밀었는데 안 오겠어요? 갈 데도 없잖아요.”
“그건 모르지…….”
도훈은 말끝을 흐리며 창밖에 보이는 한강을 바라봤다.
한강의 물줄기는 쉬지 않고 흐르지만 저게 한강인 것은 변함없다.
시간이 거꾸로 흘렀든 똑바로 흘렀든 이지유가 이지유인 것도 똑같다.
그렇다면 낚싯대를 던졌다고 바로 딸려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밀고 당길 수는 없는 노릇.
자신과 함께할 친구들을 모두 성공시키려면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이지유가 넘어올 특별한 수단을 준비했다.
* * *